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편지]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 생깁니다
미국의 한 심리학자가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스탠퍼드 대학의 클로드 스틸 교수는 흑인 학생들과 백인 학생들에게 똑같은 어려운 시험을 치르게 했답니다. 그런데 시험지 맨 위에 인종을 적게 한 집단의 흑인 학생들은, 인종을 적지 않은 집단보다 성적이 눈에 띄게 떨어졌답니다.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흑인은 머리가 나쁘다"는 세상의 편견을 의식하는 순간, 그 의식 자체가 발목을 잡았던 것입니다. 스틸 교수는 이것을 '고정관념 위협'이라 불렀습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두려움 하나가, 멀쩡한 사람의 능력을 절반으로 깎아내린 셈입니다.
열등감은 내가 못나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남과 나를 끊임없이 견주는 마음에서 자라납니다. 키 큰 사람 옆에 서야 내 키가 작아 보이고, 부자 옆에 앉아야 내 형편이 초라해 보입니다. 견주지 않으면 생기지 않을 감정을, 우리는 종일 견주며 키워 갑니다. 열등의식은 진주에 박힌 모래알 같습니다. 키가 작아서, 가난해서, 배우지 못해서, 말이 어눌해서, 남보다 못난 그 자리가 평생 우리를 파고듭니다. 그러나 잘 품어 내면 진주가 됩니다. 아들러(Alfred Adler)는 모든 사람이 열등감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 구루병과 폐렴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던 그는, 늘 건강하고 뛰어났던 형의 그늘에서 깊은 열등의식을 느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무너뜨리려던 그 감정을 해부하여 '개인심리학'이라는 눈부신 성취를 이루어냅니다. 그는 말합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곧 열등감을 느낀다는 것이며, 이는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끄는 성장의 동력이다." 참으로 멋진 통찰입니다.
세상에는 열등감을 딛고 일어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더듬이 데모스테네스는 뼈를 깎는 연습으로 최고의 웅변가가 되었고, 빈곤과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링컨은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촛불조차 못 끄던 병약한 소년 루스벨트는 거친 단련으로 강인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만년 꼴찌 말더듬이였던 처칠은 피나는 연습 끝에 세기의 명연설가가 되었으며, 베토벤은 청력 상실의 절망 속에서도 뼈의 진동을 느끼며 인류 최고의 명곡을 탄생시켰습니다. 성경 속 인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이 둔하다며 주저하던 모세는 출애굽의 영도자가, 약한 가문 출신이라 움츠리던 기드온은 대군을 물리친 사사가 되었습니다. 육체의 질병과 과거의 죄책감에 시달리던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며 기독교 제일의 전도자가 되었고, 스승을 세 번이나 배신했던 평범한 어부 베드로는 뼈아픈 실패를 딛고 초대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숨기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한계를 인정하고 직면할 때, 열등감은 비로소 삶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성장의 원동력이 됩니다.
아들러는 열등감 자체가 병이 아니라, 그것을 핑계 삼아 주저앉을 때 비로소 병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어떤 이는 작은 키 때문에 평생 움츠리고, 어떤 이는 그 작은 키를 딛고 더 높이 뛰어오릅니다. 같은 결핍을 두고 누구는 감옥을 짓고 누구는 사다리를 놓습니다.
열등의식은 우리에게 두 가지 거짓말을 합니다. 하나는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되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전자는 사람을 주저앉게 하고, 후자는 사람을 쉬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열등의식에 붙들린 사람은 칭찬을 받아도 편안하지 않고, 성취를 해도 오래 기쁘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여전히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자기를 남과 견주지 않고 하나님과 마주 보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소년 시절 형들 틈에서 들에 양이나 치는 막내였습니다. 사무엘이 기름 부으러 왔을 때조차 아버지는 그를 부르러 보내지도 않았습니다. 들에 남겨진 막내, 가족의 셈법에서 빠진 이름—그것이 세상이 매긴 다윗의 무게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외모를 보아도 하나님은 중심을 보셨습니다. 세상은 열등감을 노력으로 극복하라 가르치지만, 복음은 그 열등감을 안고 있는 나를 하나님이 이미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저울이 그를 가장 가벼운 자로 달았을 때, 하나님의 저울은 그를 왕으로 다셨습니다. 나를 지으신 분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그 한 가지만 붙들면 남의 시선이라는 그림자는 발밑으로 작아집니다.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 생깁니다. 빛이 없는 곳에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내 안에 빛나는 것이 있기에 비교라는 그림자도 드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림자가 길다고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그림자가 길다는 것은 빛이 그만큼 낮게, 그러나 분명히 나를 비추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작은 별도 제자리에서 빛나고, 늦게 피는 꽃도 제철에 핍니다. 참새는 독수리가 높이 난다고 부러워하다가 제 둥지를 잊지 않습니다. 나무가 장미처럼 피지 못한다고 실패한 것이 아니고, 강물이 바다처럼 넓지 않다고 쓸모없는 것이 아닙니다. 장미가 백합을 부러워한다고 향기가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들꽃이 소나무가 되려고 애쓴다고 자기 아름다움이 커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같은 크기로 찍어 낸 제품처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각 사람에게 다른 결, 다른 자리,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인생의 회복은 남보다 커지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다시 아는 데서 옵니다. 작은 그릇에도 하늘은 담깁니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습니다. 나를 비추는 빛 한 줄기를 붙드는 순간, 평생 나를 따라다니던 그 그림자는 비로소 발밑에 눕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감히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10:12)"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