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들지 않는 꽃 (제1편: 수내리의 비밀과 둔갑 여우)
1. 양동이로 들이붓는 비
“와, 진짜 무지하게 내린다, 무지하게 내려.”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나직하게 탄식을 뱉었다. 비는 그냥 하늘에서 스르륵 떨어지는 게 아니었다. 마치 하늘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누군가 공중에서 양동이로 사정없이 물을 들이붓는 것만 같았다.
기상청에서는 분명 오후 늦게부터 비가 시작될 거라고 예보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작 아침이었다. 예보를 비웃기라도 하듯 쏟아지는 아침 비는 전혀 생각 밖의 일이었다. 게다가 우르릉거리며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태풍이 마을을 통째로 삼키려고 몰려오는 듯했다.
그때, 거실 벽에린 스피커에서 치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이장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이크에 대고 급하게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목소리가 찢어지듯 앵앵거렸다.
“아아, 마이크 시험. 아아, 주민 여러분, 이장입니다! 긴급히 알려드립니다. 지금 시간은 오전 9시인데, 오늘 새벽 6시에 읍내에 간다며 집을 나선 주으니가 아직 소식이 없다고 합니다. 혹시 마을 분들 중에 으니를 보신 사람이 있으면 지금 즉시 이장 휴대폰이나 마을회관으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우스가 있는 분들은 빗물이 안으로 쏠리지 않도록…….”
“크르릉, 콰쾅—!”
난데없는 천둥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이 격하게 들려왔다. 번쩍하는 시퍼런 불빛이 거실 창을 눈부시게 비추더니, 우르릉 쾅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장님의 다급한 안내 방송이 뚝 끊겨 버렸다.
그와 동시에 방안의 전등이 일시에 모두 꺼졌다. 지잉 하며 돌아가던 컴퓨터 전원도 픽 꺼져 버렸고, 책상 위에 둔 휴대전화를 확인해 보니 안테나 표시가 전부 사라진 채 먹통이 되어 있었다.
정전이었다. 나는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뛰어 나갔다.
거실 창가에는 엄마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비옷을 들고 서 있었다. 빗물이 사정없이 창문을 들이받고 있어서, 뿌연 물보라 때문에 밖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창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크게 쉬었다.
“전봇대가 넘어갔어. 이건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한 번에 다 끊길 리가 없지.”
“엄마, 진짜 다 나갔어. 불도 안 들어오고 전화도 안 돼.”
“전화까지 불통인데, 이 비행 장대에 으니는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냐? 휴우, 걱정이다, 걱정이야.”
엄마는 초조한 듯 비옷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나는 창문 가까이 다가가 밖을 보려 애쓰며 말했다.
“근데 엄마, 태풍도 아니라는데 왜 이렇게 바람이 세게 불어?”
“태양광 때문이야, 태양광! 저 뒷산에 설치한 패널인가 뭔가 하는 그것들이 날아다니면서 고압선 줄을 다 끊어 놓은 게 분명해. 그러니 통신 전봇대까지 같이 넘어진 거지.”
엄마의 옥죄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슬쩍 장난기가 발동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환경을 지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엄마. 언제는 자연 치유니 친환경이니 하면서 태양광 들어오는 거 엄청 환영한다며?”
내가 씩 웃으며 묻자, 엄마는 내 속도 모른다는 듯 눈썹을 잔뜩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엄마의 성질을 제대로 돋우었나 보다.
“정우 너, 지금 장난해? 무엇이든 다 자기 자리가 있는 법이야. 있어야 할 자연의 자리를 무시하고 무조건 산을 깎아서 아무 데나 태양광을 세우니까 저 난리가 나지! 인간의 욕심이 화를 부른 거야.”
“그럼 수내리는 완전 쑥대밭이 되었겠네?”
내 말에 엄마는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왜? 수내리 얘기가 나오니까 또 그 백 년 묵은 여우 생각이 나니?”
“어디 여우만 생각하나? 수내리 뒷산에 살던 오소리, 담비, 고라니…… 또 말벌이랑 땡벌까지! 거기가 무너지면 걔네들 다 갈 데가 없잖아. 얼마나 많은 동물이 사는데.”
“정우야, 너는 이 판국에도 그런 농담이 나와? 그런 쓸데없는 걱정 할 시간 있으면 얼른 네 방에 들어가서 공부나 하시지?”
“엄마도 참, 공부가 손에 잡히겠어? 근데 비는 오후에 온다더니 아침부터 왜 이렇게 난리냐고.”
“그게 다 이상기후 탓이지. 지구 온난화니 뭐니 해서 날씨가 미쳐 가는 거야. 그나저나 으니는 정말 어디로 갔을까? 너 으니랑 같은 반이잖아. 뭐 짚이는 거 없어? 어디 갈 만한 데라든가.”
엄마의 다급한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는 대로 읊조렸다.
“으니는 엄마…… 읍내에 큰집이 있고, 할아버지가 근처 요양원에 계시고…… 그게 다야.”
“그만해라, 응? 그 정도는 옆집 똥개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엄마는 내 말을 뚝 끊고 입을 삐죽이더니, 들고 있던 비옷을 팔에 걸쳤다. 그리고는 현관문을 열고 나가며 뒤돌아 한소리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우야, 엄마 마을회관에 가 본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대책을 세워야 하니까. 너 절대 어디 갈 생각 말고 집에서 공부나 좀 해라. 알았지?”
“네,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는 문을 쾅 닫고 집을 나섰다.
아빠는 오늘 새벽같이 비닐하우스에 일을 보러 나갔으니, 이제 집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넓은 거실에 혼자 남게 되자 주위가 썰렁하게 느껴졌다.
2. 비밀의 화원에 사는 아이
“그나저나 주으니는 진짜 어디로 간 걸까?”
나는 거실을 서성이며 중얼거렸다.
읍내에 큰집이 있고, 할아버지가 근처 요양원에 계신다는 것.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동네 개들도 다 안다는 그 시시한 정보가 내가 주으니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으니는 우리 반에서 가장 말이 없고 조용한 아이였다. 언제나 혼자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고, 방과 후에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만큼 으니는 자신만의 깊고 어두운 ‘비밀의 화원’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둑어둑한 거실을 혼자서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머릿속에서 별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전부 으니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오늘 아침 그 폭우를 뚫고 읍내로 걸어갔을 리는 없다. 버스도 끊겼을 텐데.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곳으로 간 건 아닐까?
“어쩌지? 민우 형은 정답을 알고 있을까?”
나는 문득 나보다 더한 호기심 박사인 사촌 민우 형을 떠올렸다. 형은 우리 동네에서 모르는 것이 없는 척척박사였다. 겨우 중학교 2학년이면서도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대학생들이나 알 법한 어려운 전문 용어까지 줄줄 외우고 다녔다.
“그래, 민우 형한테 연락해 보자. 형이라면 으니가 어디로 갔을지 짐작할지도 몰라.”
