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편지] 흙은 하늘을 향해 숨 쉽니다
동물원 고릴라 우리 앞에서 한 아이가 오래 서 있었습니다. 유리창 너머 고릴라의 손을 바라보던 아이가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우리가 저 친구들과 닮았다면, 사람은 특별하지 않은 거예요?” 아버지는 선뜻 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짧은 침묵 안에는 우리 시대가 진화론 앞에서 느끼는 당혹감이 들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인간의 몸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인간의 존엄과 목적이 어디에 뿌리내리고 있는가입니다.
찰스 다윈은 생명의 다양성이 변이와 자연선택을 통해 긴 시간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통찰은 인간을 자연 위에 군림하는 고립된 군주가 아니라 생명의 그물 안에 놓인 존재로 보게 했습니다. 이 점에서 진화론은 인간의 교만을 낮추는 힘을 가집니다. 우리는 흙과 무관한 존재도, 생명의 세계와 상관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예외도 아닙니다.
그러나 생물학 이론으로서의 진화론과 그 위에 덧입혀진 무신론적 자연주의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생물학이 “인간의 몸이 어떤 자연적 과정을 거쳤는가”를 묻는다면, 무신론적 자연주의는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창조자도 목적도 없다”고 단정합니다. 앞의 것은 과학의 영역에 속할 수 있지만, 뒤의 것은 과학만의 결론이 아니라 철학적 세계관입니다. 과학은 자연 안의 원인과 과정을 탐구합니다. 그러나 “자연 원인을 연구한다”는 말과 “자연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다릅니다. 전자는 과학의 방법이고, 후자는 형이상학적 신념입니다.
자연선택이라는 톱니바퀴를 발견했다고 해서 목적이라는 물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집의 배관과 전기 회로를 설명해도, “이 집은 왜 지어졌는가, 누구를 위해 지어졌는가”라는 질문은 남습니다. 작동 원리와 존재 이유는 서로 다른 층위에 있습니다. 신앙이 경계해야 할 것은 과학 자체가 아니라, 과학의 이름을 빌려 인간 존재의 의미를 성급히 폐기하려는 세계관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창조를 놀라운 균형으로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7). 인간의 재료는 흙입니다. 인간은 흙을 딛고 살며 결국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흙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땅에 속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서는 존재입니다. 흙에서 왔으나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존재입니다.
또한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은 지능이나 능력, 생산성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지능이 낮아도, 병들어도, 장애가 있어도,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해도 인간은 존귀합니다. 인간의 가치는 사회가 매기는 쓸모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여하신 존재의 부름에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는 인간의 가치를 효율, 경쟁력, 유전적 우수성에 매다는 세계관과 결별합니다.
동물에게도 감정과 관계와 복잡한 사회적 행동이 있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더 깊이 경외하게 만듭니다. 인간은 슬픔의 의미를 묻고, 죽음 앞에서 영원을 묻고, 생존 너머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묻습니다. 인간은 생존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책임지는 존재이며, 반응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신앙인도 때로는 성경을 생물학 교과서처럼 읽고 과학을 너무 쉽게 적으로 돌렸습니다. 성경은 생명의 세부 공정을 설명하려고 주신 책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세계와 인간을 바르게 보라고 주신 계시입니다. 생물학이 일깨우는 겸손도 소중합니다. 흙에서 온 자는 흙을 경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겸손이 인간을 우연의 먼지로 격하시키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를 설명하는 것만으로 왜 살아야 하는지까지 답할 수 있을까요? 유전자와 신경계를 다 풀어낸다 해서, 어머니의 눈물과 순교자의 용기와 사랑의 의미까지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인간의 기원을 낮추어 말하면서도 그 존엄은 높여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편 8:4-5).
흙은 흙일 뿐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흙을 잊어서는 교만해지고, 하늘을 잊어서는 허무해집니다. 그날 동물원의 아이에게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래, 우리는 생명의 세계와 깊이 이어져 있단다. 그러나 너는 우연히 흩어진 먼지가 아니란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시고 숨을 불어넣으신 존귀한 존재란다.” 하나님의 숨을 받은 흙은 하늘을 향해 숨 쉽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이사야 43:7).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26.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