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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편지] 흉터는 새 살을 막지 않습니다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26.06.19|조회수0 목록 댓글 0

[열린편지] 흉터는 새 살을 막지 않습니다

평생 한 가지 죄의 기억을 짊어지고 산 늙은 수사가 있었습니다. 젊은 날 지은 죄였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그 기억은 밤마다 그를 찾아와 "너는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 속삭였습니다. 어느 날 한 형제가 달려와 말했습니다. "원장님, 우리 수도원의 한 자매에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 말씀을 나누셨다 합니다." 늙은 수사의 손이 떨렸습니다. "그분께 내 옛 죄를 여쭈어 다오. 무어라 하시던가." 며칠 뒤 형제가 조심스레 전했습니다. "여쭈었더니, 그분께서 이렇게 답하셨다 합니다. '나는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수치심 연구로 널리 알려진 브레네 브라운(Brené Brown)은, 죄책감은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하고 수치심은 "내가 잘못된 존재다"라고 말한다고 했습니다. 죄책감은 행동에 관한 것이어서 고칠 수 있지만,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인 수치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숨고, 회피하고, 끝내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됩니다. 브라운은 수치심이 비밀과 침묵과 정죄를 양분 삼아, 빛을 두려워하는 곰팡이처럼 어둠 속에서만 번진다고 했습니다. 수치심은 숨기면 번지고, 말하지 않으면 깊어지며, 판단받으면 뿌리를 내립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자기 벗음을 알고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렸고, 하나님이 부르시자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죄가 들어온 자리에 가장 먼저 찾아온 감정은 회개가 아니라 수치심이었고, 인류 최초의 반응은 뉘우침이 아니라 숨음이었습니다. 융은 사람이 평생 감추고 사는 그늘진 자아를 '그림자'라 불렀습니다. 수치심의 종이 된 사람은 그 그림자가 드러날까 두려워 평생을 가면 뒤에 숨어 삽니다.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 실격』의 첫머리를 "부끄러움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라는 고백으로 열었습니다. 자기 존재 전체를 부끄러움으로 규정한 사람이 끝내 닿은 곳은 깊은 어둠이었습니다. 수치심은 그렇게 사람을 노예로 삼습니다. 보이지 않는 사슬로 묶어, 스스로를 죄인의 자리에 영원히 가두어 둡니다.

수치심의 가장 깊은 자리에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한 가지 갈망이 숨어 있습니다. 이런 나라도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이 얼룩진 모습 그대로 사랑받을 수 있을까. 성경은, 수치심의 노예가 된 사람도 사랑받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숨은 아담을 향해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죄인을 끌어내려는 추궁이 아니라, 어둠 속에 웅크린 자를 빛으로 불러내시는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손수 엮은 무화과 잎을 벗기시고, 친히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사람이 제 손으로 가린 수치는 한 철 만에 시드는 잎사귀였으나, 하나님이 입히신 옷은 한 생명이 대신 피 흘려 마련한 옷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수치를 덮으시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벌거벗기우셨습니다. 그분이 우리 대신 수치를 당하심으로, 우리가 영광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짙은 죄의 먹구름도, 십자가의 빛 아래서는 그 위에 푸른 하늘을 둔 한 조각 구름일 뿐입니다.

흠 없는 나무가 어디 있겠습니까? 베인 자리에 옹이가 박히지만, 그 옹이 곁에서 다시 새 가지가 돋습니다. 흉터는 새 살을 막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 살은 상처가 있던 자리에서 가장 단단하게 차오릅니다.

수치심은 우리에게 숨으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수치심은 "너는 끝났다"고 속삭이지만, 십자가는 "너는 다시 시작될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탕자는 자신의 죄를 알았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계산서를 꺼낸 것이 아니라 먼저 달려가 안고,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신을 신겼습니다. 잘못보다 더 깊은 사랑으로 아들을 다시 세운 것입니다. 닭이 울던 새벽,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 부인하고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한 베드로는 평생 얼굴 들기 어려운 수치심을 안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세 번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수치심의 자리를 사랑의 자리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끄러움을 들추어 망신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부끄러움 위에 금빛 새 살이 돋게 하시는 분입니다.

흠집 없는 완벽함을 강요받는 시대입니다. 성적이 낮으면 뒤처진 사람, 집이 작으면 실패한 사람, 외모가 평범하면 매력 없는 사람으로 분류당하며, 사람의 존재가 숫자와 비교와 평판의 저울 위에 올려져 머리마다 수치심의 화인이 찍힙니다. 그러나 잔인한 핍박자였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뼈아픈 죄책감을 세상을 치유하는 도구로 뒤집어 사용했습니다. 매국노라 손가락질받던 삭개오도, 철저히 고립되었던 혈루증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 수치심의 늪에서 탈출하여 당당히 세상 속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흰 천은 얼룩 한 점의 노예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정죄의 목소리에 더는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옛 죄를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기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26.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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