나는 후다닥, 뛰듯이 내 방으로 건너가 침대 위에 던져 두었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켜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아차 싶었다.
“맞아. 통신 전봇대 넘어져서 불통이지.”
바보같이 깜빡했다. 돌개바람이 수내리 뒷산에 설치된 태양광 패널을 모조리 뽑아서 들녘에 내동댕이쳤고, 그 바람에 통신 전봇대가 넘어가 고압선을 건드린 것이다. 지금 이 마을은 유선이든 무선이든 외부와 소통할 방법이 완전히 차단된 외딴섬이었다.
민우 형의 집은 우리 마을이 끝나는 가장 마지막 골목 끝에 있었다. 걸어서 가기에는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큰길이 아니라 좁은 집들 사이 골목길로만 요리조리 피해 가면 비는 몰라도 무서운 바람은 조금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당장 실행에 옮겨야겠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나는 다용도실로 달려가 비옷을 찾았다. 내 비옷은 너무 작아서 쓸모가 없었고, 구석에 걸려 있던 아빠가 일할 때 쓰는 커다란 성인용 비옷을 꺼내 입었다.
“우와, 엄청나게 크네.”
길이가 너무 길어서 발목까지 내려왔다. 이대로 걷다가는 바람에 펄럭이다 넘어질 게 뻔했다. 나는 창고에서 노끈을 가져와 팔뚝과 허리, 그리고 다리 부분을 꽁꽁 묶었다.
채비를 마치고 거실 전신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웃음이 빵 터졌다. 온몸을 노끈으로 칭칭 감은 꼴이 영락없는 은색 외계인 같았다.
“피식, 이게 뭐야. 진짜 외계인이 따로 없네.”
혼자 소리 내어 웃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서 거울 앞을 휙 비켜섰다.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름 끼치는 생각 때문이었다.
“외계인…… 그래, 주으니는 외계인이 분명해. 아니면…….”
거울에서 물러선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민우 형이 예전에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붉은 노을에 휩싸여 주위의 모든 그늘마저 핏빛처럼 붉게 물들어 있던 수내리 안골의 풍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거기서 나는 주으니를 처음 만났었다. 아니, 주으니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그 존재’를 처음 목격했었다.
3. 백 년 묵은 여우의 전설
그날도 하늘이 이상하게 붉은 날이었다. 수내리 안골 깊숙한 곳으로 들어 가면서 나는 겁이 나서 민우 형의 옷자락을 붙잡고 징징거렸었다.
“형, 제발 그만 가자.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이야기를 우리는 너무 사실로 받아들이는 거 아니야? 내가 잘못 생각했어. 지금이 21세기인데 무슨 백 년 묵은 여우가 있다고 그래?”
하지만 민우 형은 한 번 결심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었다. 자신이 기획한 모험에는 반드시 어떤 결과든 얻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대단한 호기심의 소유자였다. 형은 언제나 자신의 엉뚱한 계획에 군말 없이 동참해 주는 나를 조수처럼 끌고 다녔다.
“정우 너, 이제 와서 약한 소리 할래? 먼저 수내리 안골에 가자고 꼬드긴 게 누군데?”
“그건 그냥 해 본 소리지…….”
수내리 안골에는 아주 먼 옛날, 신라 시대 때 세워진 유서 깊은 절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골의 기운이 너무나 험하고 드세어서 절은 오래가지 못하고 폐허가 되었다. 지금은 그저 허물어진 돌탑과 주춧돌 몇 개만이 절터의 흔적으로 쓸쓸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번 모험은 평소와 달리 내가 먼저 형에게 가자고 제안한 것이 마음에 걸려, 나는 더 이상 강하게 반대하지 못했다.
“너 올해 5학년이잖아. 5학년이면 남자야, 남자! 뭐라도 흔적을 건져야지, 이 고생을 잔뜩 하고 그냥 집으로 가잔 말이야?”
“그래도 골이 깊어서 조금만 지나면 어둠이 금방 내릴 거라고. 진짜 여우가 나타나면 어쩌려고 그래?”
내 말에 민우 형은 가소롭다는 듯 코방귀를 뀌었다.
“푸히히! 정우 너 진짜 겁쟁이구나? 여우를 잡으러 여기까지 와 놓고선 진짜 여우가 나타나면 어쩌냐고 걱정을 하냐?”
바로 그때였다.
사락사락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절터 뒤쪽에 우거진 숲과 내 키보다 훨씬 크게 자란 억새풀들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덩치가 큰 동물 같은 알 수 없는 물체가 억새풀을 헤치며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형, 형! 저기, 저기 좀 봐! 진짜 뭐가 있어!”
나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민우 형의 옷자락을 잡아끌어 내 앞으로 세웠다. 형의 등 뒤로 바짝 숨어 숨을 죽였다.
스스슥, 스스슥.
억새풀의 거친 흔들림이 우리 코앞에서 뚝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후, 머리가 사방으로 마구 헝클어지고 여기저기 찢어져 너덜거리는 옷을 입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인지 귀신인지 도무지 구별이 가지 않는 기괴한 모습이었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동네 어른들이 말하던 그 ‘둔갑 여우’가 드디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어…… 어서 오세요! 고기는 많습니다. 얼…… 얼마치 드릴까요?”
민우 형이 덜덜 떠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수내리 절터 한가운데서 형과 나는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있었다. 바로 여우를 유인하기 위해 고기를 굽고 있었던 것이다.
4. 증조할아버지의 바지게
“여우는 쥐 고기를 제일 좋아한단다.”
동네 어른들이나 할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이었다. 그래서 형과 나는 무려 며칠 동안 온 동네를 뒤져 쥐틀로 잡은 쥐 세 마리를 철판 위에 올리고 굽고 있었다. 오전부터 시작해 오후 내내 기름을 듬뿍 쳐 가며 고기를 태우며 사방으로 냄새를 피웠지만, 방금 전까지는 아무런 소득이 없었었다.
원래 수내리 안골은 귀신이 나올 것처럼 수상하고 음산한 기운이 늘 감도는 곳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수십 년이 넘었고, 워낙 험해서 나무꾼들조차 찾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나무와 풀들이 마치 딴 세상처럼 비정상적으로 거대하게 자라나 밀림을 이루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사람으로 둔갑하는 여우가 살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홀려 정신을 빼놓는다는 무시무시한 소문이 자자했다. 실제로 과거에 여우에게 홀려 밤새 산속을 헤매다 구출되었다는 동네 사람의 증언도 있었기에, 마을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이곳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않았다. 괴괴한 소문은 시간이 흐를수록 풍선처럼 부풀려졌고, 어른들은 항상 엄한 얼굴로 경고하셨다.
