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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독일에서 열린 <세계건축박람회>에 소개된 ㅡ경주 독락당

작성자고구려|작성시간26.06.14|조회수17 목록 댓글 0

사진 촬영(봄/여름/가을)

조선의 성리학은 크게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나뉜다

 

영남학파는 경상도를 중심으로 "주리론"을 강조했으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회재와 퇴계의 앞 글자를 따서 회퇴학파라 불릴 정도로 퇴계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반면 기호학파는 수도권과 호남을 중심으로 "주기론"을 주장했으며 고봉 기대승과 울곡 이이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주리론을 쉽게 표현하면 합리론 주기론은 경험론으로 비유한다

잠계 이전인 기적비

 

'무(無) 잠계(이전인의 호)면 무(無) 회재'

 

잠계가 없으면 회재가 없었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전인의 일생은 오직 아버지의 봉양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회재의 서자로 태어난 잠계 이전인은 부친이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도 강계로

 

유배갈  때 따라가서 회재의 유배 생활 7년 내내 그의 곁을 지켰다.

 

이뿐만 아니라 회재가 죽자 엄동설한에 평안도 강계에서 경주까지 3개월 동안 시신을 대나무 상여에

 

싣고 와 고향 땅에 묻었다.현재 옥산서원 창고에는 460여 년 된 대나무가 보관돼 있다. 썩어서 색깔이

 

검게 변한 이 대나무는 잠계가 아버지의 시신을 운구할 때 썼던 지극한 효성의 흔적이다

독락당 보물 413호

 

잠계는 탈상 뒤에는 강계에 남겨진 회재의 유고와 책들을 수습해 아들 이준과

 

함께 정리했다. 이후 퇴계 이황을 찾아가 유고 교정과 행장 집필을 간곡히 부탁했다.  

잠계의 효성에 감명한 퇴계는 결국 회재의 행장을 썼으며 행장 말미에 "잠계 부자(父子)가 회재의 저술들을

 

보여준 덕분에 그의 깊은 학문 세계를 깨닫게 됐다"고 적었다 회재의 신원 회복과 문묘 배향은 퇴계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훗날 회재 이언적이 영의정에 추증되고 명종 때 문묘에 배향되고 동방오현에 이르게 했다.

 

퇴계 이황이 잠계공은 모습과 언행이 부친과 흡사하고 출중하다고 평하며 ‘잠계’라는 호를 지어

 

주었으며  이전인은 ‘잠계집(潛溪集)’을 남겼고 사후 통훈대부 예빈시정에 추증되었으며

 

지금까지 장산서원에서  향사를 지내고 있다

독락당 보물 413호

 

을대문을 지나는데 양쪽의 공간은 가마를 보관해 두는 장소라고 합니다.

 

대문 앞에 네모진 돌은 말에서 내릴 때 사용하는 하마대입니다

회재 이언적은 지금의 여주인 여강 이씨로  본래 이름이 나아갈 적(迪) "이적"이었으나

 

  중종이 ㅡ 선비언(彦)자 하나 더 붙여. 선비의 길로 나아가라고 "이언적"이라고 지어주었다

 

그러나 중종(1532년)에 김안로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파직되고 낙향하여 

 

본부인이 있는  양동마을에 가지않고 왜 독락당에 은거했을까?

대쪽같은 그의 성격에 차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도 있겠지만  

 

그곳에는  경주 교관시절 결혼한  석씨부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동 본부인에게 자식이 없어 양자를 두었으나

 

석씨부인에게서 아들 이전인이 태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회재를 이야기할 때 양동파와 옥산파를

 

구분해서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석씨 부인이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온 돈으로 

 

독락당을 지어  학문에 몰두하면서 중종의 부름이 없자 칩거생활에  들어간다

독락당

독락당

독락당(보물 제413호)

독락당 현판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  글씨이고

 

옥산정사 현판은 이황 선생의 친필이다

 

독락당(獨樂堂)은 송나라 주희(주자)의 무이 구곡을 본땄다

회재 이언적은 화담 서경덕과 한국적 성리학의 토대를 만든 대표적 학자이다

 

회재는 중종 때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성리학의 정통으로 밝힘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호를 '회재'라 한 것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회(晦)'자를 취함으로써 주희의 학문을 따랐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회재의 성리학은 그 후 퇴계에게 이어진다 그 결과 영남 사림들의 성리학 형성에

 

선구적이고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당대의 사대부 집들은 사랑채라면 주인의 위엄을 한껏 과시하기 위해 높고 화려하게 꾸미기 마련인데,

 

독락당은 크지 않은 규모에 땅에 납작 엎드렸다 싶을 정도로 건물의 높이도 낮다

담장이 외부와 차단을 위한 도구라면 살창은 외부와 경계인 동시에 접촉점이다.

 

살창은 계류 등 외부 풍경과 소리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나가는 출입문 역할을 한다.

