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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편지] 흐르는 물에는 서운함이 고이지 않습니다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26.06.19|조회수1 목록 댓글 0

[열린편지] 흐르는 물에는 서운함이 고이지 않습니다

어느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길을 걷다, 사람들이 던진 돌과 발에 걸린 돌들을 버리지 않고 배낭에 주워 담았습니다. 처음에는 견딜 만했지만 배낭은 점점 무거워졌고, 마침내 그는 단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나가던 이가 왜 그 무거운 돌을 지고 가느냐 묻자 그가 답했습니다. "나를 아프게 한 돌들이라, 잊지 않으려고요."

우리 마음에도 이 나그네의 돌멩이 같은 감정이 있습니다. 바로 '서운함'입니다. 서운함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사소하고 일상적인 순간에 찾아옵니다. 먼저 건넨 인사를 상대가 무심히 지나칠 때, 정성을 다한 배려가 어느새 당연한 권리처럼 여겨질 때, 기대했던 것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반응이 돌아올 때, 우리는 마음 한구석에 차가운 돌멩이 하나를 담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만큼은 해 주겠지." "말하지 않아도 이 정도는 알아주겠지." 상대의 서명도 없는 계약서를 홀로 붙들고 서운함의 늪에 빠지는 것입니다. 서운함은 사랑이 없어서 생기는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을 내가 정한 방식으로만 받으려 할 때 생기는 감정입니다. 기대가 마음을 잠그면, 사랑도 문 앞에서 돌아섭니다.

서운함의 뿌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깊은 곳에는 늘 '기대'가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은 기대가 서운함의 출발점입니다. "내가 이만큼 마음을 주었으니 저 사람도 알아주겠지." 이 은밀한 보상 심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서운함이 싹틉니다. 우리는 길에서 스친 낯선 이에게는 서운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이에게만 서운합니다. 그러므로 서운함은 미움의 증거가 아니라 친밀함의 증거입니다. 마음 깊이 기대고 있었다는 흔적인 셈입니다. 그 밑바닥에는 응답받고 싶은 갈망, 나를 향해 한 번만 돌아봐 달라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운함이 유독 깊은 사람은, 실은 그만큼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이 감정이 마음에 머물며 몸집을 불려 간다는 데 있습니다. 받지 못한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반복해 재생할수록 감정의 골은 깊어집니다. 곱씹을수록 상대는 점점 더 야속한 사람이 되고, 작은 서운함은 어느새 단단한 분노로, 끝내 관계의 단절로 자라납니다. 나를 섭섭하게 한 사람을 벌주려는 마음으로 그 돌을 품지만, 정작 무거운 배낭을 지고 옴짝달싹 못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입니다. 스스로 서운함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빠져나오는 길이 없지는 않습니다. 입 밖에 내지 못한 기대는 결코 상대에게 닿지 않으니, 침묵 대신 "나는 네가 이렇게 해 주길 바랐어" 하고 마음을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너는 왜 늘 그러냐"는 비난 대신 "나는 그때 서운했다"고 내 감정을 건네는 것입니다. 받지 못한 것에만 머물지 않고, 어쩌면 그가 무심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고, 그의 형편을 다시 헤아려 보는 것입니다. 같은 일도 해석을 바꾸면 감정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그러나 사람의 노력만으로 다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더 깊은 자리로 시선을 옮겨야 합니다. 성경에서 요셉만큼 서운할 이유가 충분했던 사람도 드뭅니다. 믿었던 형제들에게 팔려 노예가 되었고, 타국에서 성실히 일했으나 억울한 누명까지 썼습니다. 그 돌멩이를 다 끌어안았다면 그의 인생은 분노와 복수심으로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시선은 사람의 악함이 아니라 자신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가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훗날의 고백은, 서운함의 노예에서 풀려난 자유인의 선언입니다. 자식 없는 설움에 멸시받던 한나가 그 서러움을 사람을 향한 원망이 아니라 성전의 기도로 쏟아 냈을 때(삼상 1장), 그 자리에서 서운함이 마침내 감사로 돌아선 것도 같은 길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가장 큰 서운함을 당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치셨으나 돌아와 감사한 이는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삼 년을 함께한 제자가 그분을 팔았고, 곁을 지키겠다던 베드로는 모른다 했으며, 겟세마네의 절박한 밤에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고,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서운함을 반추하며 원망으로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주님의 시선은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신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서운함의 굴레에서 풀려납니다. 서운함은 잠시 머물다 가는 마음의 손님입니다. 문은 열어 두되, 안방을 내주어 주인 행세를 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붙들어 두면 미움이 되고 원망이 되지만, 가벼이 흘려보내면 그 자리에 주님의 너그러움이 깃듭니다. 가슴을 짓누르던 차가운 돌멩이들을 은혜의 강물에 미련 없이 던질 때, 고였던 마음은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흐르는 샘물에는 서운함이 고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편 62:5).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26.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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