“수내리 안골 쪽은 쳐다보지도 말고, 근처에 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하지만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아주 별난 생활을 즐기시는 분이었다고 한다. 남들이 하지 않는 모험을 좋아하셨고, 위험하고 험한 일을 언제나 스스로 찾아서 하시는 대담한 분이셨다. 사촌 민우 형이 바로 그 증조할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이어받은 게 분명했다.
아주 오랜 옛날, 증조할아버지는 전설 속에나 나오는 여우를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며 겁도 없이 수내리 안골로 걸어 들어가셨다. 그리고 지금 우리처럼 절터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쥐 고기를 구우셨다고 한다. 여우가 쥐 고기를 사러 오면 그걸 팔아서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아주 위험하고 황당한 생각을 실천에 옮기신 것이다.
할아버지가 고기를 구우며 두어 시간 동안 노릇노릇한 냄새를 골짜기에 풍기자, 신기하게도 집 한 채 없고 사람 그림자도 없던 그 깊은 숲속에서, 계곡 사이에서, 커다란 나무 뒤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주 멋지게 양복을 차려입은 신사도 있었고, 허름한 옷차림의 농부도 있었으며,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파라솔을 든 아주머니도 있었다.
그 수상한 손님들은 할아버지가 구운 고기를 사 가면서 고깃값이 얼마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품속에서 돈다발을 꺼내 보따리째 툭툭 던져 주고 사라졌다. 그 돈이 얼마나 많았는지, 할아버지가 가져간 커다란 바지게에 가득 담고도 위로 넘칠 지경이었다고 했다.
“싱글벙글 웃으며 집에 돌아와 마당에다 그 보따리들을 한꺼번에 쏟았지. 그런데 아 글쎄, 그 많던 돈이 눈 깜짝할 사이에 전부 누런 가랑잎으로 변해 버린 거 아니겠냐! 백 년 묵은 여우가 조화를 부려서 내 눈을 속인 거지.”
증조할아버지가 살아생전 단골로 하시던 이야기였다. 쥐 고기를 사러 왔던 세련된 사람들은 모두 인간으로 둔갑한 여우들이었고, 그들이 준 돈은 가랑잎이었다. 하지만 그 가랑잎 더미 중에서 진짜 돈도 몇 장 섞여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그 진짜 돈으로 동네의 논 두 마지기를 사고도 돈이 남았으니, 결과적으로는 쥐 다섯 마리로 떼돈을 번 셈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허풍이라며 비웃고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할아버지는 그날 이후로 두 번 다시 수내리 안골에 발을 들이지 않으셨다. 나중에 내가 슬쩍 이유를 여쭈어보았을 때, 할아버지는 주위를 살피며 이렇게 비밀스럽게 속삭이셨다.
“사실 그날 잡은 쥐가 몇 마리 안 돼서, 모자라는 분량은 집에서 키우던 닭을 잡아서 난도질해 쥐 고기라고 속여 팔았거든. 쥐 고기가 아니라 닭고기라는 걸 알게 된 여우들이 지금 눈에 불을 켜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게다. 내가 수내리에 발을 들이는 순간, 여우들에게 다리가 찢겨 해코지를 당할 게 분명해. 무서워서 어떻게 가냐.”
세상에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다며 호통을 치던 호방한 증조할아버지였지만, 비록 짐승인 여우일망정 거짓으로 음식을 속여 팔고 큰돈을 챙겼다는 양심의 가책과 미안함 때문에 다시는 가지 않으셨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그저 또 하나의 지나간 마을 전설이 되었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그 황당한 이야기를 철석같이 사실로 믿고 있었다.
5. 억새풀 속의 목격
그래서 나와 민우 형은 그 전설을 재현해 보기로 마음먹고 모험을 시작했던 것이다. 우선 여우가 환장한다는 쥐를 잡기 위해 집안 구석구석과 창고에 쥐틀을 놓고 일주일을 넘게 기다렸다. 하지만 목표로 했던 7마리에는 턱없이 부족하게 겨우 2마리밖에 잡지 못했다.
“형, 겨우 두 마리 가지고 냄새나 풍기겠어?”
“할 수 없지. 우리도 증조할아버지처럼 치트키를 쓰자.”
별수 없이 우리도 집에서 기르는 닭고기를 가져와 난도질한 뒤, 잡은 쥐와 한데 섞어 양념을 버무렸다. 겉보기에는 영락없는 비밀 소스 쥐 고기 요리였다.
수내리 절터에 도착해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설치하고 불을 피웠다. 이글거리는 철판 위에 양념 된 고기를 올리자, 치이익 소리와 함께 기가 막히게 맛있는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냄새만큼은 아주 일품인 훌륭한 요리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기름을 두르고 굽고 또 구우며 몇 시간째 연기와 냄새를 피워 대도 여우는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파졌다. 해는 어느덧 서산 너머로 뉘엿뉘엿 저물어가며 사방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무서움이 덜컥 밀려와 내가 먼저 그만 가자고 형의 옷소매를 붙잡고 애원하던 참이었다.
바로 그때, 내 키보다 큰 억새풀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토록 기다리던 진짜 사람의 모습을 한 여우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 존재는 우리를 보고도 흘끔거리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마치 형과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시선은 오직 철판 위에서 연기를 풀풀 풍기는 고기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엄청나게 뜨거운 고기를 맨손으로 덥석 집어 들더니, 게걸스럽게 뜯어먹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스스로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자부하던 대담한 민우 형조차,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괴하고 원시적인 여우의 모습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슬그머니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쩝쩝거리며 순식간에 닭 한 마리 분량의 고기를 해치운 여우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너풀거리는 옷소매로 철판 위에 남은 고기 부스러기까지 싹 쓸어안고는 그대로 가 버리려 했다. 이대로 여우를 보내면 돈은커녕 가랑잎 한 장도 못 받는다 싶어, 나는 다급하게 민우 형의 등을 앞으로 팍 밀었다.
“형! 저기…… 돈! 돈을 달라고 해야지!”
내게 등을 떠밀려 엉겁결에 여우 앞으로 한 걸음 나선 민우 형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 힘을 실어 외쳤다. 전설 속 여우들과 달리 이 여우는 돈보따리를 가져오지 않은 것 같았다.
“저…… 저기요! 고기 말입니다! 고기를 먹었으면 값을 주셔야지요!”
형의 외침에 획 돌아서려던 여우가 멈칫하더니, 그제야 고개를 돌려 우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붉은 노을빛을 받아 이글거리는 여우의 눈동자가 오랫동안 우리를 쏘아보았다. 무시무시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눈빛 속에서 우리를 해치려 하거나 공격하려는 살의는 읽히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슬프고 다급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두려움을 조금 털어낸 민우 형이 한 걸음 더 용감하게 여우에게 다가서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
“고깃값 달라고요!”
그러자 여우는 잠시 형의 얼굴을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닌,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하고 기괴한 짐승의 소리를 목구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획 뒤를 돌아 거대한 억새풀 숲속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 버렸다.
“우우우오오——! 우우——!”
