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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편지] 캔버스의 성분표가 화가를 지우지는 못합니다

작성자규민이 사랑|작성시간26.06.10|조회수19 목록 댓글 0

[열린편지] 캔버스의 성분표가 화가를 지우지는 못합니다

어느 먼 미래, 예술이라는 말조차 잊힌 시대가 왔다고 상상해 봅니다. 그 시대의 과학자들이 고대 폐허에서 렘브란트의 그림 한 점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수십 년을 바쳐 그것을 연구합니다. 캔버스 섬유의 짜임을 분석하고, 안료의 화학 성분을 밝혀내고, 빛이 물감 표면에서 어떻게 꺾이고 흩어지는지를 정밀하게 기술합니다.

마침내 발표의 날, 수석 과학자가 단상에 올라 선언합니다.

“우리는 이 물체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어떤 법칙에 따라 빛을 반사하는지 남김없이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그린 ‘화가’라는 가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청중은 박수를 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성분을 안다고 화가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물감의 분자 구조를 설명했다고 그림의 의미가 폐기되지도 않습니다. 설명이 늘어난다고 해서 의미가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많은 이들이 이와 닮은 공기 속에서 살아갑니다. 과학은 눈부신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망원경은 우주의 깊은 곳을 열어 보였고, 현미경은 생명의 미세한 결을 드러냈습니다. 유전학은 생명이 적어 내려간 정보의 문장을 읽어 냈고, 뇌과학은 인간의 감정과 판단이 기대고 있는 생물학적 조건을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성취 앞에서 신앙인은 먼저 겸손해야 합니다. 과학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읽어 내는, 인간 지성의 경이로운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위대하다는 사실과, 과학만이 모든 진리를 말할 수 있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앞의 것은 과학이고, 뒤의 것은 과학주의입니다. 과학은 자연 현상이 ‘어떤 구조와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필요하고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왜 존재하는지, 존재 전체의 궁극적 근거가 무엇인지, 인간의 존엄과 양심과 사랑이 어째서 한낱 생존 전략을 넘어선 의미를 갖는지 — 이런 물음은 실험실 안에만 가둘 수 없습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으로 현대 무신론의 가장 강력한 목소리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생명 세계의 복잡함이 창조주의 설계를 요구하지 않으며, 자연선택과 진화의 과정으로 충분히 설명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문제 제기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그 질문을 조롱하거나 피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정직하게 마주 서야 합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구분이 필요합니다. 생명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일과 생명의 ‘궁극적 근거’를 설명하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자동차 엔진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완벽히 설명했다고 해서 그것을 설계한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악보의 잉크 성분을 분석했다고 해서 작곡가의 의도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캔버스의 화학 성분을 밝혀냈다고 렘브란트가 지워지지 않듯, 우주의 법칙을 더 깊이 이해한다고 창조주가 자동으로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수학자 존 레녹스가 짚은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작동 원리’와 ‘행위자’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물리 법칙은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를 말해 줍니다. 그러나 그 법칙이 왜 존재하는지, 우주는 어째서 수학으로 읽히는 질서를 품고 있는지, 인간의 이성은 어떻게 그 질서를 읽어 낼 수 있는지 — 이것은 전혀 다른 층위의 물음입니다.

무신론은 종종 자신을 순수한 과학의 결론인 양 내세웁니다. 그러나 “물질세계가 전부다”라는 명제는 실험실에서 증명된 과학적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를 읽는 하나의 철학적 입장입니다. 물론 유신론도 하나의 세계관입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대화는 “나는 아무 믿음도 없고 당신만 믿음을 가졌다”는 태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는 세계를 해석하는 어떤 전제 위에 서 있다”는 인정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기독교 역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언제나 지성의 편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시대에는 성경의 권위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새로운 발견을 두려워했고, 질문하는 이를 의심했으며, 학문의 자유를 억눌렀습니다. 갈릴레이의 일은 그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 흔히 ‘신앙 대 과학’의 충돌로 단순화되지만, 실은 교회의 정치와 미완의 증거와 인간적 오해가 얽힌 사건이었습니다. 신앙이 이성을 두려워할 때, 신앙은 더 경건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작아집니다. 하나님이 진리의 주인이시라면, 우리는 정직한 질문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본래 정신은 반지성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주를 변덕스러운 혼돈이 아니라 창조주의 질서 있는 세계로 봅니다. 바로 그 믿음이 인간에게 자연을 탐구할 용기를 주었습니다. 세계가 무의미한 소음이 아니라 읽을 수 있는 한 권의 책이라면, 과학자는 그 책의 문법을 찾는 사람이요, 신앙은 그 책의 저자를 묻는 물음입니다.

과학은 사랑할 때 뇌에서 어떤 화학 반응이 일어나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든 가족의 곁을 밤새 지키는 한 사람의 희생을, 화학식 하나로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은 불의를 볼 때 우리 몸에서 어떤 신경 반응이 일어나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우리는 불의를 미워해야 하는가”라는 도덕의 당위까지 실험 장비가 빚어내지는 못합니다. 설명은 의미를 지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설명은 우리를 의미 앞에서 더 깊은 경외로 이끕니다.

기독교 신앙은 과학의 빈틈에 하나님을 밀어 넣지 않습니다. 그것은 참된 신앙도, 좋은 변증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모르는 영역에 숨어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그 전부의 근원이 되시는 분입니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하나님이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는 이 세계가 얼마나 정교하고, 질서 있고, 경이로운지를 더 깊이 보게 됩니다.

캔버스의 성분표는 그림을 설명하는 데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분표가 그림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주의 법칙을 밝히는 일은 위대합니다. 법칙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더 큰 물음을 건넵니다.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존재하는가. 왜 우주는 이해될 수 있는 질서를 지녔는가. 왜 인간은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갈망하는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로마서 1:20)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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