 

 계곡에 흐르는 물과 자계계곡의 경치를 독락당에 앉아 바라볼수 있게 만든 담장의 살창은 

   회재선생의  유일한 사유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해동명적(보물 제526호)

 

해동명적은 조선 중종 때 문신이며 서예가인 신공제가  우리나라 역대 명필가의 글씨를 수집한 책으로

 

법첩이라고도 하는데  명필의 글씨를 돌이나 나무에 새겨 만든 서첩을 말한다 . 1515년경에 『해동명적』

 

목판본이 간행되었고 1530년에는 목판본을 돌에 새겨  석판본으로도 간행되었다

 

상권에는 조선시대 문종과 성종의 어필을  앞에 따로 놓고 다음에 신라시대 최치원,  김생, 영업의 3인과

 

고려시대 탄연, 이암,  신덕린 등의 3인을 합한 6인의 글씨를  모아 놓았다.

 

하권에는 이강, 승려 혜근, 성석린, 박초, 권근, 이첨, 정도전, 정총, 민자복, 신색 등 12인의

 

글씨가 실려 있다고 한다

양진암(養眞庵)

 

퇴계 이황의 글씨이다

계정

 

2013년 독일에서 열린 <세계건축박람회>에 소개되어 

 

이를 본 수많은 외국인이 감탄한 <계정>

 '계정(溪亭)ㅡ한석봉의 글씨다

 

산골짜기 시냇물에 올라앉은 도 닦는 정자

계정 마루에 앉아  

 

.바람소리 물 흐르는소리  

 

풀벌레 소리가 귓전에 가득찰때

가만히 마음을 내려 놓고  앉아 있노라면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 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

라는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절로 떠오르게 합니다

 

인지헌(仁智軒)

 

한석봉의 글씨다

 

 인지헌의 인()과 지()는 회재선생의 구인(求仁)

 

논어의 인자요산(仁者樂山지자요수(智者樂水)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물흐르는 소리에 마음을 씻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으며 홀로 즐긴다는 독락당


계정의 반은 집 안쪽에 반은 계곡 쪽에 걸쳐 있는 것처럼 지어졌는데


아름다운 계곡의 풍광을 끌어안기 위해

한발 앞으로 다가선 계정은 마치 허공중에 떠있는 정자와 같고

낮은 돌담길이 정답게 이어지는 고샅길은 찿는이의 마음을   여유롭게 해줍니다

ㅡ 청산가 ㅡ

 

 자옥산 깊은 곳에 초려 한간 지어두고

 

  반간은 청풍주고  반간은 명월 주니

 

청산은 드릴 데 없어 둘러 두고 보리라

 

                                                   회재가 지은 원문

이 마을은 회재 선생이 독락당에 기거하면서 주변 경관이 뛰어나 주변의 산과 경치 좋은 곳을  이름을 붙였는데,

 

. 마을을 둘러싼 산에 이름을 붙여 사산오대(四山五臺)라 부른다

 

동쪽 ㅡ화개산

 

서쪽 ㅡ자옥산

 

남쪽 ㅡ무학산

 

 북쪽 ㅡ도덕산

계정의 정자에 앉아서

 

물고기 노는 것을 보면서 관조하는 관어대(觀魚臺)

 

돌아감을 노래하는 영귀대(詠歸臺)

 

갓끈을 씻는다는 의미의 탁영대(濯纓臺)

 

마음을 맑게 하는 징심대(澄心臺)

 

마음을 깨끗이 하는 세심대(洗心臺)

 

. 계정에서 볼 수 있는 계곡의 바위 다섯을 골라 오대(五臺)라고 이름 붙였다.

 

건너편 산기슭이 영귀대이며, 연못이 있었고 주위에 대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때 담장은 각 영역에 사는 식솔들의 위계를 나타내고

 

각자의 사생활을 보호해 주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계정을 받치고 있는 바위 (관어대)

 

독락당이라면 누구라도 개울과 "계정"의 절묘한 배치에 감탄하는 곳이다. .

계정 바로 밑은 관어대이고 개울 건너 쪽은 영귀대라는 야트막한 언덕이다.

 

옛날에는  이 언덕이 이곳 경치의 중심 되던 대(臺)였다. 이곳에서 서쪽으로는 개울과

 

 그림 같은 "계정"이 있고, 동쪽으로는 아름다운 "연당"이 있고  북쪽으로는 작은 폭포와 너럭바위

 

"징심대"가 있고, 바로 아래에는 조기(釣磯)라는 예쁜 낚시터가 있다. .

1613년경 이 영귀대를 찾은 노계 박인로는 이곳 경치에 취하여 일어설 줄 몰랐다

옥산 세심(洗心)마을의 명칭은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이 도(道)의 근본인 마음 닦음을 자연에서 저절로

 

느끼고 배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산오대(四山五臺)중 하나인 세심대(洗心臺)에서 따왔다고 한다

 계정은 회재의 아버지 "이번"이 지어놓았던 것을 수리했다

바람이 산을 열고

물소리가 귀를 열어

봄의 경전을 듣고있다

스승이 혼자일때

산도 물도 저혼자이다가

스승이 떠나면  산도 물도 떠나는것

그 빈자리에

세월이 부끄럽지 않은

철쭉 한철이 찿아와서

봄볕에 한눈을 팔고있다 

                                <회재선생이 세상을 떠난 70년후에  당대시인 박인로가 쓴 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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