여우가 사라진 숲 저 깊은 방향에서, 내 평생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처절하고 기이한 동물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민우 형은 본능적으로 여우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따라가려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공기 중에 확 퍼진, 여우의 특유의 역하고 지독한 노린내를 맡았는지 코를 킁킁거리다 얼굴을 심하게 찡그리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형, 제발 그만 가자! 형 말대로 저 여우가 쥐 고기가 아니라 닭고기 섞인 걸 눈치채고 다른 무서운 여우들을 잔뜩 데리고 돌아오면 우리 진짜 큰일 나!”
내 다급한 만류에 민우 형도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 저 녀석, 전설과 달리 가랑잎으로 돈을 만드는 기술 같은 건 없나 보다. 게다가 쥐 고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속았다고 화가 나서 우리를 해코지하러 달려들지도 몰라. 일단 후퇴하자.”
우리는 서둘러 장비를 챙겼다. 수내리 안골 깊은 계곡 위로 피처럼 붉고 짙은 산 그림자가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6. 폭우 속으로
거실 거울 앞에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던 나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때 안골에서 마주쳤던 그 기괴한 눈빛, 알아들을 수 없는 목구멍 소리. 그리고 우리 반에 어느 날 갑자기 전학을 와서 늘 혼자 소외되어 있던 주으니의 묘한 분위기.
“틀림없어. 주으니는 그때 그 여우와 관련이 있거나…… 아니면 으니 본인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장님의 방송대로 으니가 새벽 6시에 나가 지금 이 폭우 속에 고립되었다면, 그리고 만약 으니가 향한 곳이 읍내가 아니라 태양광 패널이 무너져 내린 ‘수내리 안골’이라면? 동물들의 터전이 쑥대밭이 된 그곳으로 간 것이라면 정말 위험했다.
나는 아빠의 거대한 비옷을 고쳐 입고 노끈을 단단히 쥐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쾅쾅 울려댔지만, 내 마음은 이미 골목길을 지나 민우 형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형을 만나야 했다. 형이라면 이 비밀의 실마리를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현관문 손잡이를 꽉 잡았다. 문을 열자마자 거센 비바람이 내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나는 어둠과 폭우가 삼켜 버린 수내리 마을을 향해 힘차게 첫발을 내디뎠다.
[1편 끝] 57매
시들지 않는 꽃 (제2편: 여우바람을 뚫고 뒷산으로)
1. 수내리의 미지 세계
“쿠르릉, 쾅—!”
소나기도 아닌데 하늘에서는 연신 푸르스름한 번개가 번쩍이며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내 가슴도 천둥소리에 맞춰 쿵쾅거렸다. 내가 겁이 없는 편이라 참 다행이지, 만약 겁쟁이였다면 벌써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채 방구석에 숨어 벌덜벌덜 떨고 있었을 판이었다.
기상청 예보에도 없던 기습 태풍이라 그런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기세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걷고 있는 이 좁은 골목길은 다닥다닥 붙은 집들과 높은 돌담장이 거센 바람을 1차로 막아주어 큰길보다는 한결 걷기가 낫다는 점이었다.
비옷을 칭칭 감은 채 빗물을 닦아내며 나는 문득 의문이 생겼다.
“대체 이 엄청난 바람은 어디서부터 불어오는 걸까?”
나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 힘겹게 눈을 뜨고 바람을 정면으로 받아내 보았다. 회색빛으로 희뿌옇게 흐려진 하늘 아래, 저 멀리 수내리의 앞산이 어슴푸레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건 그냥 바람이 아니야. 분명히 여우바람이야.”
입 안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리는데 문득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아주 어릴 적, 찌는 듯 무더운 한여름 밤이면 마당에 마당 멍석자리를 깔고 누워 할아버지에게 숱하게 들었던 전설이 있었다. 여우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백 년을 넘게 살면 영악한 조화를 부릴 수 있게 되고, 그때부터는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어떤 사람으로든 자유자재로 둔갑을 한다는 이야기였다.
요즘처럼 우주선이 화성으로 날아가는 최첨단 21세기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누군가는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황당한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분명히 수내리 안골에서 둔갑 여우를 직접 보았고, 그 여우로부터 나중에 가랑잎으로 변해 버린 돈뭉치를 받았다고 내 손을 꼭 잡으며 힘주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실 민우 형과 나는 그 ‘둔갑 여우’의 실체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얼마 전 수내리 안골에 들어가 군대의 비밀 작전처럼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계획을 벌였었다. 비록 닭고기를 섞은 조잡한 요리였지만 철판에 구워 냄새를 풍겼고, 결국 정체불명의 존재를 유인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원하는 완벽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 차분히 머리를 맞대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우리 앞에서 정신없이 쥐 고기를 뺏어 먹던 그 더럽고 헝클어진 원시인 차림의 존재는 조화를 부리는 둔갑 여우가 아님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저 산속에 숨어 사는 미치광이나 거지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만 남았다.
인터넷으로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토종 여우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에 흔하게 분포해 있었다고 한다. 여우의 평균 수명은 대략 5년 정도인데, 환경이 좋으면 10년까지 사는 여우도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시행한 ‘전국 쥐잡기 운동’이 화근이었다. 쥐를 무척 좋아하던 여우들이 사방에 널린 ‘약 먹은 쥐’를 무심코 잡아먹으면서 수많은 여우가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값비싼 모피 털을 얻으려는 밀렵꾼들이 남은 여우들마저 샅샅이 잡아들이면서 결국 이 땅에서 여우의 씨가 말라 버렸다. 지금은 국가에서 지정한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으로 분류되어 보호받고 있지만, 요즘 세상 어디에서도 여우를 실제로 목격했다는 뉴스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우가 어찌 백 년을 넘게 살 수 있으며, 아무리 신통한 조화를 부려 둔갑을 한다고 한들 수많은 사람의 눈과 첨단 카메라에 왜 단 한 번도 뜨이지 않는 걸까?
내가 이런 의문에 빠져 있을 때, 민우 형은 수내리 안골 작전이 실패로 끝난 지 딱 일주일째 되던 날 나를 조용히 불렀었다.
“정우야, 내 생각은 달라. 그날 우리가 만난 그 괴상한 존재는 여우가 아니라 사람이 분명해. 그리고 그게 사람이라면, 그 깊은 수내리 안골 어딘가에 반드시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나 흔적이 있을 거야. 우리 다시 가 보자.”
당연히 내 생각도 형과 똑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곧바로 2차 수내리 탐사 작전을 세웠었다. 이번에는 나뭇가지에 걸리지 않도록 군인들처럼 간결하고 꽉 조이는 옷을 맞춰 입었고, 할아버지가 생전에 둔갑 여우에겐 효과가 직빵이라고 가르쳐 주셨던 복숭아나무 작대기를 하나씩 손에 들고 산으로 향했었다.
