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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룡 시인
- 생몰 1932년 4월 20일 ~ 2002년 7월 29일
- 데뷔 1955년 문학예술
- 학력 중앙대학교 영문과
- 경력 한국일보 근무
- 수상 989년 국제펜클럽 문학상
안개비 / 박성룡
안개비가 내리고 있다.
이 세상 풍경들은 모두
후르스름한 모기장 속에
갇혀 있다.
인간이 아무리
빗방울을 잘게 썰 수 있다 한들
이런 조화를 이룰 수 있으랴.
물방울까지 이렇게 잘게 써는
그는 과연 누구인가.
박성룡 / 풀잎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하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또 저리 몸을 통통거릴까요.
그러나,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풀잎' 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 버리거든요.
바람 부는 날 / 박성룡
오늘따라 바람이
저렇게 쉴새없이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은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풀잎에
나뭇가지에
들길에 마을에
가을날 잎들이 말갛게 쓸리듯이
나는 오늘 그렇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아 지금 바람이
저렇게 못 견디게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또 내가
내게 없는 모든 것을 깨닫고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과목(果木) / 박성룡
과목(果木)에 과물(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事態)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뿌리는 박질(薄質) 붉은 황토에 가지는 한낱 비바람들 속에 뻗어 출렁거렸으나
모든 것이 멸렬(滅裂)하는 가을을 가려 그는 홀로 황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게 되는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ㅡ 흔히 시(詩)를 잃고 저무는 한 해, 그 가을에도 나는 이 과목의 기적 앞에 시력(視力)을 회복한다.
처서기 /박성룔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천지를 울리던 우뢰소리들도 이젠 마치 우리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걷히듯 먼 산맥의 등성이를 넘어가나보다.
역시 나는 자정을 넘어 이 새벽의 나른한 시간까지는 고단한 꿈길을 참고 견뎌야만 처음으로 가을이 이 땅을 찾아오는 벌레 설레이는 소리라도 듣게 되나보다.
어떤 것은 명주실같이 빛나는 시름을, 어떤 것은 재깍재깍 녹슨 가윗소리로, 어떤 것은 또 엷은 거미줄에라도 걸려 파닥거리는 시늉으로 들리게 마련이지만, 그것들은 벌써 어떤 곳에서는 깊은 우물을 이루기도 하고 손이 시릴 만큼 차가운 개울물소리를 이루기도 했다.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나는 아직 깨어 있다가 저 우뢰소리가 산맥을 넘고, 설레이는 벌레소리가 강으로라도, 바다로라도, 다 흐르고 말면 그 맑은 아침에 비로소 잠이 들겠다.
세상이 유리잔같이 맑은 그 가을의 아침에 비로소 나는 잠이 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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