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Ukraine)
- 동유럽 -
▶ 개관 : 국가 : 우크라이나 Ukraine
공식 명칭 - 우크라이나, Ukraine
위치 - 러시아 서부 흑해연안
인구 - 약 39,536,000명 (40위)[26,06,11]
GDP - 약 2,253억3,700만 달러 (56위)
종족 - 우크라이나인(78%), 러시아인(17%)
수도 - 키이우(키예프) (한국과 -6시간 차)
면적 - 약 60만㎢ (한반도의 2.73 배)
언어 - 우크라이나語
종교 - 개신교, 우크라이나정교, 우크라이나 가톨릭교회
정부 형태 - 중앙집권공화제 / 다당제&단원제 (대통령 / 총리)
기후 - 대륙성기후 날씨 정보
화폐 - 흐리브냐 (UAH)
국가번호 - 380
안전 - 현지 안전정보
1924년 소련의 구성 공화국이 되었다. 1991년 8월 소련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
간 후 바로 독립을 선언했다. 11세기에 강성했던 키예프 루스가 동유럽 주요
정치·문화 중심지가 된 곳이다. 19세기부터 우크라이나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 약사 : 이 지역에는 키예프 루시(9∼13세기), 갈리치아-볼리니아 공국(11∼14세기),
카자크 헤트마나테(17∼18세기), 크림 칸국(15∼18세기) 등, 여러 나라들이 존
재했으며, 19세기부터 우크라이나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의 여러 지역들이 기원전 첫 1,000년 동안에는 킴메리족·스키타이·
사르마티아인에게, 서기 첫 1,000년 동안에는 고트족·훈족·불가리아인·아바르
족·하자르·마자르족·페체네그족에게 침략, 점령당했다. 그러나 5, 6세기에 소수
슬라브족이 그들의 원거주지였던 카르파티아 산맥 북부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우크라이나 서부와 중북부의 삼림 및 삼림-스텝 지대에 정착하면서 가장 큰 발
전을 이루었다.
마침내 슬라브족은 모스크바 주위의 미래의 러시아 국가 영토 북부 멀리까지
뻗어나갔다. 슬라브족의 초기 거주지들 가운데 키예프는 드네프르 강을 끼고
있으며, 폴리아니인의 중심지였다. 폴란드인과 발트 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드
네프르 교역로를 지배한 바이킹(고대 스칸디나비아인)이 함께 키예프 루스라
알려진 이 국가를 세웠다.
처음에는 키예프 주변의 영토에 붙여졌던 루시라는 이름은 그후 키예프의 전
영역을 포괄하게 되었다. 키예프 루시는 블라디미르 1세(성 블라디미르)와 야
로슬라프 1세(현명공 야로슬라프)가 통치하던 11세기에 가장 강성했다. 990년
경 블라디미르 1세는 그리스도교를 왕국의 정식종교로 채택하고, 비잔틴 제국
의 보호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지시 아래 교회의 성직위계를 만들었다.
동슬라브족은 그리스도교를 통해 최초의 문어인 고대교회슬라브어를 쓰게 되
었다. 11세기에 가장 강성한 키예프 루스는 동유럽 주요 정치·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12, 13세기에 킵차크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내분이 일어나고 교역로가 바뀌
자 차츰 세력을 잃어갔다. 13세기 중엽 몽골의 정복으로 키예프 시대는 결정적
으로 막을 내렸지만 1200년경에 부상했던 우크라이나 서부의 갈리치아-볼리
니아 공국은 14세기까지 존속했다.
14세기에 리투아니아가 갈라치아 공국을 제외한 우크라이나 영토의 대부분을
합병했으며, 갈리치아 공국은 폴란드 왕국에 넘어가고 우크라이나 남부 지방
은 여전히 몽골의 킵차크 한국(금장한국) 통치하에 있었다.
