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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편지

[열린편지] 눈은 많은 것을 보지만, 거울 없이는 제 눈동자를 보지 못합니다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26.06.12|조회수2 목록 댓글 0

[열린편지] 눈은 많은 것을 보지만, 거울 없이는 제 눈동자를 보지 못합니다

가족 식탁에서 말다툼이 길어질 때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나는 그렇게 들었다”고 말합니다. 둘 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서로 다른 자리에 앉아 같은 일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기 자리에서 본 풍경을 너무 쉽게 전체 진실이라고 믿는 데 있습니다.

1940년대 스위스의 심리학자 장 피아제는 동료 베르벨 인헬더와 함께 유명한 '세 산 실험'을 했습니다. 아이들 앞에 높이와 모양이 다른 세 개의 산 모형을 놓고, 반대편에 인형을 앉힌 뒤 물었습니다. "저 인형의 눈에는 산이 어떻게 보일까?" 네다섯 살 아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기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을 골랐습니다. 인형의 자리에 서면 산의 순서가 달라진다는 것을 아이는 아직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피아제는 이것을 '자기중심성'이라 불렀습니다. 

이 자기중심성은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는 저절로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회의실에서, 운전대 앞에서, 댓글 창 앞에서 여전히 내 감정이 가장 크고, 내 상처가 가장 깊고, 내 해석이 가장 정확하다고 느낍니다. 내게는 내가 너무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토머스 길로비치는 2000년 코넬대학교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학생에게 민망한 가수의 얼굴이 크게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강의실에 들어가게 한 뒤, 몇 명이나 알아챘을지 짐작하게 했습니다. 학생들은 절반가량이 보았으리라 예상했지만, 실제로 기억한 사람은 네 명 중 한 명꼴이었습니다. 길로비치는 이를 '조명 효과'라 불렀습니다. 우리는 무대 위 배우처럼 모든 시선이 내게 쏟아진다고 느끼지만, 사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무대의 주인공으로 사느라 바쁩니다. 

오늘날 우리의 손바닥 위에서는 이 착각이 날마다 새롭게 갱신됩니다. '나를 위한' 알고리즘 화면은 내 취향과 내 분노와 내 관심만을 골라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 들여다볼수록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돈다는 생각을 더 견고하게 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내가 본 만큼만 있고, 진실은 내가 느낀 만큼만 있다고 확신하게 합니다.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2005년 케니언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모든 직접 경험은 내가 우주의 절대적 중심이라는 깊은 믿음을 뒷받침한다.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 회로에 새겨진 기본 설정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을 이어받아 인간을 '자기 안으로 굽어진 존재'라 불렀습니다. 가장 좋은 일을 할 때조차 그 끝이 슬그머니 자기에게로 휘어진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인정받고 싶고, 겸손을 말하면서도 겸손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합니다. 자아는 참 조용하지만 집요합니다. 

자기중심성은 결심만으로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눈은 많은 것을 보지만 자기 눈동자는 직접 보지 못합니다. 등불은 방을 밝히면서 제 발밑은 비추지 못합니다. 저울은 많은 것을 달면서 제 무게는 달지 못합니다. 사람이 제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제 몸을 들어 올릴 수 없듯이, 자아는 자아를 들어 올리지 못합니다. 자기 중심성의 변화는 중심의 교체에 있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믿음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천문학이 열렸듯이, 내가 내 인생의 중심이라는 자리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실 때 인생은 비로소 제 방향을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복음은 자아를 고쳐 쓰라는 명령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중심이 바뀌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 안에서 우리는 자신을 정직하게 보고, 이웃을 너그럽게 보며, 내 자리에서만 보이던 산을 조금씩 그 사람의 자리에서도 보게 됩니다.

오래된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두 개의 자루를 메고 나온다고 합니다. 앞가슴에 멘 자루에는 남의 허물이 담겨 있고, 등 뒤에 진 자루에는 자기 허물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허물은 눈만 들면 쉽게 보지만, 제 등에 진 허물은 평생 잘 보지 못합니다. 은혜란 그 등 뒤의 자루를 보게 하시는 빛입니다. 그리고 사랑이란, 남의 앞자루만 보던 눈을 거두어 그의 무거운 뒷짐까지 헤아리게 되는 마음입니다. 복음은 남의 허물을 더 선명하게 보는 눈이 아니라, 내 등에 진 자루를 먼저 보게 하는 빛입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그리고 권면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2:3-4).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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