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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東坡 人間到處有靑山

작성자류희관|작성시간19.10.25|조회수1,126 목록 댓글 0

人間到處有靑山(人生到處有靑山ㆍ세상 곳곳이 청산이다)’



 중국 북송시대의 시인인 소동파의 시구(詩句)를 인용한 

  * 사람 살 곳은 골골마다 있다. 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도와주는 사람이 어디나 있다는 말. 인간이 뼈를 묻을 곳은 이 세상 어디나 있다.



인간도처유청산 人間到處有靑山(인간이 가는곳마다 푸른 산이 있고) 남아도처유미인 男兒到處有美人(남아가 가는곳마다 아름다운 미녀가...<사람은 어디서 죽든 뼈를 묻을 청산이 있다>



소동파 (蘇東坡, Ssu Tungp'o)

소식(소동파) (蘇軾(蘇東坡))


비애를 극복한 낙천적이며 이지적인 시의 세계로 송시(宋詩)의 작풍을 확립한 시인이다. 시 약 2,400수, 사(詞) 300수가 현존한다.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3소'(三蘇)라고 일컬어지며, 이들은 모두 당송8대가에 속한다. 소동파는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로 황주로 유형되었는데, 이 때 농사 짓던 땅을 동쪽 언덕이라는 뜻의 '동파'로 이름짓고 스스로 호를 삼았다.
소동파는 구양수·매요신 등에 의해서 기틀이 마련된 송시를 더욱 발전시켰다. 구양수·매요신 이전의 시가 대개 비애를 주제로 해왔던 데 비해서 이 두 사람은 평안하고 고요한 심정을 주로 읊었고, 동파는 이에서 벗어나 훨씬 적극적·자각적인 관점을 취했다. 동파는 작가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와야만 훌륭한 문장이 된다는 청년기의 생각을 평생토록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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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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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소식(蘇軾), 자는 자첨(子瞻). 동파는 그의 호로 동파거사(東坡居士)에서 따온 별칭이다.

아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3소'(三蘇)라고 일컬어지며, 이들은 모두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소순, 소철

소동파는 북송 인종(仁宗) 때 메이산[眉山:지금의 쓰촨 성(四川省)에 있음]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메이산의 도인(道人)이라 불리던 장역간(張易簡)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도가(道家), 특히 장자(莊子)의 제물철학(齊物哲學)을 접하게 되었다. 1056년 그의 아버지 소순은 두 형제를 데리고 상경하여 이들의 시를 구양수(歐陽修)에게 보여주고 격찬을 받았다. 이들 형제는 그해 가을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듬해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나란히 급제했지만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1060년 복상(服喪)을 마치고 수도인 카이펑[開封]으로 돌아온 소동파는 관리임용 특별시험인 제과(制科)에 동생과 함께 급제했다. 이어 봉상부(鳳翔府:지금의 산시 성[陝西省]에 있음)의 첨서판관(簽書判官)이 되어 수도에 남게 된 동생과 헤어져 임지로 떠났다. 봉상부는 서주(西周) 이래의 여러 문화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는 공자묘의 석고(石鼓:고대문자를 새긴 10개의 북 모양의 돌)와 카이위안 사[開元寺] 동탑(東塔)에 남아 있는 당대 왕유(王維)·오도현(吳道玄)의 불화(佛畵) 등을 접한 감회를 〈봉상팔관 鳳翔八觀〉에서 읊었다.

봉상부에서의 임기가 끝나 상경한 1065년에 부인 왕씨(王氏)와 사별하고 그녀의 생전 모습을 〈망처왕씨묘지명 亡妻王氏墓地銘〉에 담았다.

이듬해 아버지 소순마저 죽자 아버지의 관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상을 치렀다. 탈상(脫喪)하고 상경한 1068년은 신종(神宗)이 즉위한 해로, 참지정사(參知政事:부재상) 왕안석

신법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소동파는 감관고원이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업무를 담당하다가 지방 근무를 청하여 저장 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서 근무했고, 이어 밀주(密州: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음)·쉬저우[徐州]·후저우[湖州] 등지의 지방관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신법으로 인해 고생하는 농민들의 생활상을 시로써 묘사하고는 했다.

후저우 지사(知事)로 있던 1079년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어사대(御史臺)에 체포되어 수도로 호송되었다. 이때 어사들의 심문과 소동파의 변명을 담은 기록이 〈오대시안 烏臺詩案〉에 남겨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다행히 사형을 면한 그는 100일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황주(黃州: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 황강 현[黃岡縣]) 단련부사(團練副使)로 좌천되었다.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황주에 거주할 의무가 지워진 일종의 유형(流刑)이었다.

황주에서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부인은 양잠을 했고, 그는 본래 병영이었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이 땅을 동파(동쪽 언덕)라 이름짓고 스스로를 동파거사라고 칭했는데, 그의 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그 유명한 〈적벽부 赤壁賦〉가 지어진 것도 이곳에서였다.