키예프 본국은 1458년 법제적으로는 독립된 두 나라, 즉 모스크바 대공국과
리투아니아로 분리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키예프루시의 옛영토는 빠르게 분산
되었다. 1569년 루블린 합병 이후 우크라이나는 리투아니아에서 폴란드로 넘
어갔으며, 같은 해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연합의 협상으로 우크라이나 그리
스 정교도와 우크라이나 가톨릭교도가 분열되었다. 종교적인 이견(異見)과 사
회적 불화는 명목상으로는 폴란드 왕의 신하였으나 실상은 자유용병 계층이었
던 자포로지예 카자크인들에 의해 가중되었다.
1648년 헤트만(군대 지도자)인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카자크인들이 드
네프르 강 하류의 자포로지예시치 요새를 거점으로 폴란드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으며, 그결과 그들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준(準)독립국가를 이루었
다. 흐멜니츠키는 이 봉기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1654년 모스크바 대공국의
차르와 협약을 맺었는데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를 굴복 의미로 받아들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키예프와 드네프르 강 동쪽 영토에 대한 모스크바 대공
국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카자크 헤트만네테는 차츰 러시아 제국
에 흡수되었다.
18세기말 우크라이나의 자치권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1783년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합병하고, 흑해 연안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이 지역에 재정착이 급속
도로 이루어졌고, 우크라이나는 19세기초 주요 곡물수출지역으로 부상했다.
18세기에 폴란드가 분할되자, 러시아 제국은 갈리치아를 제외한 드네프르 강
서부의 우크라이나 영토를 얻었으며, 갈리치아는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
19세기에 전개된 우크라이나의 민족운동은 러시아 제국에서는 정치적인 억압
과 우크라이나어에 대한 탄압(1863, 1876)으로 제한을 받았지만,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서는 여건이 비교적 나았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인들은 문화·정치·종교 단체들을
총망라해 하나의 연대조직을 구축하기도 했다.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 이후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의 주도하에 우크라이나 중앙 라다(라다는 '평의회'라
는 뜻)가 키예프에서 결성되었으며, 10월의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는 러시아 공
산주의 정부가 하리코프에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웠다.
1917∼21년 여러 정부들이 우크라이나를 지배하려고 다투었으나 결국에는 소
비에트 정부가 승리를 거두었으며, 1924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
화국은 소련의 일원이 되었다. 1919∼20년 볼셰비키와 싸웠던 폴란드가 갈리
치아와 볼리니아 일부 지역을 포함해 우크라이나 북서부를 여전히 지배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무너지자 1918년 11월 1일 우크라이나인들은 갈리
치아의 수도 렘베르크(리보프·리비프)를 점령하고, 서부 우크라이나 민족공화
국을 선포했으며 이 공화국은 1919년 1월 시몬 페틀류라가 이끈 우크라이나
민족공화국과 합쳐졌다.
그러나 그해 6월 우크라이나 군대가 갈리치아 영토에서 축출당했으며, 부코
비나는 루마니아에 합병되고 헝가리에 속했던 옛 우크라이나의 주들은 신생국
체코슬로바키아에 귀속되었다.
1930년대초 요시프 스탈린 지배하의 소비에트 정부는 우크라이나의 공업화와
농업의 집산화 정책을 급속도로 추진했다. 농업의 집산화는 농민들의 저항에
부딪혔지만 연이어 소비에트 정권의 곡물 압류가 유발되어, 1930년대초 기아
로 인해 약 5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우크라이나의 문화 생활을 더 철저하게 통제했으며, 우크라이
나 민족주의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억압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폴란드의 지배
에 대항하여 갈리치아 동부에서 일으킨 저항운동은 탄압과 테러 행위로 점철되
었으며, 루마니아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조직들을 냉담한 시선으로 대했다. 단지
체코슬로바키아령 루테니아(지금의 자카르파츠카야)에서만 우크라이나인들은
폭넓은 정치적·문화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독일-소련 불가침조약(1939)에
따라 폴란드령이었던 갈리치아 동부와 볼리니아 서부가 우크라이나에 편입되
었다.
