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포사(造泡寺)가 된 선석사
조포사라는 말은 왕실에서는 왕릉과 마찬가지로 태실도 위패를 모셔두고 불력으로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며 제례를 준비하기 위해 이른바 원당사찰을 두는데 유교가 통치이념인 조선왕조는 이를
“두부를 만드는 절”이란 의미로 사찰을 격하하여 조포사라 불렀다는 것이다.
세종대왕 왕자태실의 수호사찰이기도 한 선석사는 세종대왕의 왕자태실이 있는 태봉에서 약 200m
밑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절은 처음 신광사라 하여 신라때 의상대사가 692년 전국에 10개의 절을
지을 때에 지은 것으로 그때는 지금의 자리가 아닌 서쪽편에 자리잡았다. 고려 말엽 나옹대사가
1361년 신광사의 주지가 돼 절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나옹대사가 새로 절터를 잡고 터를 닦는데
큰 바위가 나왔다하여 절이름을 선석사라 고쳤다. 지금도 대웅전 앞뜰에 묻힌 채 그 머리 부분만
땅위로 내밀고 있다
造泡寺가 된 선석사
왕릉 원당사찰로는 세종의 원찰 여주 신륵사, 세조의 원찰 광릉 봉선사가 있고, 태실 원찰로는
인종의 태실 원찰인 영천 은해사, 세종대왕 왕자태실 원찰인 성주 선석사 등이 조포사 사찰이다
성주는 세종대왕 자태실이 설치되면서 성주목으로 승격되었고, 선석사는 태실 원찰로 조포사가 되어
후일 영조로부터 어필을 하사받기도 했는데 선석사 주지스님의 말에 의하면 태실의 제례는 대한제국
이전에 중단되었다고 한다
현대인의 아기 태를 봉안하는 시설이 있으며, 태 봉안인의 무병/장수를 기도하는 곳
법수사지(法水寺址)
법수사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법수해인사 란 문구를 근거로 신라 애장왕(802)에 창건 되었다고
추정하며 법수사는 당초 절 이름을 금당사라고 하여 성주군 수륜면 백운동
중기마을과 그 주변 일대를 차지하여 지은 신라의 거찰로 가야산을 중심으로한 성주지방
불교의 진원지로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작은왕자 범공이 중이되어 금당사에
머물렀다고 하며 고려중엽에 절 이름을 법수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임진왜란을 겪고 조선조
중엽에 폐사가 된 절로 절터 중앙에 그 뒤 마을이 생겨 중기라 불리어졌다
법수사지 삼층석탑 보물 제1656호
법수사지삼층석탑은 규모가 작아지고 하층기단이 높고, 안상이 음각된 점 등의 9세기 후반기 특징을
보이고 있으나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5단인 점 등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사찰의
창건시기인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의 전성기에는 9금당, 8종각 등 무려 천 칸이나 되는 사찰이었다고 기록 되어 있으며
지금 곳곳에 석탑.당간지주.주춧돌 등이 산재 되어 있다.법수사에 딸린 암자만도 100 개가 넘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백운동 곳곳에 암자터를 발견할수 있는데 사역 규모가 합천 해인사를 능가하는
대규모 사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절 뒤편의 미륵당에 있던 불상은 1967년에 경북대학교로 옮겨졌다
기록에 의하면 해인사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는 비로자나불상이 원래 법수사 주존불 이었는데
조선 중엽에 절이 폐사 되면서 당시 부속암자였던 용기사로 모셔졌다가 지금의 해인사 대적광전에
모셨다고 전한다
법수사지 당간지주(유형문화재 제87호)
기단은 확인을 할 수 없으며 간대석이 지주 사이에 있다.간대석은 사각형의 대석 윗부분에 이중으로
원을 올려 새기고 가운데에 깊게 원공을 팠다.원공이 깊어 지주에 따로 간공을 만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간지주 안쪽에 있는 배례석
당간지주의 바로 뒷편에 연화문이 새겨진 석물이 놓여 있는데
당간지주와는 관계가 없는 석등 앞의 배례석으로 보인다
답사 일시 : 000년 11월 15일 08:00
. 답사지: 성주군 한계마을 ㅡ 세종대왕자 태실 ㅡ신석사 ,ㅡ 법수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