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Re: 시들지 않는 꽃. 제미나이 전체

작성자하얀나무|작성시간26.06.13|조회수0 목록 댓글 0

시들지 않는 꽃

1장: 양동이로 들이붓는 비, 그리고 이장의 방송

무지하게 내린다는 말이 딱 맞았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그냥 하늘에서 스르륵 흘러내리는 수준이 아니었다. 누군가 하늘 위에서 커다란 양동이로 지상에 대고 마구 들이붓는 듯한 기세였다.

기상청 예보에는 분명 비가 오후부터 올 것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아침부터 들이치는 이 비는 정말 생각 밖이었다. 게다가 바람은 또 왜 이리 거센지, 창문이 들썩일 때마다 태풍이 몰려오는 듯한 무시무시한 소리가 온 집안을 울렸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수내리 마을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지이익, 찌리릿.

거실 벽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거친 잡음이 흘러나오더니, 이내 낯익은 목소리가 섞여 나왔다. 수내리 이장님의 목소리였다. 동네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목소리엔 평소와 달리 다급함이 뚝뚝 묻어났다.

“아아. 주민 여러분, 이장입니다. 지금 시간은 아침 9시인데…… 고할 말씀이 있어서 방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새벽 6시에 읍내에 간다며 집을 나선 주으니가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고 합니다. 혹시 길에서 으니를 본 사람이 있으면 즉시 이장이나 으니네 집으로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비가 너무 많이 오니까 하우스에 빗물이 쏠리지 않도록 다들…….”

“크르릉! 콰쾅!”

난데없는 천둥소리가 하필 그 순간 귀청을 찢을 듯 격하게 내리쳤다.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로 번쩍하는 불빛이 거실 창을 하얗게 물들이더니, 이내 이장님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툭.

방안의 전등이 일시에 모두 꺼졌다. 책상 위에 켜져 있던 컴퓨터의 전원도 픽 소리를 내며 나갔다. 불길한 예감에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지만, 액정 상단에는 '서비스 불통'을 알리는 표시만 깜빡거릴 뿐 먹통이었다. 나는 황급히 의자를 밀치고 거실로 나갔다.

“엄마! 불 다 나갔어! 내 핸드폰도 안 돼!”

거실 창가에는 엄마가 노란 비옷을 양손에 들고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창문틀 사이로 빗물이 사정없이 들이쳤다. 창문 밖은 온통 연기라도 피어오른 것처럼 뿌연 빗줄기로 가득 차 있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한숨을 깊게 내쉬며 말했다.

“전봇대가 넘어갔어. 분명해. 정우야, 이 일을 어쩌면 좋냐? 전화도 불통인데 그 어린 으니는 이 장대비 속에 어디로 갔단 말이냐?”

엄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창문에 이마를 대고 밖을 내다보려 애쓰며 말했다.

“아까 천둥 번개 칠 때 전선이 끊겼나 봐. 근데 이장님 방송 들어보니까 으니 새벽에 나갔다는데, 버스 끊긴 거 아냐?”

엄마는 혀를 쯧쯧 차며 창밖의 산자락을 가리켰다.

“태양광 때문이야. 저 뒷산에 세워둔 패널인가 뭔가 하는 그것들이 날아다니더니 고압선 줄을 끊어 먹은 게 분명해. 통신 전봇대까지 같이 덮친 모양이다.”

엄마의 말에 나는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했다. 원래 분위기가 무거울수록 딴청을 피우는 게 내 특기였다.

“엄마. 언제는 나라가 잘되려면 자연 친화적인 태양광이나 풍차 발전소 같은 걸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환영한다더니만? 왜 이제 와서 태양광 탓을 해?”

엄마는 정말 그랬었다. 정부에서 지원금 준다고 동네 사람들이 태양광 설치할 때, 환경도 살리고 돈도 버는 일이라며 적극 찬성했던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우리 엄마였다. 내 짓궂은 질문이 엄마의 성질을 제대로 돋우었나 보다. 엄마는 눈썹을 잔뜩 찡그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얘가 지금 농담할 때야? 무엇이나 다 자기 자리가 있는 법이야! 있어야 할 자리를 무시하고, 저 험한 산비탈을 깎아내고 아무 데나 태양광을 세워대니까 저 난리가 나잖아. 나무를 다 베어버렸으니 비가 조금만 와도 흙이 다 쓸려 내려가지!”

“하긴, 저번에 보니까 뒷산 깎아놓은 데 엄청 위태위태해 보이긴 하더라. 그럼 지금 수내리 안골 쪽은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겠네?”

내 말에 엄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수내리 이야기하니까 백년 묵은 여우가 또 생각나니?”

“어디 여우만 생각나나? 안골 깊은 숲에는 오소리도 살고, 담비도 있고, 고라니도 살잖아. 아, 맞다! 대왕 말벌이랑 땡벌 집도 엄청 많은데, 걔네 다 비에 쓸려 내려왔으면 어떡해?”

“정우야! 너는 이 판국에도 그런 농담이 나와? 동네 애가 사라졌다는데 걱정도 안 돼? 잔말 말고 방에 들어가 공부나 하시지!”

