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스포츠 한마당

축구선수 홍명보

작성자엄대감|작성시간13.08.12|조회수423 목록 댓글 1

 

스포츠인 홍명보_영원한 리베로

축구엔 정답이 없다고 했다. 요즘처럼 주어진 정답을 외우고, 획일화된 세계관을 향해 무한 경쟁의 냉엄한 현실에 내몰린 청소년들에게 "정답은 없다"는 표현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올해 2월부터 20살 이하 청소년대표팀 사령탑에 선임된 홍명보 감독은 선수들과 합숙 훈련 중인 파주 국가대표팀 트레이닝센터에서 한 인터뷰에서 "축구엔 정답이 없으니까요."라고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날렸다. 홍 감독의 머릿속을 관통하고 있는 이 짤막한 한마디엔 강한 현실 부정이 녹아있다. 한국 축구, 나아가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보여주려는 말이기도 하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유년 시절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이 깔려있다.

 

 

 

서울 광장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를 처음 시작했다. 여동생 둘이 있는 집안의 외아들이어서 축구에 발을 들여놓기가 쉽지 않았다. 부모로서는 하나 뿐인 아들이 축구보다는 공부를 해 집안을 꾸려 나가길 바랐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늘 인생은 그런 작은 갈등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행로가 크게 달라지기도 한다. 소년 홍명보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서울운동장을 따라다녔던 것이 축구를 좋아한 계기였다. 하지만, 축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부모도, 주변의 그 누구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부모의 반대에도 스스로가 좋아서 내린 선택이었다.

 

공을 갖고 노는 것이 즐겁기만 했던 소년에게 축구가 늘 재미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유난히 키가 작았던 것이 문제였다. 작은 신체조건 탓에 감독 선생님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어린 홍명보에겐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가 쌓였을까? 홍 감독은 “늘 교실에 가면 맨 앞줄 자리에 앉을 정도이니 얼마나 키가 작았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초등학교 시절의 자신에 대해 “별로 돋보일 게 없는 아주 평범한 아이였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초등학교는 경쟁이 덜 치열했기에 그럭저럭 지낼 만은 했다. 키는 여전히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 광희중학교에 입학했다. 감독 선생님이 요구했던 체력과 체격의 수준은 초등학교 때보다 훨씬 강해졌고 커졌지만, 그에겐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몸집이 큰 선수들과 충돌이라도 하면 튕겨져 나자빠지기가 일쑤여서 부상에 대한 공포감이 그를 괴롭혔다. 작은 체구로 그런 축구 환경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의 이런 고민은 그때부터 축구인 홍명보를 만들게 된 매우 중요한 시발점이 됐다.

 

“내게 오는 볼을 잘 컨트롤하지 못하면 곧 빼앗기고 말죠. 가장 중요한 것은 볼 컨트롤이었습니다. 그게 돼야 그 다음 패스도 할 수 있으니까요. 두 번째는 상대 선수들이 접근하기 전에 재빨리 패스를 해서 신체의 충돌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내 나름대로 고민 끝에 생각해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탄탄한 기본기를 쌓게 된 것이죠.” 중학교 때까지 평범한 선수였지만 기본기가 잘 준비돼 있었기에 그는 향후 무럭무럭 더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축구명문 동북고에 진학한 뒤 키가 자라면서 덩달아 축구 실력도 발휘됐다. 고교 2년과 3년 연거푸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해 고려대까지 진학했다. 어려서 남들에 비해 불리한 신체조건인데도 어려움을 헤쳐 나가며 성장한 그에게 축구엔 정답이 없다는 말은 곧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라는 말이기도 했다.

 

 

국가대표 13년간 135경기를 뛴 대기록, 어느새 따라 붙은 별명 '영원한 리베로'

