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덕사지 가람배치도
망덕사지(사적 제7호)
삼국유사<문호왕법민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문무왕 19년)에 당나라가 침입을 하자 사천왕사를 짓고
문두루비법으로 그들을 물리치게 되었다.나·당 전쟁이 평화조약으로 끝맺음할 즈음,당은 마지막 협상조건을
내걸었다. 그것이 바로 사천왕사에 대한 사찰이었다. 당은 사천왕사가 나당전쟁 기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이 소문이 당나라로 전해지자 당나라는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악붕귀라는 사신을
파견하는데 그 때 신라에서는 급히 망덕사를 짓고 그들에게 보이자 악붕귀가 "이곳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다."라고 하며 끝내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신라에서 황금 1천냥을 주었더니
당나라로 돌아가서 "신라에서는 천왕사를 창건하고 황수(皇壽)를 빌고 있었다."라고 보고하였다고 한다.
즉 일통삼한(一通三韓) 전쟁에서 신라의 배신을 의심해 당나라 황제가 파견한 예부시랑 악붕귀를 속이기 위해
신라가 신문왕 4년(684)에 건립한 사찰인 것이다. 망덕사란 명칭도 악붕귀가 말한 망덕요산(望德遙山)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당간지주(보물 69호)
망덕사지에는 동서쪽에 목탑지가 남아 있으며 그 북쪽으로 금당지가 자리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형식을 보여주고 있다.즉 금당지를 중심으로 앞쪽 좌우측에 목탑지가 있고
그 남쪽으로 중문지가 있다. 그리고 금당지의 북쪽으로 강당지가 있으며 이들을 둘러싸는 회랑지가 있다.
금당의 좌우에도 회랑, 즉 익랑지가 있으며 중문지의 남쪽에 계단터가 있고 그 서쪽에는 당간지주가 있다
통일신라시대 대표적인 쌍탑식 가람 중 하나인 망덕사의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으나
신문왕 684년에 완성되었다고 하나 이와 달리 문무왕 때 창건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969년과 1970년 2차에 걸쳐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는 1969년에 목탑지를 조사하였고, 1970년에는 금당지·동회랑지·북회랑지가 조사되었다.
발굴조사에서는 정병을 비롯한 10여 점의 고려시대 불교 공양구 청동정병 1점과 식기류로 추정되는 청동용기
5점, 발과 대좌(臺座)만 남은 불상대좌 1점 등이 포함돼 있다 수습되었다.이 유물들이 망덕사지 '퇴장 유구'(退藏遺
構) 즉, 전란 등과 같은 비상사태 때 중요한 물건을 묻어두는 구덩이에서 출토되었다
망덕사는 신문왕대 창건된 후 그 낙성식을 효소왕(692)에 가졌다.
효소왕은 망덕사 낙성재를 올릴 때 말석에 앉았던 남루한 차림의 중을 보고 여러 사람에게
국왕이 올리는 재에 참석했단 말을 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더니 '폐하께서는 진신석가를 공양했다는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했던 남루한 차림의 중은 진신석가로 몸을 바꾸어 남산 비파암 곁에 있는
바위 속으로 숨어버렸다는 이야기는 부처는 필요할 때 서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특이한 설명을 해 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망덕사지에는 13층의 목탑이 쌍탑으로 존재하였다고 한다.
경적왕 755년에는 탑이 흔들렸는데 마침 중국에서는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으므로 당나라를 위해
지은 절이라서 그러할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 또 이 절의 승려인 선율이 6백부의 《반야경》을 베껴 쓰다가
미처 마치지 못하고 죽었는데 명부에 가서 경을 베끼는 작업을 마치기를 원한다고 하여 죽은 뒤 10일이 지난
다음 다시 살아났다는설화도 있다. 그 뒤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으며 폐사의 시기도 분명하지 않다
현재 절터에는 동·서 목탑터와 그 북쪽으로 금당터와 강당터, 남쪽으로 중문터, 그리고 이를 둘러싼
회랑터가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전형의 쌍탑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이밖에 중문터 남쪽에 계단터가
잘 남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당간지주가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 이 절은 황룡사, 사천왕사, 황복사와 함께 경주의 중요한 사찰이었던 곳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동탑지
삼국유사에 망덕사지에는 두 기의 목탑이 있었는데 13층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동탑지의 심초석
발굴조사 결과 목탑의 사방 기단을 구성하는 장대석렬과 계단지가 확인되었다.
