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인물사- 전봉준
-1994년 한겨례 신문 연재물
전봉준(1855∼1895)
-민중 가슴에 영원한 녹두꽃, 농민 분노와 동학 결합시켜 '반봉건 반외세' 들불 지펴
주체 역량과 동력이 있다고 하여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조직화하고 폭발적인 분출로 끌어내는 계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전봉준, 마무리 교과서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려 해도 틈을 비집고 끼어든다.
특히 유신 이후 그의 초상화는 끊임없이 민중의 눈을 현란케 했다.
우리는 영웅사관을 배제하면서도 영웅의 모습을 그리워한다. 왜 그럴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전봉준은 고창의 당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상놈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으나 너무나 보잘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난하기 짝이없는 아버지 전창혁은 훈장질로 입에 풀칠을 한 평범한 위인이었으나 외아들을 잘 둔 탓인지 자주 역사에 이름이 오른다.
전창혁은 글줄을 익힌 탓으로 당촌마을에서 훈장 노릇을 했다. 어린 전봉준의 영웅설화 속에 글 잘한다는 이야기는 드물다.
하나 개구쟁이로 더욱 이름을 떨쳤던 것 같다.
10대 초반 당촌마을 앞에는 인내가 있고, 그 건너편에는 김씨 성을 가진 양반들이 살고 있었다.
정초에 두 동네 아이들이 패싸움을 벌일 적에 전봉준이 늘 앞장을 섰다고 한다.
전창혁은 유민처럼 여기저기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이런 여건에서도 아들에게 서당교육만은 시켰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창혁 편 참고)
전봉준이 장성해서 정약용의 국가제도 개혁방안을 담은 <경세유표>를 읽었다고도 하고
서울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만났다고도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유랑생활 속에서 사귄 동무나 선배,
곧 김덕명·김개남·손화중 드잉 함께 거사했고, 또 그가 알고 지내던 송여옥·차치구·정백현 등을 끌어들였다.
30대 초반에 봉기의 꿈
그는 늦어도 30대 초반에 일대 봉기의 꿈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나들이를 할 적에 수행원 여럿을 거느리고 밤에 친지의 집에 찾아들기 일쑤요,
그의 일행에게 밥을 지어줄 적에도 그 숫자를 모르게 하였다고 하며, 수행원의 밥그릇을 나귀에 싣고 다녔다고 한다.
그가 장성해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갈 적에 훈장 노릇은 물론 때로 풍수쟁이, 약장수 등을 했다 하며,
때로 날도 잡아주고 편지도 대필했다는 것이다. 그런 속에 가렴주구와 민중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며 더욱 봉기의 조직을 넓혀갔다.
그가 일본 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을적에 자신은 논 세 두락을 부치무로 하등 빼앗긴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조사관이 "너는 피해가 없는데도 무슨 까닭으로 소요를 일으켰느냐"고 물으니
그는 "일신의 피해 때문에 기포한다면 어찌 남자의 얼이겠느냐?
중민이 원통해하고 한탄하기 때문에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하려 한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 (전봉준 공초)
그가 동학에 든 것은 1890년대 초였다. 그는 접주라 했고 동학을 몹시 좋아한다고 했으나 포덕에 나서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동학의 신비성, 주술성과 조직을 가장 잘 이용했다.
이렇게 해서 봉기했다.
그는 민중의 동력을 끌어낸 제일의 공로자이다.
무장 고부봉기 이후 많은 포고문·격문·행동강령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는 처움부터 반봉건반외세의 지향을 뚜럿이 보여주었고,
민심을 얻는 농민군의 행동지침을 내렸다. 오늘날의 안목으로 그 한계가 지적되기도 한다.
탁월한 전략·전술가
적어도 1차 봉기때에는 전략 전술가로 나무랄 데가 없다. 집강소 기간 호남의 3분의 2 이상이 그의 지휘하에 있었고,
부분적이나마 경상도와 충청도에도 영향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충청도·경상도 지역의 당시 기록에 전봉준은 한결같이 '수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7월 15일 남원대회 이후 농민군 지도부는 분열의 조짐을 보였다.
하나는 집강소 통치에 감사(정부의 대행)의 공인을 받는 것이었는데,
김개남은 이를 반대하고 독자노선을 걸었다. 전봉준은 감사 김학진의 협조를 얻어 반봉건운동을 추진했다.
김개남보다 중도 입장
또 하나는 경복궁 쿠테타와 개화정권을 반대하고 흥선대원군과 손을 잡은 일이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반일반개화에는 뜻을 같이했으나 흥선대원군과의 관계에서는 미묘한 이견을 보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김개남은 수령·양반·토호의 징치에 강도를 더했고, 전봉준은 유화책으로 화유와 설득을 통해 풀어나가려 했다.
이렇게 해서 호남의 세 거두, 곧 김개남을 급진파. 손화중을 온건파, 전봉준을 중도파로 구분할 수 있었다.
공주 대회전의 주력 농민군은 어디까지나 전봉준이 이끌었다. 공주의 패전은 그에게 결정적 타격을 안겨주었다.
그는 2차 봉기를 9월에 단행한 것은 곡식이 여물 때를 기다린 것이라고 하였으나.
이때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를 평양에서 크게 깨뜨리고 충부리를 농민군에 집중적으로 겨눌 수 있었으며,
게다가 개화정권의 군대를 통제할 수 있는 시기였다.
공주 대회전은 일본군에게 많은 시간을 주어 북쪽과 경상도·충청도 해안 세력의 합류를 차단당했고,
또 남접의 일부 이탈과 북접의 연합이 늦어진 속에 전면대결을 벌여 일본의 신무기와 정면으로 맞섰다.
날씨가 추운 자연조건에서 장기전을 벌였으나 분산전과 유격전은 시도자히 않았다.