2. 별천지 속의 비밀
당시 수내리 안골은 수십 년간 사람의 발길이 끊긴 탓에 제대로 된 길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모험심이 남달리 강했던 민우 형은 우리 몰래 혼자서 몇 번이나 수내리를 들락거리며 잡초 우거진 옛길을 더듬어 찾아내어, 자신만의 비밀 통로를 미리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헤헤, 정우야. 언젠가 너랑 이렇게 다시 수내리에 올 줄 알았어. 저기 작은 도랑이 나오는 곳까지인데, 내가 혼자서 낫으로 풀을 베고 돌을 치우면서 길을 아주 잘 만들어 놓았지? 나만 믿고 따라와.”
형은 자신이 길가 솔가지를 꺾어 꺾은 방향으로 표시를 해 둔 비밀 표식을 따라 망설임 없이 숲속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우거진 나무 터널을 지나며 내가 슬쩍 물었다.
“형, 근데 형은 여우를 만나기 전에도 왜 혼자서 이 험한 수내리 골짜기를 왔다 갔다 한 거야? 설마 혼자서 여우를 잡으려고?”
“아니야. 그때는 여우의 ‘여’ 자도 생각 안 했어. 난 그냥…… 사진을 찍으러 왔던 거야.”
“사진? 에이, 형이 무슨 사진이야.”
평소 예술이나 아름다운 풍경에는 전혀 취미가 없고 오직 과학 법칙과 미스터리에만 목각 인형처럼 반응하던 형이 ‘사진’을 찍으러 왔다고 하니, 나도 모르게 헛헛한 비웃음이 섞인 웃음이 튀어 나왔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것도 볼 것이 없고 그저 음침하고 울창한 나무와 기괴하게 커다란 풀들만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이 귀신 나올 것 같은 수내리에 사진을 찍으러 오다니,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내 눈빛에 담긴 비웃음을 눈치 빠른 민우 형이 모를 리 없었다. 형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정우야, 비웃지 마. 수내리 절터 바로 앞에는 아주 넓은 평평한 구릉지가 있거든? 근데 옛날에 마을 어른들이 하시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는데, 거기에 지금은 세상 어디에서도 이름을 알 수 없는, 국보급으로 예쁜 희귀한 꽃들이 엄청나게 많이 피어 있대.”
“참나, 백 년 묵은 여우가 무슨 아름다운 꽃밭에서 사나? 이렇게 음침한 골짜기에 웬 꽃이람.”
“나도 처음엔 안 믿었어. 하여간 직접 가서 확인해 보자고. 너도 막상 눈으로 보면 놀라 자빠질걸? 물론, 오늘은 저번에 우리가 만난 그 괴상한 사람이 진짜 둔갑 여우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지만 말이야.”
아주 오래전부터 수내리 골짜기에는 수많은 여우가 무리를 지어 살았었다고 한다. 이건 민우 형이 도서관과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찾아낸 진실이었다. 원래 토종 여우는 늑대나 호랑이와 달라서 사람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 아주 온순한 동물이었다. 옛날 기록을 보면 밭일을 하고 돌아오는 마을 사람의 뒤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재롱을 부리기도 했고, 그래서 시골의 어린아이들도 전혀 겁내지 않던 친근한 동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모피를 얻기 위해 잔인한 ‘여우 사냥’을 대대적으로 시작하면서 여우들이 인간을 극도로 무서워하고 난폭해졌으며, 결국 살아남기 위해 인간이 올 수 없는 아주 깊고 험한 수내리 안골 짜기 속으로 숨어들었다는 것. 이것은 우리 마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전설이 아닌 슬픈 사실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한참을 걸어가자, 마침내 형이 말한 비밀 길은 산속의 작은 도랑 앞에서 끝이 났다. 졸졸 흐르는 도랑 너머로는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수풀이 사방을 빽빽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만약 이 세상에 여우가 정말로 남아 있다면, 사냥꾼들의 눈을 피해 살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요새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휙—”
차가운 산바람이 골짜기를 따라 세차게 불어오자, 모로 쓰러지는 거대한 수풀 안쪽에서 “후다닥!” 하고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커다란 산개구리 수십 마리가 사방으로 튀어나오며 도랑 안으로 첨벙첨벙 뛰어들고 있었다.
비록 볕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한낮이었지만, 깊은 골짜기가 주는 특유의 압도감 때문인지 내 어깨 위에 묵직한 무게감이 실리며 등줄기에 으스스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바로 이 도랑을 건너기 직전의 산비탈이 예전에 우리가 여우를 부르겠답시고 쥐 고기를 구웠던 장소였다.
개구리들이 무더기로 튀어나온 억새풀 우거진 저 숲 안쪽은, 그야말로 우리에게는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였다.
성큼성큼 앞장서 걷던 민우 형의 발걸음에도 전과 달리 눈에 띄게 조심성이 배어 있었다. 아무리 세상 무서운 것 하나 없다는 질풍노도의 중학교 2학년이라 할지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존재와 여우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은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수풀을 헤치고 도랑을 건너 몇 걸음 나아갔을 때였다. 앞서가던 형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서며 가느다란 탄성을 질렀다.
“와……! 정우야, 이것 좀 봐. 여기 진짜 별천지다, 별천지.”
과연 형이 환성을 지를 만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숨 막히도록 빽빽하던 거대한 억새풀 장막을 지나자, 거짓말처럼 넓고 평평한 구릉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구릉지가 끝나는 깊은 산기슭 밑으로, 난생처음 보는 온갖 기이하고 화려한 색색의 꽃들이 넓은 카펫처럼 끝없이 피어 있었다. 지독하게 음산한 골짜기 안에 이런 아름다운 비밀 정원이 숨겨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형…… 저기 좀 봐. 저기가 바로 그 전설의 절터인가 봐.”
꽃밭 너머로 오랫동안 버려진 것이 틀림없는 3층 돌탑이 보였다. 세월의 풍파를 맞아 이끼가 누렇게 끼어 빛바랜 돌탑 뒤쪽으로, 형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절의 본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전에 무너졌는지 지붕은 형편없이 헐어 있었고, 한쪽 벽체마저도 커다란 구멍이 휑하니 뚫려 있었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상당히 컸을 법한 절의 규모가 묘한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나는 넋을 잃고 옛 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절에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에도, 호기심에 눈이 먼 민우 형은 조금씩, 조금씩 꽃밭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민우 형이 찢어지는 듯한 고함을 지르며 내 쪽을 향해 휙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형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앗! 정우야, 위험해! 빨리 도망쳐! 벌이야, 벌떼라고!”
“어? 벌?”
형은 내 다급하게 내 손을 맞잡아 끌며 무조건 아래쪽으로 달렸다. 형의 등 뒤를 바라본 나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허물어진 절 벽체의 구멍 속에서, 주먹만 한 새카만 말벌 떼들이 수천, 수만 마리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먹구름을 형성하며 우리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우와악!”