1085년 신종이 죽고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신종의 어머니이며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태황후(宣仁太皇后)가 섭정을 시작했다.

그녀는 뤄양[洛陽]에 운둔해 있던 사마광

사마광이 죽고난 후 당쟁이 시작되었고, 선인황태후마저 사망하자 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철종은 신법들을 다시 부활시켰으며, 소동파는 다시 좌천되어 혜주사마(惠州司馬)로 임명되었다. 그에 대한 탄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를 질시하는 정치인들로 인해 하이난 섬[海南島]으로 유배되어 그곳에 주로 거주하던 리족[黎族]과 함께 비참한 생활을 했다. 철종의 죽음으로 휘종(徽宗)이 즉위하면서 제거옥국관(提擧玉局觀)이라는 명예직에 봉해져 상경하던 도중, 큰 병을 얻어 창저우[常州]에서 66세의 생을 마감했다.

소동파는 구양수·매요신

구양수·매요신 이전의 시가 대개 비애(悲哀)를 주제로 해왔던 데 비해서 이 두 사람은 평안하고 고요한 심정을 주로 읊었고, 소동파는 이에서 벗어나 훨씬 적극적·자각적인 관점을 취했다. 즉 인생체험에 대한 시각의 전환을 생활의 지혜로 삼아 인간 불행의 내면에서 자신만이 인식할 수 있는 행복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가 이처럼 비애의 지양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장자의 제물철학, 불교의 묘리(妙理) 등의 사상적 배경 때문이었으며 〈적벽부〉

그의 시는 자유분방한 심정과 재능의 표현을 통해 경쾌한 리듬 속에 절묘한 비유와 유머를 담고 있다. 제재에 있어서도 특별히 구애받지 않아 이전까지 다른 사람들이 취하지 않았던 것, 간과되어왔던 것들도 시로 썼다. 그의 시는 모든 사람에 대한 폭넓은 애정을 기저에 깔고 있으며, 인간의 욕망을 긍정했고 인간의 선의(善意)를 신봉했다. 그는 사(詞)에서도 기존의 완약(婉約) 대신에 호방한 사풍을 창시했다. '적벽회고'(赤壁懷古)라는 부제가 붙은 〈염노교 念奴嬌〉·〈수룡음 水龍吟〉 등은 영물시(詠物詩)의 극치라 일컬어진다.

한편 산문

〈조주한문공묘비 潮州韓文公廟碑〉 등의 비문, 〈유후론 留侯論〉·〈범증론 范增論〉 등의 사론(史論)을 비롯해 많은 산문을 남겨 지금까지도 널리 읽혀지고 있다.

소동파는 서예

그는 〈제발 題跋〉이라는 평론에서 해서

한편 그의 죽화(竹畵)는 문동(文同)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동파는 그림을 그리는 데 기교를 쓰지 않았으며, 친구들은 그러한 그의 그림에 한 점의 세속성도 보이지 않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왕유의 그림에 대해 "시 속에 그림 있고 그림 속에 시 있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이후 중국 화론사에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이같은 예술 사상과 기교에 대한 무관심은 문인화(文人畵)를 크게 부흥시키는 힘이 되었다. 다른 문인들과는 달리 동파의 시문집은 생전에 이미 간행되어 재판의 물증으로 제출될 정도였다.

〈동파집 東坡集〉 40권과 〈동파후집 東坡後集〉 20권은 남송 데의 판본이 여러 종류 남아 있다. 이 두 책에 〈주의 奏議〉·〈내제집 內制集〉·〈외제집 外制集〉·〈응소집 應詔集〉·〈속집 續集〉을 합친 〈동파칠집 東坡七集〉은 100권이 넘으며, 〈동파전집 東坡全集〉이라 불리기도 한다.


苏轼

 

(北宋文学家、书画家、唐宋八大家之一)

 讨论

同义词 苏东坡(宋代文学家)一般指苏轼(北宋文学家、书画家、唐宋八大家之一)

苏轼(1037年1月8日-1101年8月24日),字子瞻、和仲,号铁冠道人、东坡居士,世称苏东坡、苏仙, [1-3]  汉族,眉州眉山(四川省眉山市)人,祖籍河北栾城,北宋著名文学家、书法家、画家。 [4] 
嘉祐二年(1057),苏轼进士及第宋神宗时在凤翔、杭州、密州、徐州、湖州等地任职。元丰三年(1080),因“乌台诗案”被贬为黄州团练副使。宋哲宗即位后任翰林学士、侍读学士、礼部尚书等职,并出知杭州、颍州、扬州、定州等地,晚年因新党执政被贬惠州、儋州宋徽宗时获大赦北还,途中于常州病逝。宋高宗时追赠太师,谥号“文忠” [4]  
苏轼是北宋中期文坛领袖,在诗、词、散文、书、画等方面取得很高成就。文纵横恣肆;诗题材广阔,清新豪健,善用夸张比喻,独具风格,与黄庭坚并称“苏黄”;词开豪放一派,与辛弃疾同是豪放派代表,并称“苏辛 [4]  ;散文著述宏富,豪放自如,与欧阳修并称“欧苏”,为“唐宋八大家”之一。苏轼善书,“宋四家”之一;擅长文人画,尤擅墨竹、怪石、枯木等。
作品有《东坡七集》《东坡易传》《东坡乐府》《潇湘竹石图卷》《古木怪石图卷》等。


