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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편지

[열린편지] 빈 항아리가 더 멀리 소리를 보냅니다

작성자규민이 사랑|작성시간26.06.10|조회수19 목록 댓글 0

[열린편지] 빈 항아리가 더 멀리 소리를 보냅니다

산꼭대기를 향해 거대한 바위를 밀어 올리는 한 사내가 있습니다. 등은 땀에 젖고, 손은 돌에 쓸리며, 숨은 턱까지 차오릅니다. 마침내 정상에 닿는 순간, 바위는 무심하게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집니다. 그는 침묵 속에서 다시 산 아래로 걸어 내려갑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립니다. 영원히, 아무런 결실도 없이.

프랑스의 작가이자 사상가 알베르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재해석한 그리스 신화의 장면입니다. 신들이 시지프에게 내린 형벌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끝없이 반복되지만 아무 열매도 남기지 않는 무의미한 노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카뮈는 이 절망의 풍경 앞에서 뜻밖의 문장으로 책을 닫습니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우주적 무의미 앞에서 더 이상 의미를 구걸하지 않고, 자기 운명을 똑바로 응시하며 살아가는 인간만이 비로소 자유롭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카뮈의 사상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간 이성과 진보에 대한 낙관이 무너진 20세기 유럽에서, 그는 값싼 위로를 거부했습니다. 인간은 의미를 갈망하지만 세계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정의를 바라지만 역사는 피를 흘리고, 사랑을 붙들지만 죽음은 사랑하는 이를 빼앗아 갑니다. 이 거대한 갈망과 우주의 침묵 사이의 충돌을 그는 ‘부조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카뮈의 무신론은 단순한 냉소나 방종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만적인 희망보다 정직한 절망을 택하려는 강인한 휴머니즘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현대인들에게도 공감을 얻습니다.

기독교는 여기서 먼저 뼈아픈 반성을 해야 합니다. 때때로 교회는 고통받는 이들에게 “이 또한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도하면 다 해결됩니다”라는 식의 피상적인 해답을 너무 쉽게 내놓았습니다. 고통의 현실을 충분히 듣지 않은 채 섭리를 말했고, 절망의 깊이를 헤아리지 않은 채 믿음을 요구했습니다. 카뮈를 비롯한 많은 지성인들이 거부했던 것은 바로 이런 왜곡된 종교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실패가 곧 기독교 진리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카뮈의 문제 제기는 장엄하지만, 그의 출발점에는 여전히 검토해야 할 전제가 있습니다. 그는 세계가 침묵한다는 경험에서 출발하여, 세계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내가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 곧 대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까? 침묵은 부재의 증거일 수도 있지만, 언제나 부재의 증거는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왜 인간은 무의미 앞에서 이토록 아파합니까? 왜 선한 사람이 고통당할 때 우리는 “세상이 원래 그렇다”고 쉽게 넘기지 못합니까? 왜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그것이 자연의 순환일 뿐이라고 말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것이 전부일 수 없다”고 느낍니까?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런 통찰을 제시했습니다. 갓난아기가 배고픔을 느낀다면 음식이라는 것이 있고, 새끼 오리가 헤엄치고 싶어 한다면 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우리 안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만을 위해 지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단서일 수 있습니다. 의미를 향한 목마름은 착각이 아니라, 샘이 있음을 알리는 내면의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빈 항아리가 더 멀리 소리를 보냅니다. 가득 찬 독은 두드려도 둔탁하지만, 비어 있는 항아리는 멀리까지 공명합니다. 목마른 사람만이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허기진 사람만이 빵 냄새에 걸음을 멈춥니다. 우리 영혼의 빈자리와 부조리의 감각은 단순한 결핍이나 절망의 증거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 안에 마련된 자리이며, 의미의 근원이신 창조주를 향한 영혼의 울림입니다.

성경은 카뮈가 고뇌했던 부조리를 값싸게 회피하지 않습니다. 전도서의 기자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외치며 해 아래 인생의 허무를 직시했습니다.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질문을 억압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질문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찢어지는 질문을 안고 하나님 앞까지 나아가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대답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팀 켈러가 『고통에 답하다』에서 강조하듯, 세속주의는 고통을 무의미한 우연으로 치부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고통 속으로 들어오셨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부조리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팔짱 낀 채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친히 이 땅에 내려오셔서 배신당하고, 조롱받고, 버림받고, 침묵의 하늘 아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고통과 죽음과 무의미가 인간의 마지막 운명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시지프는 무의미한 바위를 홀로 밀어 올립니다. 그러나 복음은 전혀 다른 장면을 보여 줍니다. 인간이 절망의 산을 향해 혼자 돌을 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십자가라는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짐을 함께 지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부활을 통해 죽음 너머의 새 생명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지치고 분주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정말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까? 반복되는 하루를 견디는 것만이 인간의 최선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시고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 안에서, 삶의 의미를 다시 발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낡지 않았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 지으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는 참된 안식이 없나이다.”

빈 항아리처럼 울리는 우리의 마음은 절망의 소리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채워질 수 있다는 신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단지 반복되는 부조리한 하루를 이를 악물고 견디는 시지프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의미를 부여받고, 그 의미를 살아내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26.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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