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들이 외치리라
(눅19:28-40)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치리라 하시니라." (눅19:40
스가랴는 예수님이 오시기 500여년 전 선지자였습니다. 바벨론에 끌려갔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돌아오기는 해도 자력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포로로 살던 나라의 왕이 꿈을 꾸고는 선처를 베풀어 나오는 것입니다. 70여년 동안 종으로 부려 먹었는데, 원수를 갚거나 징치를 하거나 책임을 물을 여력도 없이, 보내준다는 것에 한없이 감사하면서 돌아와야 했습니다. 나라의 채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 때 스가랴 선지자가 백성들 앞에 나섰습니다. 그렇게 어깨에 힘이 빠져 주눅들지 말고 새 힘을 내란 것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야가 임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메시야는 승리를 주실 것이고, 다시금 이스라엘에 큰 영광이 임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가랴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50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가 외친 말씀을 이루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내용인데, 예수님의 공생애에서는 고난주간 첫날인 주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일주일 후면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공관복음서에는 모두 나옵니다(마21, 막11,눅19). 그런데 40절 말씀은 누가가 유일하게 전합니다. “만일 이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외치리라”(40). 개그콘서트 중에 ‘이것 모르면 원숭이 되는 겁니다’라는 말이 유행합니다. 예수님을 찬송하지 않으면 돌보다도 못한 사람되는 것입니다 하는 뜻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무엇을 꼭 알아야 할까요?
예수님의 전지성
예수님의 여정은 갈릴리에서 시작했습니다. 아니, 그 위에 변화산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까지 온 것입니다. 그것도 제자들과 함께 한 삶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이웃인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들에게 일렀습니다.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오너라”(30). 예수님은 뭔가 훤히 보고 계시는 듯이 말을 하십니다. 아니, 나귀가 있다고 해도 그렇지, 그걸 누가 한번이라도 타 봤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압니까? 아이들이 장난으로도 타 볼 수 있고, 지금 예수님이 어른으로 타신다면 상당히 크기는 큰 것인데, 아무도 타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다 아신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출발하실 때부터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일러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16:21,마17:22,마20:18). 예수님은 세 번이나 같은 이야기를 하셨는데, 제자들은 세 번 다 반만 알아듣고, 반은 못 알아들었습니다. ‘죽으리라’하신 말씀만 알아듣고, ‘제삼일에 다시 살리라’하는 말씀은 못 알아 들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은 한 분이 말씀하시고 제자들은 열두명이 들었는데도 말입니다. 가롯유다가 이 말을 알아들었다면 예수님을 배반했겠습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신다는데 그 이상 뭘 더 요구하겠습니까? 인간의 이성이란 요만큼입니다.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은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직접경험이든지 간접경험이든지 꼭 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학교 가서 공부하느라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서 전지전능하십니다. 예배당에서 벌레를 잡을 때 제까짓 것이 도망을 가면 얼마나 가겠습니까? 내려다보고 화장지로 집으면 꼼짝없습니다. 그런데 그 벌레와 인간의 간격보다 인간과 예수님의 사이가 훨씬 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벌레와 인간은 유전자가 95%가 똑같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유전자는 어떨까요? 천지차이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그의 손으로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그 분이 자신의 피조물을 위해서 죽어 주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셨습니다. 우리를 지으셨으면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죽으신 주님을 사랑합시다.
예수님의 구주성
예수님은 맞은편 마을로 가서 나귀를 끌어 오라고 하시고서는 덧붙이는 말씀이“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31)고 대답할 말까지 입에 넣어 주셨습니다. 보냄을 받은 제자들이 갔더니 정말로 그렇게 물었고, 제자들은 그렇게 대답하고 나귀를 끌어 왔답니다. 더 이상 설명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주님이 누구이냐고 물었다느니, 제자들이 주님이 누구긴 누구냐고 예수님 뿐이 더 있겠느냐고 대답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주님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날 저녁에 예수님이 제자들이 자는 사이에 기도하러 왔다가 맞춰놓고 갔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홍해가 우리나라 서해안의 조석간만의 차처럼, 물이 빠졌을 때에 낮은 곳에서 건넜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기적이라고 순수한 믿음으로 보자구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비과학적이니, 비이성적이니, 미신적이니 하지 말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알려 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이 이루고 싶은 세상이 성경에서 예수님이 전해 주신 말씀입니다. 누가는 예루살렘 입선 직전에도 ‘므나의 비유’를 들어 설교하셨는데, 그 주제가 ‘모든 인간은 종말에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눅19:15). 이스라엘에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을 가지고 천국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현실성이 없다고 부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 다가 아닙니다. 현실에서 보이는 것만 가지려고 몸부림을 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영광을 받으시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지금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 나라가 먼저 내 심령에 이루어졌고,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에 이루어지게 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에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되게 해야 합니다. 그 때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하신 예수님이 “주가 여기 있다 하라” 말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겸손하심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데, 사람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하였습니다. 마태는 이 말을 “호산나”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시편에 의하면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하소서”(시118:25)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기도를 모두 묶어서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이시고, 창조주이시고, 곧 하나님이시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왕다우려면 우리가 생각하는 바로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나귀를 타서야 되겠습니까? 그것도 새끼라니, 안장도 없이 제자들이 깔아주는 겉옷 위에 앉으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로는 폼이 안 납니다. 제가 요즘 이문열 소설가의 부악문원창작교실에 다닌 지 한 달 됐습니다. 목요일 저녁에 가는데, 10명 정도 모입니다. 사람들이 타고 오는 차를 보면 폼 납니다. 소형차도 없고, 나같이 승합차 타고 오는 사람은 나 빼고는 없습니다. 아줌마들도 아가씨들도 남자들도, 차자랑하러 오는지 뭐하러 오는지, 소설은 쓴다는 사람들이 한숨 나오는데, 차는 모두 삐까뻔쩍합니다. 나는 큰 봉고차 헌자 타고 다니면 영 폼이 안 납니다. 예수님도 모든 사람들이 ‘호산나, 기도하오니 구원하여 주시옵소서’하는데 나귀를 타고 가시다니, 이건 요즘말로하면 말도 안 되는 씨추에이션(Situation)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눈에 거슬리는 것을 보니 이미 틀렸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는 것이 당연해 보이셨습니다. 처음부터 겸손하셔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겸손하시다고, 나귀를 타셨다고, 바리새인들이 말하기를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39)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호산나 하고 찬송한다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했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굉장하게 보인다고 높여 볼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려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눈으로 예수님처럼 겸손하면 하나님이 그를 높이십니다. 겸손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게 하셔서,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에 두셨습니다. 이걸 몰라보면 돌들이 외칩니다. 지금 세월호의 유가족의 아픔을 몰라주면 돌들이 소리칩니다. 아픔을 당하는 이들과 함께 아파해야 합니다. 거기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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