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이 오면
금강산 여행길에 오르면 내금강 관광의 첫걸음은 늘 표훈사에서 시작됩니다.
신라 시대에 창건된 금강산 4대 사찰 중 하나로, 오랜 세월 내금강의 관문 역할을 해온 곳이지요.
웅장한 산세에 둘러싸인 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그 고요한 절집은,
수많은 순례객과 여행자들의 발길을 가장 먼저 맞아주는 포근한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저는 역사보다는 풍경에 더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입니다.
그날도 표훈사로 오르는 길가에 시선이 먼저 멈추었습니다.
자연석을 얼기설기 쌓아 올린 축대 사이로 모란꽃이 활짝 피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람 한 점 없는 초여름 햇살 아래, 탐스럽고 화려한 꽃송이들은 마치 스스로 빛을 내는 듯했습니다.
예로부터 모란을 왜 '꽃 중의 왕'이라 불렀는지 그 자리에서 새삼 알 것 같더군요.
6월에 피는 꽃 가운데 이만한 위엄과 아름다움을 지닌 꽃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모란의 화사함에 취해 표훈사 경내를 어슬렁거리던 중이었습니다.
문득 첫 번째 오름길 옆에서 낯익은 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간 저는 걸음을 멈추고,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습니다.
"어? 해당화잖아!"
저는 어린 시절, 해당화가 만발하던 바닷가에서 자랐습니다.
고향의 향수가 베어 있는 꽃이기에 남들보다 조금 더 자신 있게 알아볼 수 있었지요.
분홍빛 꽃잎과 특유의 생김새는 틀림없는 해당화였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했습니다. 주변은 온통 화려한 모란 천지인데,
바닷가에서나 볼 법한 해당화가 어째서 이 깊은 금강산 절집 한가운데, 그
것도 딱 한 그루만 외로이 서 있는 것일까요?
호기심이 발동해 일행들을 불러 세워 물었습니다. "이 꽃 이름이 뭘까요?"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같았습니다. "모란이네, 모란." "변종 모란 아냐?"
지나가던 다른 관광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해당화라고 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오히려 고개를 저으며 저를 놀리듯 웃었습니다.
"에이, 이 깊은 산중에 무슨 해당화예요. 그럴 리가~"
오기가 생긴 저는 결국 답을 찾기 위해 표훈사의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문득 북한에서는 '스님'이라는 말보다 원효 중, 의상 중, 사명 중 같은 표현을 쓴다는 기억이 스쳤습니다.
우리를 안내하던 북한 안내양도 '중'이라는 표현을 썼기에,
저도 모르게 긴장했는지 다짜고짜 이렇게 물어보고 말았습니다.
"중님, 이 꽃 이름이 무엇입니까?"
순간 주변 사람들이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스님'도 아니고 '대사님'도 아니고, '중님'이라니요.
당황스러운 호칭에도 스님은 태연하셨습니다.
도사처럼 긴 머리를 기른 스님은 꽃을 한 번 지긋이 바라보더니, 담담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내, 그것 해당화 입네다."
순간 저는 기고만장해져서 일행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거 보세요. 제 말이 맞지요? 해당화 맞잖아요."
이어서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왜 이 화려한 모란꽃밭 한가운데 해당화가 있습니까? 그것도 딱 한 그루만요?"
스님은 잠시 먼 곳을 보듯 꽃을 바라보시더니, 뜻밖의 대답을 툭 던지셨습니다.
"그건... 나도 모릅네다."
그 싱거운 한마디에 마당에 있던 모두가 참지 못하고 또 한 바탕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생각해 보면 금강산에는 그런 신비가 참 많습니다.
수많은 기암괴석마다 저마다의 이름과 전설이 붙어 있고, 절집마다 오래된 이야기가 숨어 있지요.
하지만 정작 이유를 알 수 없기에 가슴에 더 오래, 깊이 남는 법인가 봅니다.
모란꽃 사이에 홀로 피어 있던 그 해당화처럼 말입니다.
그 꽃은 마치 금강산이 여행자에게 남겨 둔 작은 수수께끼 같았습니다.
그때가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기 불과 스무 날쯤 전이었습니다.
그 후로 금강산은 가고 싶어도 쉽게 갈 수 없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 한구석이 아련해지는 그리움의 산이 되어버렸네요.
유월의 시작에, 지금은 갈 수 없는 금강산을 그리며 이 글을 씁니다.
지금도 표훈사 마당에는 모란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겠지요. 그리고 어쩌면,
여전히 그 정중앙에서 고집스럽게 분홍빛 자태를 뽐내고 있을 단 한 그루의 해당화도 떠올려 봅니다.
유월이면 자주 듣는 가곡 <또 한 송이 나의 모란>의 선율이 귓가에 맴도는 듯합니다.
모란꽃 피는 유월이 오면... 또 한 송이의 나의 모란...
해마다 6월이 오면 모란이 피고, 모란을 보면 저는 자연스레 그날의 표훈사를 떠올립니다.
모두가 화려한 모란만 바라볼 때,
그 틈바구니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조용히 서 있던 해당화 한 그루.
세월이 흘러도 결코 잊히지 않는 것은 언제나 이처럼 뜻밖의 풍경들인가 봅니다.
오늘따라 금강산 표훈사의 그 싱그러웠던 초여름이 유난히도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