겁에 질려 정신없이 도망치던 나는, 그만 바닥에 튀어나온 굵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앞으로 보기 좋게 고꾸라지고 말았다.
“우아아! 형! 형, 나 좀 살려 줘!”
사정없이 귓가로 다가오는 벌떼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나는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몸을 공처럼 동그랗게 웅크린 채 바짝 엎드렸다. 귀청을 찢을 듯이 울려 퍼지는 수만 마리 벌들의 “윙— 윙—” 거리는 위협적인 비행 소리에,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 정도로 내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갔다. 이제 온몸이 벌에 쏘여 죽는구나 싶어 눈물이 핑 돌았다.
바로 그때, 앞에서 도망치던 민우 형이 전력으로 되돌아오더니 내 몸 위를 자신의 온몸으로 덮치며 엎드렸다. 그리고 내 귀에 대고 쥐어짜듯 큰 소리로 질렀다.
“정우야! 땅에 얼굴을 완전히 박고 절대 꼼짝도 하지 마! 움직이면 죽어!”
잠시 후, 툭 툭 하며 무언가 내 등과 머리를 때리는 섬뜩한 충격이 느껴졌다. 내 뒤통수가 불이라도 난 것처럼 화끈거리고 아파 왔다. 말벌에게 쏘인 것이 분명했다. 머릿속이 공포로 하얗게 타들어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민우 형은 도대체 자신은 어쩌려고 겁도 없이 내 위를 온몸으로 덮어 준 걸까? 형이 나 대신 벌에 다 쏘이면 어떡하지?’
엄청나게 복잡하고 두려운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가며 몸서리를 치고 있는데, 내 몸을 꼭 누르고 있던 민우 형이 이윽고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휴우…… 됐어. 정우야, 이제 벌들 다 갔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일어나 봐.”
3. 벌의 색맹과 검은 옷의 비밀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정말 귀신곡할 노릇이었다. 그 많던 새카만 말벌 떼들이 거짓말처럼 허공으로 흩어져 저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도무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뒤통수와 귀 근처를 두어 곳 벌에 쏘여 욱신거리는 통증이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내 위를 맨몸으로 다 받아내며 덮어 주었던 민우 형은 단 한 방도 벌에 쏘이지 않은 채 멀쩡한 상태였다. 어째서 그 사나운 말벌 떼들이 나만 몇 대 쏘고, 더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던 형은 한 방도 쏘지 않고 달아나다시피 급히 사라져 버린 걸까?
당시에 형은 내 의아한 눈빛을 보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평소 혼자 생각하고 혼자 추리해서 답을 내리길 좋아하는 내 고집스러운 성미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스스로 답을 찾아보라는 뜻으로 침묵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우리는 그날 둔갑 여우의 흔적은커녕, 머리통에 커다란 혹만 내리 달고서 또다시 빈손으로 털덜거리며 수내리를 돌아 나와야 했었다.
과거의 생각에서 깨어난 나는 세차게 흔들리는 창밖을 보았다. 저 멀리 비바람에 씻겨 내리는 수내리의 뒷산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대한 태양광 발전소 패널들이 설치되어 흉물스럽게 변해 버린 앞산의 풍경과는 완전히 별개의 산이었다. 다행히 바람의 방향 때문인지 비도 바람도 수내리 뒷산 쪽은 상대적으로 조금 약해 보였다.
내가 가려는 민우 형이 살고 있는 큰집은 수내리 앞쪽 골목과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고, 오히려 그 수내리 뒷산의 초입과 아주 가깝게 위치해 있었다. 그 지형적인 덕분인지, 폭우를 뚫고 전진하는 발걸음이 생각보다 아주 많이 버겁지는 않았다. 마침내 거센 바람을 뚫고 형의 집 대문 앞에 당도했다.
“형! 형, 나야, 정우! 문 좀 열어 봐, 빨리!”
큰집 현관문 앞에 바짝 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무서운 회오리바람이 내 등 뒤로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내가 굳이 주먹으로 문을 세게 두드리지 않아도, 미친 듯이 몰아치는 바람이 대신 현관문을 쾅쾅쾅 두들겨 대고 있었다.
오늘 같은 대낮 정전 난리통이라면 큰아빠와 큰엄마는 틀림없이 마을 대책 회의가 열리는 회관으로 가고 집에 없으실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양동이로 들이붓는 비를 맞으며 굳이 밖으로 돌아다닐 민우 형도 아니었다. 분명히 집 안에 있을 텐데, 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목청이 터져라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민우 형—! 안에 없어? 정우라니까!”
그러자 갑자기 현관문이 “휙—” 하고 안쪽으로 사정없이 열렸다.
“으아악!”
문을 열고 나온 형체의 모습에 나는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시뻘건 핏물이 머리와 온몸에 가득 흩뿌려져 있는 듯한 착각에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공포심에 다리가 풀려 몸이 옆으로 비틀거리며 넘어갔다. 나는 넘어지려는 몸을 간신히 현관 벽면에 기대며, 두 눈을 다시 세차게 비비고 부릅떴다.
“헤헤, 정우 너 놀라긴? 어서 와라, 기다리고 있었다.”
빨간색 커다란 천으로 온몸을 미라처럼 꽁꽁 휘감은 민우 형이 불쑥 손을 내밀어 내 팔을 붙잡아 끌었다.
“뭐야? 아휴, 형! 난 또 진짜 수내리 둔갑 여우가 나타난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근데 복장이 그게 또 왜 그래? 지금 집에서 혼자 슈퍼맨으로 변신하는 중이었어?”
이 무시무시한 와중에도 형의 해괴한 몰골을 보니 피식 농담이 튀어 나왔다. 형은 늘 평범한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엉뚱한 짓을 자주 벌였기 때문이다. 형은 나를 집 안으로 거칠게 잡아끌며 문을 걸어 잠갔다.
“농담할 시간 없어, 임마. 빨리 들어와서 옷부터 벗어. 다 이야기해 줄 테니까. 너…… 보나 마나 주으니 때문에 여기까지 태풍 뚫고 날아온 거지?”
형의 날카로운 질문에 순간 소름이 돋으며 머리카락이 바짝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형은 내 속에 들어왔다 나간 것처럼 내 목적을 이렇게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걸까?
밖에는 여전히 바람이 윙윙 울어댔고, 비는 폭포수를 연상케 할 만큼 열렬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거실 벽에 걸린 낡은 괘종시계가 마침 오전 10시를 알리는 종을 날카롭게 열 번 두드렸다.
문득 시계를 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 형네 큰집까지는 평소 걸음으로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딱 10분이면 당도하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내가 집에서 출발할 때 이장님 방송을 들은 게 분명 9시 정각이었는데, 아무리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앞이 안 보였다고 해도 가는데 무려 한 시간이나 걸렸다니, 시공간이 뒤틀린 것처럼 기이한 일이었다.