미드필더로서 고교와 대학시절 명성을 날리던 그에게 중요한 기로가 왔다. 당시 남대식 고려대 감독이 주전 수비수(임정헌)가 졸업해 생긴 빈자리를 맡으라고 했다. 대학교 3학년에 포지션을 바꾸는 것은 사실 대단한 모험일 수도 있었다. 홍 감독은 “수비수 보직 전환에 불만이 있었지만 팀내 사정상 어쩔 수 없었다”며 “어떻게 하면 수비를 잘 봐야 하는지 그때부터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돌이켰다. 공격 중심의 축구에서 수비로 포지션이 바뀌자 축구 전체를 보는 시각이 더 넓어졌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수비수로 활동하던 대학 4학년, 1990년은 처음 태극마크를 달던 해였다. 그 해 2월4일 노르웨이 친선경기에 출전한 것을 시작으로 한일월드컵 축구가 열렸던 2002년 말까지 13년간 그가 뛴 국가대표팀 간 경기(A매치)는 135차례로 아직도 역대 최다기록이다. 이 기록의 수치는 그의 성실성, 축구에 대한 능력, 선수들과 어울리는 소통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상대 공격의 루트를 미리 내다보고 차단하는 능력,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지능적인 플레이와 탄탄한 기본기, 그라운드 전체를 굽어보는 시야를 바탕으로 한 송곳 전진패스, 그리고 무엇보다 카리스마 넘치는 통솔력으로 수비라인과 팀 전체의 경기력을 조율하는 것까지. 답답한 공격으로 팀이 곤경에 처하기라도 하면 지체 없이 나서 공격의 활로를 뚫는가 하면, 상대의 공격을 막아낸 뒤엔 재빠른 역습으로 경기 분위기를 바꾸면서 그에겐 어느새 잊을 수 없는 호칭이 붙었다. ‘영원한 리베로.’ 홍 감독은 뭔가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이 별명이 좋다고 했다.


 

프로선수로서도 성공적인 삶을 보냈다.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했던 1992년엔 이회택 감독의 지휘아래 팀 우승에 기여해 신인으로는 K리그 최초로 최우수선수(MVP)에 뽑히며 화려한 출발을 했다. 1994~1996년 3년 연속 K리그 베스트 11에 뽑힐 정도로 기복 없는 플레이를 펼쳤고, 일본프로축구에서 포항으로 복귀한 2002년에도 역시 베스트 11에 선정됐다. 국가대표와 프로축구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자 그의 명성은 국내외에 널리 퍼져나갔다. 국내 프로축구 활동 5년 만인 1997년 일본프로축구로 진출하게 됐고, 국가대표로 은퇴한 뒤인 30대 중반의 나이로도 미국프로축구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하지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그의 이런 명성은 한때 히딩크 감독과의 불화설로 잘못 와전되는 해프닝이 벌어질 정도였다. 지금도 축구인 사이에서는 거스 히딩크 감독이 2002년 월드컵 당시 홍명보 선수를 대표팀 명단에서 뺀 것은 카리스마가 넘치고 후배 선수들에 대한 통솔력이 있는 홍명보를 경계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이에 대해 홍 감독은 사실 무근이라고 했다. 그는 “일본프로축구에서 활동하던 2000년 리그 50경기를 소화했고, 휴식도 없이 히딩크 감독이 부임한 대표팀에 합류한 2001년 해외 원정경기 등을 하면서 몸이 나빠졌다”며 “결국 그 해 후반기 왼쪽 정강이뼈 피로골절 3개월 진단을 받았고, 결국 대표팀에 합류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경기는 2002월드컵의 첫 경기, 폴란드전

홍 감독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축구경기를 물었다. 대답은 2002년 월드컵축구 폴란드와의 첫 경기였다. 한국축구는 그동안 월드컵에서 1승도 거둔 적이 없었기에 폴란드전 승리는 역사적인 것이었다. 당시 경주 현대호텔을 숙소로 사용했던 홍 감독은 “경기가 끝나면 다음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쉬어야 하는데, 첫 승리에 대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텔레비전에 나오는 중계방송을 밤새도록 보다가 동이 튼 뒤에야 잠을 잤다”고 말했다. 하지만 팀 주장을 맡았던 그에게 2002년 월드컵은 개인적으로 무척 힘든 시기였다고 털어놨다. 국민들의 관심은 높아질 대로 높아졌고, 그동안 월드컵에서 경험했던 기억을 되살려보면 16강이라는 목표가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잘못되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까지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는 그의 말이 현실로 되진 않았지만, 얼마나 심적으로는 부담이 컸었는지를 간접적으로 느끼게 한다.