蘇東坡 人間到處有靑山


竭宝峰 - 2011 - ‎Juvenile Fiction

诗人苏东坡一生岁月大半在迁谪漂泊中度过,
历经杭州、密州、徐州、黄州等十二州, ... 中有许多类似的佳句,
日人西乡隆盛也写过:“埋骨何须桑梓地,人间到处有青山”。





시동포 (Su Dongpo) 시인은 표류와 표류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냈다
The poet Su Dongpo spent most of his life in the drifting,

Hangzhou, Mizhou, Xuzhou, Huangzhou 등에서 12 년이 지난 후에도 비슷한 좋은 문장이 많이 있습니다.
After 12 years in Hangzhou, Mizhou, Xuzhou, Huangzhou, etc., there are many similar good sentences.

일본의 Xixiang Longsheng도 썼다 :
"뼈는 어느 뽕나무밭이나 가래나무밭에 묻히겠지요. 인간세상 골골이 청산입니다.."
The Japanese Xixiang Longsheng also wrote: "When the bones are buried in the mulberry, there are green mountains everywhere."



埋骨何需桑梓地,人生何处不青山。这是谁的诗?


“埋骨何需桑梓地,人生何处不青山”这两句诗据说出自于日本江户时代末期(幕末)的萨摩藩武士、军人、政治家西乡隆盛。

西乡隆盛(さいごう たかもり,1828年1月23日—1877年9月24日),和木户孝允(桂小五郎),大久保利通并称“维新三杰”。通称吉之助,号南洲。

传说西乡隆盛青年时写下这首立志诗:

男儿立志出乡关,学不成名死不还。

埋骨何须桑梓地,人生无处不青山。

其实原诗为幕末尊王攘夷运动僧人月性所作,原题“锵东游题壁二首”,西乡隆盛可能引用修改过,而数十年后毛泽东又作《七绝·改诗赠父亲》,在中国广为人知。

扩展资料:

僧人月性原诗如下:

《锵东游题壁二首》

其一

二十七年云水身,又寻师友向三津。儿乌反哺应无日,忍别北堂垂白亲。

其二

男儿立志出乡关,学若无成不复还。埋骨何须坟墓地,人间到处有青山。

在日本山口县的月性遗品展示馆外有此诗的刻碑,为后人纪念月性而立。

七绝·改诗赠父亲》是毛泽东的一首七绝,根据日本明治维新时期著名政治家西乡隆盛的诗略加修改而成。毛泽东适应自己的情况做了改动,表达了他远大的志向,也表达了对父亲的深厚感情。

七绝·改诗赠父亲

孩儿立志出乡关,学不成名誓不还。埋骨何须桑梓地,人生无处不青山。

参考资料:百度百科-西乡隆盛百度百科-锵东游题壁二首








毛澤東離家求學 出鄕詩





孩儿立志出乡关(해인립지출향소),

学不成名誓不还(학부성명서부환)。


埋骨何须桑梓地(매골하수상재지),

人生无处不青山(​인생무처부청산)!


마오쩌뚱(毛澤東,1893~1976)은 후난성(湖南省) 샹탄현(湘潭縣) 사오산(韶山)에서

빈농과  중농의 중간수준 집안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룬즈(潤之) 호는 쯔린(子任)이다.


8세 때에 농사를 지으며 초등학교(당시 마을 서당 수준)에서 유학(儒學)을 배웠고,

상급학교 진학을 하고 싶었으나 농사일을 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진학하지 못하였다.


14세에 아버지의 강요로 6살 연상인 이웃 마을 뤄(羅)씨 가문의 여인과 결혼하였고,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하며 지냈으나, 일년이 지나 아내가 병으로 죽자 가출을 결심하고,

편지 한 장을 써서 아버지가 잘 보는 책갈피에 꽂아 놓고 집을 떠났는데...



毛澤東離家求學 出鄕詩

孩兒立志出鄉關(해아입지출향관)

學不成名誓不還(학불성명서불환)

埋骨何須桑梓地(매골하수상재지)

人間無處不青山(인간무처불청산)

 

이 아들은 뜻을 세워 고향을 떠납니다.

배움으로 이름을 얻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으렵니다.

뼈는 어느 뽕나무밭이나 가래나무밭에 묻히겠지요.

(뼈를 묻을 곳이 어찌 꼭 뽕나무, 가래나무밭(고향) 뿐이겠습니까)

인간세상 청산이 아닌 곳 없습니다.

(인생이란 어디에 묻혀도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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