“근데 형, 방바닥에 널려 있는 이 거지 발싸개 같은 천 조각들은 다 뭐야? 형 지금 여기서 무슨 귀신 놀이나 무당 굿이라도 준비하고 있었어?”
거실 방바닥을 보니 붉은색 천과 푸른색 천, 그리고 검은색 천들이 가득 어지럽혀져 있었다. 평소 칼같이 깔끔하고 정리 정돈을 중요시하던 민우 형의 방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는 난장판이었다. 하지만 나는 직감했다. 뜻이 다 있겠지.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기발한 일을 저지르기 좋아하는 민우 형이었고, 나는 형의 그런 천재적인 면을 무척 좋아했다.
“정우야,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너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하지? 주으니 찾으러 가려고 여기 온 거 맞지?”
“엇…… 형이 그걸 어찌 알았어? 내가 집에서 으니 실종 방송 듣고 으니 찾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한 걸?”
“지금 밖을 봐라.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비가 퍼붓고 전기도 다 나갔잖아. 그런 상황에서 네가 이 미친 바람을 뚫고 내 방까지 찾아올 이유가, 그 으니 일이 아니면 대체 왜 있겠냐? 네 머릿속엔 온통 수내리랑 으니 생각뿐일 테니까.”
민우 형은 역시 동네 최고의 만물박사이자 명탐정이었다. 모험심도 강하지만 상황을 종합하는 추리력과 통찰력의 질이 제법 좋아서 언제나 나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거실 바닥에 똬리를 튼 귀신 옷 같은 저 형형색색의 천 조각들도, 분명히 사라진 주으니와 어떤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정우야,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너 그때 수내리 안골 꽃밭에서, 그 사나운 말벌 떼가 왜 우리를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그냥 윙 하고 순순히 돌아갔는지 아직도 모르지?”
내가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드디어 형이 스스로 그 비밀을 밝힐 모양이었다. 나는 엉덩이를 바닥에 붙인 채 앉은걸음으로 형에게 바짝 다가갔다.
“어, 진짜 궁금했어. 형은 한 방도 안 쏘이고 나만 두 대 쏘였잖아. 왜 그랬던 거야?”
“크큭, 과학의 힘이지. 너 ‘벌이 색맹’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
“뭐? 벌이 색맹이라고? 그게 뭔 소리야? 벌들이 꽃을 찾아다니는데 색맹이라니? 그렇다면 들판에 피어 있는 저 빨갛고 노랗고 예쁜 색깔의 꽃들은 대체 왜 존재하는 건데?”
내 반박에 형은 짐짓 어른스러운 얼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확실히 알고 있는 과학 지식을, 남에게 뽐내며 설명할 때 나오는 특유의 잘난 척하는 표정이었다.
“내 말 잘 들어봐. 형이 지난달에 ‘사이언스’라는 유명한 과학 잡지에서 아주 흥미로운 논문을 읽었거든. 곤충 중에서 특히 벌은 심각한 색맹이라서, 오직 ‘파란색’과 ‘검은색’ 두 가지밖에 볼 수 없다는 거야.”
“벌이 색맹이라고? 그러면 세상 꽃들이 다 파랗거나 검은색이어야 하잖아. 가만…… 어? 형, 근데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꽃 중에 진짜 파란 꽃이나 검은색 꽃은 거의 없는 것 같은데?”
“딩동댕! 바로 그 점이 핵심이야. 벌이 인식할 수 있는 색은 파란색 계열뿐인데, 꽃들이 피워내는 빨간색, 하얀색, 노란색, 보라색 같은 화려한 색상들이 신기하게도 벌들의 특수한 눈에는 전부 ‘파란색 가시광선’으로 변환되어 보인다는 거지! 그래서 꽃들은 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일부러 그런 색을 피우는 거야. 반대로 진짜 파란색 꽃은 벌의 눈에 오히려 어두운 ‘검은색’으로 보인다는 게 참 웃기지 않냐?”
“어…… 그럼 검은색은 벌한테 어떻게 보이는데?”
“검은색은 벌들에게 아주 공포의 색이야. 숲속에서 벌집을 털어먹는 가장 무서운 천적, 즉 ‘곰’이나 ‘오소리’ 같은 맹수들의 털빛이 전부 검은색이잖아? 그래서 벌들은 유전적으로 검은색을 보면 천적이 나타난 줄 알고 본능적으로 극도의 공포를 느끼며 피해 다닌다는 거지.”
“앗! 아하!”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비로소 그날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럼 그때 검은색 바람막이 옷을 입고 있던 형을 보고 벌들이 곰인 줄 착각해서 도망을 간 거야?”
“오, 정우 너 추리 하나는 지독히도 빠르구나! 맞아. 너는 그때 하필 벌들이 가장 자극받기 쉬운 밝은 주황색 옷을 입고 있었잖아. 그래서 벌들이 너한테 마구 달려들었던 거고, 내가 눈치를 채고 내 검은색 옷으로 네 주황색 몸을 통째로 덮어버린 거지. 벌들은 내 옷의 까만색을 보고 거대한 곰이 나타난 줄 착각해서 공격하려다, 우리가 죽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으니 겁을 먹고 그냥 무더기로 철수해 버린 거야.”
벌이 색맹이어서 오직 파란색과 검은색밖에 구별을 못 하고, 검은색은 천적인 곰으로 인식해 피해 다닌다니. 형에게서 처음으로 듣는 놀라운 과학 이야기였다. 어찌 들으면 진짜 사실인 것 같기도 하지만, 평소 워낙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지어내길 좋아하는 형의 뻥쟁이 성품으로 보아 완전히 100% 믿기에는 살짝 의심스러운 확률도 있었다.
어쨌든 지난날의 뼈아픈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형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빗물에 젖은 비옷을 벗고 형이 건네준 두꺼운 검은색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이제 으니를 찾으러 다시 그 무시무시한 수내리 안골로 들어가려면, 형의 지시에 무조건 토를 달지 말고 복종해야만 했다.
4. 버스 정류장의 단서
내가 옷을 다 갈아입자, 민우 형은 창가로 다가가 빗물이 흘러내리는 유리창 너머를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오늘 아침에 이장님의 긴급 방송을 듣자마자 딱 직감이 오더라고. 주으니가 만약 다른 아이들처럼 읍내로 도망치듯 나간 거라면 반드시 마을 버스를 탔을 텐데, 정우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 거실 창밖으로 저기 마을 버스 정류장이 훤히 내려다보이잖니. 정말 우연이지만, 오늘 아침 6시 첫 차가 왔을 때 내가 마침 창밖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거든?”
우리 마을의 가장 끄트머리인 형네 집 앞에는 커다란 빈터가 있었고, 하루에 몇 번 오지 않는 시내버스는 언제나 여기서 차를 크게 한 바퀴 돌려 나갔다. 호기심 많은 민우 형은 새벽부터 창밖으로 멀리 수내리 산자락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있었을 것이 뻔했다. 으니가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으로 왔다면 큰집 앞길을 무조건 지나야 하니, 형의 매서운 눈에 뜨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근데 버스에는 누가 탔는데?”