 

잊을 수 없는 경기가 월드컵 폴란드전이었다면, 잊을 수 없는 시절은 언제일까? 홍 감독은 일본프로축구에 진출했던 때를 떠올렸다. “모든 것이 권태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목표의식도 사라졌구요. 그 탈출구로 찾은 것이 바로 일본 진출이었습니다.” 그에게 왜 권태로움이 찾아온 것일까? 그것은 그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출전한 각종 국제대회에서 세계의 유명선수들과 함께 뛰면서도 소통할 수 없는 답답함, 고독감 등이 한몫 했다. 또 이 과정에서 그저 공만 잘 차는 그런 삶이 늘 옳다고 생각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홍 감독은 “외국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많은 경험 속에서 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훈련과 경기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국내 무대에선 어떤 것도 쉽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이유 등으로 인해 일본에 진출했는데, 초기엔 생각대로 쉽지만은 않았다.

 


일본에 진출했던 1997년 일본프로축구엔 한국 선수가 2명 밖에 없었다. 또 국내에서 정상급으로 뛰던 선수가 잘못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너무 컸다. 조언을 해줄 사람도 없었고, 의사소통도 쉽지 않았기에 힘든 나날이 계속됐다. 그런데 걱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기우로 변해갔다. 선진화된 일본축구를 배우고, 나름대로 성숙한 일본사회의 문화적인 영향도 받았다.

 

“한국처럼 녹초가 되도록 뛰지 않아도 되는, 어느 포지션에서든 협력플레이가 잘 되는 일본축구에 충격을 받았다”는 그는 “선수와 지도자 간의 대화와 소통의 중요성도 깨달았다”고 했다. 일본엔 져서는 안되며, 나아가 은연중에 일본을 무시하려는 태도까지 있었던 생각들도 바뀌기 시작했다. 대표팀에서 은퇴한 이듬해인 2003년 미국프로축구 LA갤럭시로 진출한 것에 대해 그는 “사실 축구가 목적은 아니었다”며 “영어공부를 하고 싶었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배움의 욕구가 더 컸다”고 고백했다. 축구선수가 축구만 하지 않는 미국사회에서 그는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 운동선수, 기부 등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다양한 문화체험도 했다. 국내 복귀 뒤 대표팀 코치를 맡은 그는 이런 외국의 경험에 힘입어 역대 한국인 코치로서는 외국인 코칭스태프와 가장 원활한 의사소통을 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 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어느 선수에게도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 것

홍 감독은 지난 4월14일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고액 기부자 모임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 회원에 가입했다. 자선사업에 대한 그의 열의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준다. 사회공헌 활동의 첫 발은 1997년이었다. 포항 구단이 일본프로축구 벨마레 히라쓰카로부터 받은 이적료 중 위로금으로 5천만원을 내놓자 그가 포항의 유소년 축구 장학생을 위해 써달라고 했다. 2002년엔 정식으로 재단이 설립돼 장학사업이 본격화됐다. 올해까지 180여명에게 15억원 상당의 장학기금과 축구용품이 전달됐다. 2003년부터 시작한 자선축구경기에서는 모두 8억원의 기금이 걷혀 공동모금회에 전달했다. 홍 감독은 청소년대표팀과 올림픽팀의 성적이 단기적인 목표라면, 장학 등 자선사업은 장기적인 목표라고 했다.

 

지난 시즌 국내 몇 개 팀으로부터 감독 제의를 받았지만 “휴식이 필요하다”며 거절했던 그가 국내 프로감독은 꿈이 아니라고 말했다. 대신 “청소년 감독직은 가치가 있는 일이라서 수락했다”고 했다. 그의 이런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국 축구에 대한 그의 생각과 견해, 그리고 그가 맡고 있는 20살 이하 청소년대표팀에 대한 구상에서 조금은 들여다 볼 수 있다.

 

“한국 축구는 너무 대형선수들만 원하고 있습니다. 큰 선수들의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단점도 있게 마련이죠. 키가 작은 선수들은 공중볼에 약한 단점이 있지만 민첩함이랄까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축구는 그런 것들을 어떻게 잘 혼합해 최적의 경기력을 만들어내느냐의 문제입니다. 키와 체력만 요구하는 한국 축구엔 반대합니다. 그리고 지금 청소년대표팀에선 서로의 의사소통이 중요합니다. 서로 자기 얘기를 해야 하는 것이죠. 거기서 내게 가장 중요한 역할은 어느 선수에게도 ‘너는 틀렸다’라고 얘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엄대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8.25 아무쪼록 선수생활 경험을 살려 대한민국 축구발전에 힘을 기울려 주세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