이때의 전략전술은 논란거리를 제공할 만했다.
그는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반일의 의리를 따져 마지막으로 일본군의 앞잡이 또는 일본군에 협조하는 개화정권의 군대와 구실아치,
보부상들에게 애국의 의리로 호소했다. 그러나 그 뜻대로 세상 인심은 움직이지 않았다.
흔히 동양의 역사관은 이를 '시운'이라고 말한다.
운명의 공주 대회전
아무튼 전봉준은 원평 태인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이고 입암산성과 백양사를 거쳐 회문산 아래 순창 피노리로 몸을 뺐다.
그를 입암산성장이나 백양사의 중들도 고발하지 않았는데, 피노리의 엣 부하 김경천의 변절로 잡히고 말았다.
이것은 그의 또다른 큰 실수였다. 그러나 불과 20리 지점에 숨어있던 김개남과 만나 재기를 도모하려 했다는 일도 있다.
그는 용케 일본군에게 끌려간 탓으로 재판을 받고 자신의 견해를 밝힐 기회를 얻었다.
처음 잡힐 적에 그는 몽둥이인지 칼인지에 다리를 크게 얻어맞아 다쳤고, 온몸은 상처투성이었다.
이런 몸으로도 그는 조금도 기개가 꺾이지 않았다. 그는 신중하고 조직적이면서도 기질은 아주 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나주에서 서울로 잡혀올 적에 그의 행동은 이렇게 전한다.
당당하게 최후 맞아
"전봉준이 벼슬아치를 보고는 모두 너라고 부르고 꾸짖으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길을 오는 동안 죽력고(대나무 진액으로 빚은 술)와 인삼·미음을 달라고 하여 먹으면서 행동거지가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그의 뜻을 거스르면 꾸짖기를 '내 죄는 종묘사직과 관련된 것이니 죽게 되면 죽을 뿐이다.
나희들이 어찌 나를 함부로 다루느냐?" 하였다. 잡아가는 이들이 이를 보고 "예예" 하며 잘 모셨다. (오하기문 3월)
또 그의 수행원이었던 김흥섭은 "전대장은 기지개를 켤 적에 큰대자 모양을 하였으며,
하품을 할 적에도 큰기침을 먼저 하였다. 버선 목을 벌려 이를 잡게 할 적에는 번듯이 누워 있었다."고 하였다.
(이기화씨의 증언) 이랬으니 일제의 회유를 호락호락 받아들일리가 없었다.
일제 당국은 그에게 지위를 준다거니 재산을 준다거니 온갖 방법으로 회유했으나 모두 거절하고 '죽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재판정에서도 너무나 당당했다. 그리하여 일본 사람들도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일본 신문 이륙신보 등)
만일 그가 비굴한 처신으로 살아남았다면 우리는 훌륭한 정신적 지주를 잃었을 것이요.
바람직한 역사상에 큰 흠이 되었을 것이다.
역사인에게는 죽음의 선택이 큰 의미를 준다. 그는 비록 비명에 갔으나 오늘날 우리는 그를 길이 추앙하고 있다.
인터뷰 / 전봉준 잡힌 순창 피노리 주민 박환성씨
"전장군 장작더미 올라 최후 저항"
"서당에서죠. 9살때던가 훈장님과 마을 어른이 도란도란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요.
녹두장군 전봉준이 우리 동네에 왔었고, 예서 잡혀 끌려갔다던 얘기를."
박환성(68)씨가 사는 피노리, 요샛말로 순창군 쌍치면 금석리는 첩첩산중 꼭대기에 움푹 들어선 분지 모양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천혜의 피난지로 알려졌는지 멀리는 노론의 일파가 여기서 한숨을 돌리고,
한국전쟁 때에는 낙동강 전투의 패잔병들이 건너편 회문산에 본거지를 틀기 전에 이미 해방구 '인민공화국'을 세웠던 지역이다.
그 때문에 태우고 죽이고 보복도 심했다. 그도 부역했느니, 안했느니 시달리다, '친구가 면서기를 했는데 빼내줘'서 살았다.
피노리에는 박씨가 어릴 적만 해도 큰 장이 섰다. 물론 여관도 주막도 있었고, "왜놈이 세운 소방대도 있을"만큼 북적댔다.
갑오년 당시에는 조선땅 8부자 가운데 한 사람이 살았단다.
지금은 이농으로 70호만이 쓸쓸히 남은 고즈넉한 산촌으로 줄었고, 마을 어귀에는 농산물개방을 규탄하는 구호가 벽에 박혀 있다.
"관군이 주막을 에워싸니까 월동용으로 쌓아놓은 장작더미 위에 올라 버텼답니다.
관군은 장작더미에다 불을 질렀고, 펄쩍 뛰어 담을 타넘는데 일본도에 회목(아킬레스건)을 맞아 주저앉았고요.
그날 밤새 하도 많이 두들겨 패서 하루면 갈 길을 이틀 걸려 순창군청으로 끌고 갔다고 들었어요."
주막자리며 장작더미 자리를 박씨에게 들려줬던 노인마저 3년 전 세상을 떠났으니 어쩌면 전봉준이 잡힌 자리를
손가락으로 집을 수 있는 이는 통틀어 그만이 남은 셈이다. 마을에는 아직 아무런 표시도 없다.
그동안 오는 사람마다 그를 찾았다. 그는 이미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말을 요령있게 풀 만큼 익술해 있었다.
그러나 어릴 적에 들은 말과 나중에 책 등을 통해 전해들은 걸 또박또박 구분하려 애썼다.
"수십년 동안 민족상잔에 묻혀 왜놈얘기는 쑥 들어갔어요, 학교서도 반공만 가르치지 반일은 없잖아요. 어떻게 당했는지도 잊혀져가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