“읍내에서 조그만 야채 장사하시는 창식이 아저씨하고, 일찍 일 나가시는 동네 어른들 몇 사람만 탔지, 주으니나 그 비슷하게 생긴 어린아이의 모습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어. 으니는 버스를 타지 않은 거야.”
“형, 주으니는 평소에 돈을 지독히도 안 쓰고 아끼는 아이잖아. 교통비 아끼려고 그 이른 새벽에 읍내까지 그냥 걸어갔을 수도 있잖아.”
내 반박에 형은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그게 아니라는 확실한 두 가지 이유가 있어. 첫째, 으니가 이 난리통에 읍내로 나가려는 유일한 이유는 요양원에 계신 할아버지를 뵈러 가는 거잖아. 으니는 평소 지독한 효녀니까. 그럼 당연히 요양원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시는 ‘어떤 물건’이나 수내리의 특산 꽃을 품에 챙겨서 가야 하는데, 아침에 으니네 집 앞을 지나온 아주머니 말로는 으니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대. 둘째 이유는, 아무리 으니가 산골에서 자라 거친 생활에 익숙한 강한 아이라 해도, 이 엄청난 폭우와 태풍급 바람을 맨몸으로 다 맞아가며 읍내까지 평지 길을 1시간 넘게 걸어갈 수는 없어. 혹시 진짜 걸어갔다 하더라도, 새벽 길을 가던 마을 사람들의 눈에 무조건 한 번은 목격되었어야 정상인데 아무도 본 사람이 없잖아.”
“그럼…… 수내리 안골로 갔다는 거야? 수내리 가는 산길은 읍내 가는 큰길보다 백 배는 더 험하고 무서운데 거길 그 새벽에 으니 혼자 가다니, 그건 더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하하! 정우 너도 이제 제법 나랑 같이 다니더니 추리력이 많이 좋아졌구나? 내가 아직 수내리라는 단어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단번에 알아맞히다니 말이야. 하지만 정우야, 탐정은 항상 앞만 보면 안 돼. 가끔은 아무도 보지 않는 ‘뒤’를 돌아볼 줄 알아야지.”
민우 형은 세찬 비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고 있는 수내리의 앞산 쪽이 아니라, 검은 구름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웅장하게 흘러가고 있는 수내리 ‘뒷산’의 능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어. 작년 말부터 나라에서 수내리 뒷산에 대규모 태양광 발전소를 짓는다고 난리를 쳤잖아? 그때 커다란 굴착기랑 대형 트럭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나라에서 수내리 뒷산 쪽으로 아주 넓고 평평하게 포장된 ‘공사 차량 전용 도로’를 새로 닦아 놓았어. 우리 집이 마을 끝머리에 있으니까 대형 트럭들이 먼지 풀풀 풍기며 뒷산 길로 올라가는 걸 난 매일 똑똑히 보고 알고 있었던 거지. 신기하게도 그 뒷산의 공사 도로는 산의 거대한 지형이 바람막이 역할을 해 줘서, 앞산과 달리 의외로 비바람의 영향이 적고 조용한 편이야. 주으니는 분명히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저 뒷산 공사 길을 통해서 아무도 모르게 수내리 안골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을 거야. 그 길로만 가면 이 정도 태풍에는 끄떡없거든.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안골 안에서 으니가 크게 다칠 수도 있으니 어서 떠나자!”
5. 결속된 두 소년
민우 형은 내가 오늘 자신을 찾아올 줄 미리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내 체격에 딱 맞는 여분의 검은색 등산용 옷과 장비들을 방 한구석에 완벽하게 준비해 놓고 있었다. 산길을 탈 때는 거추장스럽고 바람에 날리는 비옷보다는 땀 배출이 잘되고 몸에 착 달라붙는 기능성 운동 땀복이 훨씬 유리하다며, 형 본인도 이미 새카만 땀복으로 무장을 마친 상태였다.
형은 거실에 놓인 작은 배낭 안에 비상용 휴대전화와 날카로운 만능 맥가이버 칼, 그리고 튼튼한 노끈 세 뭉치까지 꼼꼼하게 챙겨 넣었다. 그 모습이 흡사 전문 119 산악구조대가 무색하리만큼 완벽에 가깝도록 치밀해 보였다. 배낭을 메는 형의 모습을 보며 내가 슬쩍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
“형, 근데 으니가 정말 형 말대로 저 무시무시한 수내리 안골 안에 고립되어 있는 거라면, 우리가 갈 게 아니라 마을 어른들이나 이장님께 먼저 알려야 하는 거 아냐? 아니면 지금 당장 구조대에 신고를 하든지.”
내가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세찬 비바람이 우리 얼굴을 향해 무섭게 달려들었다. 민우 형은 내 팔을 강하게 잡아당겨, 버스 정류장 옆에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의 거대한 기둥 뒤로 잠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단호하고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우야, 목적지에 완전히 도착하기 전까지는 절대 딴소리하지 마. 지금 마을 어른들께 말해 봤자 내 말을 믿어 주지도 않을뿐더러, 장황하게 설명하고 답을 들으려다 보면 우리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고 정신 고갈만 일어날 뿐이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 산 뒤쪽 길은 지형 때문에 비바람이 거의 없어. 우리 수준의 장비와 체력으로도 충분히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단 말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수내리에 숨겨진 그 백 년 묵은 여우와 꽃밭의 비밀은 우리 스스로 캐내기로 지난번에 피로 약속했잖아, 벌써 잊었어? 아직 확실한 증거도 없는 내 추측만 듣고 이 태풍 속에 산으로 가 줄 마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내 말은 이상 끝이다.”
말을 마친 민우 형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려는 듯, 배낭에서 굵은 노끈을 꺼내 내 허리와 자신의 허리를 대략 2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아주 단단하게 하나로 묶었다. 산에서 한 사람이 미끄러지더라도 다른 사람이 지탱해 주기 위한 조치였다.
정말 혀를 내두를 만큼 완벽한 모험의 준비물들을, 형은 꽤 오래전부터 하나씩 모아두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형은 주으니라는 아이의 미스터리한 출생의 비밀이나 으니의 진짜 정체에 대해서도, 이미 마음속으로 어느 정도 명확한 짐작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군대의 냉철한 지휘관처럼 위엄 있게 명령을 내리는 민우 형의 당당한 태도 앞에서는, 나 역시 더 이상 어떠한 토도 달 수가 없었다. 확신에 가득 찬 형의 저 묵직한 말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조건 복종하고 따르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백 년 묵은 둔갑 여우가 득실거리는, 우리에게는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는 수내리 안골을 향해, 민우 형과 나는 용기 있는 발자국을 진흙탕 속에 깊게 찍으며 마침내 거친 폭우 속으로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2편 끝]
7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