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편지] 안테나가 소리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인류의 먼 조상들이 수렵과 채집을 하던 아프리카 초원을 상상해 보십시오. 풀숲을 헤치며 열매를 따고 짐승의 흔적을 따라가던 어느 날, 갑자기 한쪽 수풀이 “부스럭” 하고 흔들립니다. 한 사람은 “바람이겠지” 하며 그냥 지나갑니다. 다른 한 사람은 “맹수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하며 몸을 피합니다. 만일 그 수풀 속에 정말 사자가 웅크리고 있었다면, 차분했던 첫 사람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지나치게 예민했던 둘째 사람은 생존했을 것입니다.
인지종교학은 바로 이런 인간 마음의 구조에 주목합니다. 인간은 의도 없는 자연 현상 속에서도 누군가의 의도와 얼굴을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람 소리에서 위협을 느끼고, 어둠 속 그림자에서 누군가의 존재를 감지하며, 알 수 없는 사건 배후에 보이지 않는 행위자를 떠올립니다. 학자들은 이런 경향을 ‘과잉행위자탐지’라고 부릅니다. 위험을 놓치는 것보다 위험이 없는데도 있다고 착각하는 편이 생존에 더 유리했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 행위자를 민감하게 감지하도록 형성되었다는 설명입니다.
파스칼 보이어는 『종교, 설명하기』에서 종교적 관념이 인간 마음의 일반적인 인지 장치들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분석합니다. 사람은 타인의 마음을 추론하고, 사건의 배후에서 의도를 찾고, 보이지 않는 원인을 상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능력은 사회생활과 생존에 유익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능력이 신, 영혼, 조상, 정령 같은 보이지 않는 존재를 쉽게 받아들이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가 아니라, 인간 뇌가 진화 과정에서 만들어 낸 부산물이라는 주장이 나옵니다.
신앙인은 이 도전 앞에서 귀를 막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정직하게 들어야 합니다. 인간이 두려움 앞에서 신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은 아프지만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역사 속에는 권력의 시녀가 된 종교가 있었고,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기보다 불안을 달래고 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붙드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런 종교성은 진화심리학의 비판 앞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두려움이 빚어 낸 우상은 신앙의 이름을 달고 있어도 참된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어떤 믿음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설명하는 것과, 그 믿음이 가리키는 대상이 “실제로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발생학적 오류에 빠집니다. 눈이 붉은색을 인식하는 뇌 회로를 과학자가 설명했다고 해서, 눈앞의 붉은 사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의 감정이 어떤 호르몬과 신경 작용을 동반하는지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어머니의 사랑이 환상으로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식의 경로를 설명하는 일과 대상의 실재를 부정하는 일은 별개입니다.
오히려 다른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인격적 근원을 찾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착각의 부산물일까요, 아니면 인간이 본래 그런 근원을 향하도록 지어졌다는 단서일까요? 저스틴 배릿은 인간이 신적 존재를 믿는 경향을 자연스럽게 형성한다는 연구들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반드시 신앙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과 관계 맺도록 창조하셨다면, 인간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수신 능력을 심어 두셨다고 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이것은 칼뱅이 말한 ‘신 인식의 씨앗’과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안테나가 소리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안테나는 다만 멀리서 오는 소리를 받아들입니다. 라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고 해서 그 음악을 라디오가 작곡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 마음속에 하나님을 찾는 구조가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는 단서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에게 종교적 감각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그 감각이 착각만을 향하는지, 아니면 참된 대상을 향해 열려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철학자 앨빈 플랜팅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인간의 이성이 오직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방향으로만 형성된 도구라면, 그 이성이 내린 “신은 없다”는 결론 역시 진리라기보다 생존에 유리한 하나의 산물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곧바로 자연주의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정타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질문은 피하기 어렵습니다. 인간 이성이 진리를 향하도록 신뢰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기독교는 이성이 우연한 생존 장치에 불과하지 않고, 진리의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고백합니다.
C. S. 루이스는 인간의 깊은 갈망도 하나의 단서라고 보았습니다. 갈증은 물의 존재를 가리키고, 배고픔은 음식의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어떤 성공과 쾌락으로도 다 채워지지 않는 영원에 대한 갈망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인간 안에는 유한한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신을 상상하는 동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열리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두려움이 만들어 낸 심리적 진정제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오히려 생존 본능을 거스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내어 주며, 낮은 자리를 선택하고, 죽음으로 생명을 여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단순한 자기보존의 계산으로 환원되기 어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이 신을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늘을 향해 열려 있다는 사실은 우연한 잡음일까요, 아니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일까요? 안테나는 소리를 만들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을 향해 오는 소리를 받습니다. 신앙은 두려움이 빚어 낸 우상을 붙드는 일이 아니라, 마음 깊이 심긴 안테나가 마침내 누구를 향하고 있었는지를 깨닫는 일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3:11)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26.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