심초석 중앙에 위치한 사리공의 형태는 이중으로 된 사각형으로 사리공 내 1단 부분은 사리공을 덮었던
뚜껑이 놓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탑지.
서탑지
서탑지의 심초석
이곳에는 두개의 목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서탑의 중심 초석이다.
서탑지는 경작 등에 의해서 기단의 대부분이 유실되어 현재 심초석만 1매 확인된다.
. 사천왕사지 심초석이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는 것에 비하여 망덕사지는 심초석 자체를 팔각으로
만들어져 있어 다른 목탑지의 심초석과는 다른 점이 있다
절터에는 건물터와 초석이 남아 있다.
<중문지 밖의 계단지<자료사진>
중문지 밖에는 계단의 흔적이 있다 발굴이 되지 않아 명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윗부분을 장식한
팔각석주와 소맷돌로 추적되는 삼각형의 석조물들이 흩어져 있다
장사 벌지지
이 비석은 1992년 석굴암연구회에서 건립하였다 박제상은 [삼국사기]에 신라의 충신으로 이름은
모말(毛末)이라고도 하였으며,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파사이사금의 5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거문고의 달인 백결 선생은 바로 박제상의 아들이다 399년 광개토대왕이 신라 대신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을 물리쳐준 대가로 신라는 50여년간 고구려의 간섭을 받게 됐다.일찍이 내물왕이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던 일이 있는데 402년 내물왕이 죽자 내물왕의 아들이 아직 어려서 고구려는 친고구려파 실성을
왕으로 옹립한다 신라 17대 내물황에게는 눌지, 미사흔, 복호 3형제가 있었다 18대 실성왕은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갔던 그 원한으로 왕이 되자 내물왕의 아들인 미사흔을 402년
왜(倭)의 인질로 보냈고,412년에 내물왕의 다른 아들인 복호를 고구려의 인질로 보냈다
그 후 417년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가 정변(쿠데타)를 일으켜 실성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제19대 눌지왕인데, 왕은 항상 동생들을 그리워하여 그들을 귀국시킬 방책을 구하였다
재상이 벼슬길에 나아가 삽량주간(삽량주의 지배자, 경남 양산시)으로 있을 때 눌지왕은 왜국과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는 동생 미사흔과 복호를 신라로 데려오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에 신하들이 사신의 임무를 수행할 적임자로 박제상을 추천하자, 그는 먼저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장수왕을 설득하여 마침내 418년 복호를 구출하여 함께 귀국한다. 이에 왕이
기뻐하면서 “다른 동생 미사흔도 데려와 달라고 박제상에게 부탁하자 박제상은 죽기를 맹세하고
처자도 찾아보지 않은 채 율포에서 배를 타고 다시 왜로 향한다 제상의 부인이 이 말을 듣고
율포로 한달음에 달려갔으나 멀리서 떠나는 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상의 부인은 망덕사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 모래사장에서 주저 않아 통곡하고 말았다.
친척 두 사람이 그녀를 부축하여 집으로 데려 가려 하였으나 몸이 늘어져 일어나지 못했기에
두다리가 '벋디디'게 되었고 이후 이곳 지명을 벌지지(伐知旨)라 하였으며
이로부터 이곳 모래사장을 장사(長沙)라 부르게 되었다
왜국에 도착한 박제상은 거짓으로 왜왕을 속여 두터운 신임을 얻어내고 미사흔을 무사히 탈출시키고
자신은 왜국에 남게 되었다. 미사흔왕자를 탈출시킨 것에 격분한 왜왕은 박제상을 가두고 문초를
했지만 그에게 왜국의 신하로 살면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는 회유를 했다.
그러나 박제상은 나는 죽어서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살아서 왜국의 신하가 되고 싶지는 않다"
왜왕은 그의 충절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는 목도라는 섬으로 보내어 그를 불에 태워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