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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공부

[스크랩] 입문반 1편 3장 불교 발전사 3. 부파불교 시대

작성자법수|작성시간12.04.05|조회수19 목록 댓글 0

3. 부파불교 시대

 

그 당시 인도에서는 부처님의 법문이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다. 부처님께서 계실 때에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나서부터 큰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 이후 ‘발라다섭자’의 제자가 여러 대중 가운데서 “이젠 잔소리꾼 부처님이 열반했으니 자유롭게 수도하며 편하게 살 수 있다.”라고 기뻐 날뛰자 이를 지켜보던 마하가섭존자는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유법산멸(遺法散滅 : 부처님으로부터 물러 받은 법이 소멸되는 것)’을 우려하여 경전 결집을 서두르게 되었다.

부처님께서 열반한 다음 해 하안거(夏安居 : 여름 장마철 동안 한 곳에서 모여 수행하는 것) 동안에 마가다의 수도인 왕사성(王舍城)의 칠엽굴(七葉屈)에서 5백의 비구들이 모여 경전을 편찬하였는데, 그것을 제 1결집이라 한다.

제 1경전결집(경전 편찬 작업)을 할 때에 ‘마하가섭존자’의 주재 아래(총책임자) 제 1결집을 하였다.

다문제일 아난존자(多聞第一 阿難尊者)는 제 1경전결집 작업을 할 때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의 경을 제일 많이 기억하였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을 입으로 독송하고 다른 비구들이 확인하는 작업을 통해 경전의 결집을 시작했으며,

지계제일 우바리존자(持戒第一 優婆離尊者)는 부처님 당시 계율을 제일로 잘 지켰으므로,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을 입으로 독송하고 다른 비구들이 확인하는 작업을 통해 경전의 결집을 시작했다.

이때 암송하는 사람이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 여시아문=如是我聞…….>하고 운문으로 구송(입으로 외우는)을 했으며 이것이 모든 경전의 일정한 형식이 된 것이다. 부처님께 직접들은 가르침이기에 구송되는 이 슈트라는 석존이 안 계신 그 당시 교단의 유일한 의지처 였다.

모든 경전의 첫 머리에 여섯 가지의 필수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다. 이것을 육성취(六成就)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다.

 

(1). 부처님의 가르침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신성취(信成就) : 여시(如是)

(2). 내가 직접 들었다는 문(聞) 성취 : 아문(我聞)

(3). 설법의 때를 명시하는 시(時) 성취 : 시(時)

(4). 설법을 한 것이 부처님 이였다는 주(主) 성취 :

불(佛)

(5). 설법한 장소를 밝히는 처(處) 성취 :

재사위국(在舍衛國)

(6). 어떤 사람(대중)이 들었는가를 밝히는 중(衆) 성취 :

여대비구(與大比丘)......

 

의 여섯 가지 이다. 그래서 모든 경전이 [여시 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 여대비구 = 如是 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 與大比丘....] 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결집된 경과 율이 운문으로 구송되었으나 얼마가지 않아서 5백의 비구들을 거느린 ‘부라나라’라는 비구가 제 1결집을 승인할 수 없다고 선언하자 논쟁이 끊이지 않다가 석존 열반 후 100년 뒤에 마침내 젊은 비구들이 중심이 되어 해석을 주장하게 되자 두 번째 결집을 하게 된다.

제 1결집으로부터 백년쯤 지났을 무렵 10개항의 계율에 대해 종래의 계율을 고수하려는 장로들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의 ‘상좌부’와 개혁을 하려는 젊은 비구들 진보파인 ‘대중부’로 갈라서게 되는데 그 이유는 10개항의 계율에 대한 서로의 견해가 어긋났기 때문이었다.

보수파(상좌부), 진보파(대중부)가 서로 갈라서게 된 계기는 이른바 십사(十事 : 열 가지 계율 문제)를 ‘정법(正法)’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도 있었고 수행의 완성 자로서 아라한의 성격에 관한 오사(五事)의 해석이 서로 틀린 것이 주된 이유였다고 한다.

진보적 성향의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이 제기한 사건 중에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염사정(鹽事淨), 그 전날 받은 소금을 저축해 두었다가 다음날 식사 때 쓸 수 있다.

(2). 이지적(二指淨), 하루에 한때 먹은 뒤에 그늘이 손가락 둘 사이에 지나게 될 때까지는 먹을 수 있다.

(3). 수희정(隨喜淨), 밥 먹은 뒤에 또 먹을 수 있다.

(4). 도행정(道行淨), 수행 도량을 떠나서는 먹은 뒤에도 다시 먹을 수 있다.

(5). 락장정(酪漿淨), 꿀, 설탕 등을 우유에 타서 밥 때가 아닌 때에도 먹을 수 있다.

