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편지] 바람은 보이지 않아도 나뭇잎을 흔듭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아무도 본 적 없는 새를 믿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저 산 너머에 황금빛 새가 살고 있습니다. 너무 신비한 새라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그 새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사람들이 웃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어떤 이들은 그 새를 두려워했고, 어떤 이들은 아이들에게 그 새 이야기를 진리처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한 아이가 물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없다고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정말 그 새를 믿어야 하나요?”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1952년 찻주전자 비유를 통해 종교적 믿음을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지구와 화성 사이 어딘가에 아주 작은 도자기 찻주전자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너무 작아 어떤 망원경으로도 관측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다는 사실도 완전히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찻주전자가 실제로 있다고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러셀이 겨냥한 핵심은 분명했습니다. 오래 믿어 왔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이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반증하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믿음이 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존재를 주장하는 쪽이 그 주장에 합당한 이유를 제시해야 하며, 의심하는 사람에게 “없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책임을 떠넘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현대인 역시 실증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데이터, 통계, 실험, 효율이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증거를 보여주면 믿겠다”는 말은 교만한 말이 아니라, 많은 경우 정직한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신을 믿으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허공에 떠 있는 찻주전자를 믿으라는 요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신앙인도 합리적인 의심을 “믿음 없음”으로 몰아붙이거나, 깊은 지적 고뇌를 “기도하면 알게 된다”는 말로 성급히 덮어 버리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대인의 깊은 실존적 허무와 지적 고뇌를 기계적인 종교적 관용구로 기워 넣으려는 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이성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생각하는 일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야말로 신앙의 이름으로 신앙을 훼손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러셀의 비유 앞에서 신앙인은 길을 잃은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러셀의 비유가 가진 한계는 일종의 '범주의 오류'에 있습니다. 찻주전자는 우주라는 공간 안에 존재하는 수십억 개의 사물 중 하나일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목성이나 화성 옆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또 하나의 사물이라면 러셀의 말이 백번 옳습니다. 하나님이 우주 어딘가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물체라면, 망원경으로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은 심각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창조주는 우주 안의 어떤 대상이 아니라, 우주 자체와 물리학의 법칙, 그리고 입증을 요구하는 우리의 이성 그 자체를 존재하게 하는 '존재의 기반'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우주 안의 한 사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주와 경쟁하는 또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우주가 존재하게 되는 근거입니다. 찻주전자가 있든 없든 우주는 그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더 깊은 질문이 있습니다.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있습니까. 왜 우주는 이해 가능한 법칙을 가집니까. 왜 인간의 이성은 세계를 탐구할 수 있으며, 왜 우리는 불의 앞에서 단순한 취향 이상의 도덕적 분노를 느낍니까. 물론 이런 질문들이 곧바로 기독교 신앙을 자동으로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질문들은 신앙이 단순히 무지의 빈틈에 끼워 넣은 상상이 아니라, 존재와 이성과 도덕과 의미의 바탕을 묻는 깊은 사유임을 보여 줍니다. C. S. 루이스는 이 점을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해가 떠오른 것을 믿듯 기독교를 믿는다. 해를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해로 인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신앙은 세상을 덜 보게 만드는 어둠이 아니라, 세계를 새롭게 읽게 하는 빛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 양심의 무게, 사랑의 가치, 용서의 가능성, 고통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 그 빛 아래서 더 선명해집니다.
기독교는 영원히 검증 불가능한 하늘의 찻주전자를 믿으라고 요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중심에는 스스로 존재하신다고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그 주장에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기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역사 속 한 인물이 있습니다. 침묵을 깨고 우리가 사는 이 유한한 역사의 제약 속으로 걸어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빈 무덤은 관념적 철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연극의 원작자가 직접 무대 위로 올라온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피를 흘리셨고, 인류가 마주한 가장 폭력적인 실증인 '죽음'을 부활로 깨뜨리셨습니다. 이것은 입증 책임의 회피가 아니라, 창조주가 자신의 생명을 던져 피로 써 내려간 가장 완전한 입증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고통의 현실을 외면한 종교적 위안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 한복판으로 들어오셨다는 선언입니다. 부활 신앙은 막연한 상징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시대의 조롱과 박해를 감수하며 공개적으로 증언했던 역사적 주장입니다. 그것은 무비판적 맹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한 검토를 요청하는 사건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지성을 버리라는 초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성의 기원을 묻고, 양심의 목소리를 따라가며, 존재의 바닥을 정직하게 응시하라는 초대입니다. 신앙은 모든 질문을 없애는 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나에게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질문을 더 깊고 바르게 품게 하는 빛입니다.
치열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자주 스스로를 증명하며 살아갑니다. 성과로, 숫자로, 인정으로, 효율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받으려 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묻게 됩니다. “나는 왜 여기 있는가. 내 삶은 우연히 떠도는 작은 물건에 불과한가. 내 인생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죽음으로 인생은 끝인가. 죽음 후에 나는 어떻게 되는가.” 이런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선다면 그 질문의 빈자리는 진리가 들어올 수 있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고 우리는 압니다. 바람이 지금 여기 불고 있다는 것을.
어떤 인생이든 살다 보면 그런 흔들림이 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갈망, 사라지지 않는 양심, 용서받고 싶은 마음,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사랑과 의미의 목마름, 씻을 수 없는 죄의식과 능력의 한계, 지적 한계와 채워지지 않는 허무. 그것들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 삶을 스치고 지나가신 흔적일지 모릅니다. 태양은 눈을 감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물은 자기를 비추지 않고 하늘을 비춥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아도 꽃을 피웁니다. 소금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맛을 냅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아도 나뭇잎을 흔듭니다. 복음은 지성을 버리라 하지 않습니다. 그 지성이 태어난 진짜 기원을 향해 눈을 들라고 초청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26.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