1941년 6월 독일군이 소련을 공격하고 우크라이나를 빠른 속도로 점령했을 때
처음에는 우크라이나 현지의 지지를 다소 얻었으나 나치 독일이 농업뿐만 아니
라 모자란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무자비하게 착취하자 곧 게릴라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1945년 독일의 패배로 소련이 1, 2차 세계대전 사이에 폴란드·루마
니아·체코슬로바키아의 땅이었던 우크라이나의 모든 영토를 차지함으로써 대
부분의 영토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귀속되었다.
1940년대말 집산화 정책이 시행되고 우크라이나 가톨릭 교회가 불법화되자
(1946∼89)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불만이 고조되어 전시의 게릴라 저항운동이
계속되었다.
1953년 스탈린이 죽자 소련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다소 약화되었으나, 우크라
이나를 계속 소련에 묶어두고자 하는 기본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 1980년대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시행한 이후 많은 우
크라이나인들, 특히 지성인들 사이에 민족주의가 새로이 싹트기 시작했고, 이
러한 감정은 민주화된 우크라이나 의회가 1990년 공화국의 주권을 선포할 수
있도록 이끈 촉진제가 되었다.
1986년에는 소련이 건설한 핵발전소에서 원자로 노심(爐心)이 녹으면서 대참
사의 화재 발생한 체르노빌 사건 일어났다. 1991년 8월 고르바초프에 반대해
일어난 공산당 강경파의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자 우크라이나 의회는 독립을 선
포했고, 1991년 12월 국민투표를 통해 법률을 제정했다.
12월 소련이 붕괴되면서 우크라이나는 전세계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다. 새로
운 국가로 변모한 우크라이나 정부는 소비에트 시대의 국영 경제를 신속히 개
혁하지 못해 독립 후 여러 해 동안은 생산의 감소, 인플레이션의 증가, 실업의
확산 등으로 시달렸다.
▶ 경제 : 우크라이나는 삼림과 스텝의 혼합 지대가 중남부를 가로질러 서쪽에서 동쪽으
로 펼쳐져 있는데, 비옥한 흑토 때문에 겨울밀과 사탕무의 주요 생산국이 되었
다. 우크라이나에는 철광석·역청탄·무연탄이 풍부하고 도네츠 분지에는 망간을
포함한 광석 매장지들이 서로 가깝게 분포되어 있다.
우크라이나 중동부에 있는 이 지역은 이 나라의 공업 중심지로 유럽의 주요 중
공업·야금업 단지이다. 천연가스와 석유가 소비에트 시대에 많이 고갈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생산된다. 그러나 경공업과 소비재 부문은 중공업과 농업에 비
해 뒤쳐졌다.
항행이 가능한 주요강은 드네프르 강과 그 지류들인 프리파티 강, 데스나 강,
유주니부크 강, 도나우 강이다. 잘 짜인 간선도로망을 통해 모든 지역과 대도
시들이 상호연결되어 있다. 주요공항은 키예프 근처의 보리스폴 공항과 오데사
·리보프·하리코프에 있는 공항이다.
▶ 대한 관계 : 우크라이나가 독립국이 되기 이전에는 소련과 같은 맥락에서 한국과 관계
를 맺고 있었으며, 정식으로 독립한 뒤 1992년 2월 10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
립했다. 북한과는 1992년 1월 9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97년 현재 교민은
8,669명, 체류자는 123명이다.
▶ 여행 정보 : 치안상태-불안 / 여행경보 : 철수권고 도네츠크, 루간스크, 크림
긴급연락처 : 대사관 380-44-246-3759/61
팁 금액 보통 음식 가격의 5~10% / 무사증 체류 90일, 일방적 면제
전압 : 220 / 230 / 240V콘센트 2구
9:39
세계테마기행 - 황금의 땅,우크라이나 1부-천년의 유산,키예프 - 길이: 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