(6). 치병정(治病淨), 치료할 때에는 아직 술이 덜된 상태의 도루가주(闍樓伽酒 : 채 술이 되기 전에 것)등을 마실 수 있다.

(7). 좌구정(坐具淨), 몸이 크고 작음에 따라 좌구(방석)의 크기도 달라야 한다.

(8). 구사정(舊事淨), 먼저 사람이 하던 일을 따르는 것은 율(律)에 어기는 바가 있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

(9). 고성정(高聲淨), 따로 갈마법(羯磨法 : 수계나 참회 때의 의식)을 비법(秘法)으로 행하고 나중에 억지로 다른 이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10). 금은정(金銀淨). 금, 은, 돈 등의 보시를 받아도 된다, 는 것.

 

위의 열 가지를 십사(十事 : 열 가지 계율)이라 한다.

위에서 보듯이, 계율을 액면 그대로 보려는 보수적인 비구와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비구들 사이에 대립이 생겼다.

맨 처음 이런 대립 속에서의 분열을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 한다.

드디어 뱃사리(비사리=毘舍離)에 7백 명의 비구가 모여 이를 토의한 결과……. 제 2결집 또는 7백 결집이라고도 한다. 이때 야사(耶舍)가 주임이 되어 칠 백인이 모여 율장을 결집 하였다. 그러자 장로들은 비법(非法 : 법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벳사리에 있던 진보적 교단에서는 그 결론에 불복하여 따로 1만의 비구와 신도들이 모여 전통을 고수하려는 장로파 즉 상좌부를 보수적, 교조적(敎條的)이라고 비판하고 따로 대중부를 결성하였다. 이로써 교단은 마침내 상좌부와 대중부의 두 파로 분열되어 부파불교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후로도 제 3결집은 부처님의 열반 후 200년 경 ‘아쇼카’왕 아래서 수도인 파타리푸트라(화씨성=華氏城)에서, 모가리푸타. 티샤,가 주임이 되어, 천명의 비구가 모여서, 경, 율, 논장 전부를 결집했다고 한다. 제 1회와 제 2회의 결집한 것은 북방, 남방의 양 불교에서 전해지지만, 제 3회 결집은 남방불교에서만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제 4결집은 2세기경 ‘카니슈카’왕 아래, ‘파르슈바’ 바수미트라(세우=世友)가 중심이 되어 카슈미르국의 비구 오백 인이 모여, 삼장(경, 율, 논)에 해석을 붙였고, 그것이 “대비바사론”이 되었다고 하지만, 남방의 불교도는 이것을 믿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상좌부(소승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형성(자기부터 성불을 목적)에 전념하는 쪽에 중점을 둔데 반해서 대중부(대승불교)는 대중(중생)구제에 중점을 둔다는 데서 근본적인 견해 차이를 보인 것이다.

대중부는 자신들을 스스로 대승불교(大乘佛敎)라 하고 상좌부를 소승불교라고 주장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근본분열에서는 상좌부와 대중부가 대립되었다. 상좌부, 대중부는 다시 각각 10개, 8개의 부파로 갈라져서 전체 20부파가 되었으니 이를 지말분열(枝末分裂)이라 한다.

이러한 부파불교 시대에는 각각 자기 부파의 세력 존립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부파불교시대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부처님 : 부처님은 과거에도 출현하였고 또는 먼 장래에 출현할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는 오직 석가모니 한 분뿐이며, 유례가 없는 위대한 인물이긴 하지만 결코 신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으로서는 부처가 될 수 없다.

(2). 불교는 본래 “자리이타(自利利他 : 스스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구제하여 이로움을 주는 것.)”, “자각각타(自覺覺他 : 자신이 먼저 깨닫고,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는 것)”가 근본정신이었으나 이 시대에는 자리, 자각에 치우쳐 있다.

(3). 출가위주였다. 따라서 재가불자의 신앙 활동에는 비교적 무관심했다.

(4). 석가모니 부처님은 수행 실천에 실리(實利 : 실제로 얻은 이익)가 없는 실체론(實體論 : 존재론, 형상과 작용의 배후에 실체가 없다는 이론)등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를 금했으나 이 시대에는 오히려 실천보다는 이런 논의를 활발히 참구(參究 : 진리를 연구) 했다.

(5).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율은 꼭 지킨다는 보수적인 형식주의였다. 그래서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 하지 않았다.

이 시대를 소승(小乘)불교 시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학자들은 대승(大乘)불교가 일어난 이후에 아직도 소아적(小我的) 생각에 젖어 있던 사람들을 전 시대의 사람들과 함께 소승인(小乘人) 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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