엄마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나는 슬그머니 엄마 눈치를 보며 화제를 돌렸다.

“엄마, 근데 비는 분명히 오후부터 온다고 했잖아. 왜 아침부터 기습적으로 이러는 건데?”

“그게 다 이상기후 탓이지, 뭐겠냐. 여름도 아닌데 태풍 같은 바람이 불어대니…… 그나저나 으니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정우 너, 혹시 으니에 대해 뭐 집히는 거 없어? 같은 반이잖아.”

엄마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아는 대로 읊조렸다.

“으니에 대해 아는 거? 음…… 으니는 엄마랑 둘이 살고, 읍내에 큰집이 있고, 할아버지가 요양원에 계시다는 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는 내 말을 뚝 끊고 입을 삐죽였다.

“그만해라, 응? 그 정도는 옆집 똥개도 다 알고 있겠다. 내가 괜한 걸 물었지.”

엄마는 한숨을 쉬며 노란 비옷을 몸에 걸쳤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며 잊지 않고 한소리를 덧붙였다.

“정우야, 엄마 마을회관에 가본다. 이장님하고 동네 사람들이 수색대 짠다고 하니까 무슨 소식 있는지 보고 올게. 너 절대 어디 갈 생각 말고 집에서 공부나 좀 해라. 알았지?”

“어, 알았어. 잘 다녀와.”

내 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관문이 쾅 하고 닫혔다. 아빠는 새벽같이 하우스 상태를 보러 나갔으니, 이제 넓고 어둑한 집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거실을 혼자 서성거리며 으니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주으니. 엄마 말대로 동네 개들도 다 아는 그 사실이, 내가 으니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전학 온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으니는 늘 비밀의 화원 속에 사는 아이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으니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왜 이 비바람 속에 소식도 없이 사라진 거야?”

어둑해진 거실을 혼자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별별 이상한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걱정과 호기심이 뒤섞인 채 으니의 얼굴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혼자서는 도저히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어쩌지? 민우 형이라면 정답을 알고 있을까?”

나보다 백 배는 더 호기심이 많고 탐정 흉내 내기를 좋아하는 사촌 형, 민우 형이 떠올랐다. 형은 중학교 2학년인데도 모르는 것이 없었다. 가끔 보면 대학생이나 알 법한 어려운 과학 지식이나 동네 역사까지 다 꾀고 있었다.

“그래, 형한테 물어보자!”

나는 후다닥, 뛰다시피 내 방으로 건너가 책상 위에 던져두었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단축번호 1번을 누르려던 순간, 액정에 떠 있는 ‘서비스 불통’ 글자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맞아, 통신 불통이지. 아휴, 바보.”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돌개바람이 수내리 뒷산의 태양광 패널을 모조리 뽑아서 들녘에 내동댕이쳤고, 그 탓에 통신 전봇대까지 넘어갔으니 유선이든 무선이든 외부와 소통할 방법이 완전히 차단된 것이다. 민우 형에게 연락하려면 직접 가는 수밖에 없었다.

민우 형의 집은 마을이 끝나는 제일 마지막 자락, 산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큰길로 가면 비바람을 정면으로 맞아야 하겠지만, 골목길로 요리조리 피해 가면 바람은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곧바로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나는 다용도실로 가서 아빠가 하우스 일을 할 때 입는 커다란 성인용 비옷을 꺼내 입었다. 내 몸집보다 너무 커서 옷자락이 질질 끌렸다. 바람에 날아갈까 봐 걱정이 되어, 창고에서 노끈을 가져와 팔뚝과 허리 부분을 꽁꽁 묶었다.

거울 앞에 서서 내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외계인이나 우주비행사 같았다.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거울 앞을 비켜섰다.

“외계인…… 그래, 어쩌면 으니는 수내리에 숨어든 외계인일지도 몰라. 민우 형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거야.”

내 엉뚱한 상상은 자연스럽게 붉은 노을에 휩싸여 그늘마저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던 수내리 안골의 첫 만남으로 이어졌다. 거기서 나는 주으니를, 아니 주으니로 위장한 기괴한 존재를 처음 만났었다.

2장: 둔갑여우를 찾아서, 증조할아버지의 전설

“형, 제발 그만 가자.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이야기를 우리가 너무 사실로 받아들인 거 같아. 내가 잘못 생각했어. 지금이 21세기인데 무슨 백년 먹은 여우가 살고 둔갑을 하냐?”

그날은 유독 해가 빨리 지던 가을날이었다. 무엇이든 한 번 기획한 모험에는 반드시 눈에 보이는 결과를 얻어야 직성이 풀리는 민우 형은, 수내리 안골 골짜기 깊숙한 곳으로 나를 자꾸만 끌고 들어갔다. 형은 자신의 위험천만한 계획에 언제나 군말 없이 동참하는 나를 조수처럼 부려 먹었다.

수내리 안골에는 신라 시대에 세워진 아주 오래된 절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골 골짜기의 기운이 워낙 드세고 음침해서 스님들이 버티지 못했고, 결국 절은 폐허가 되어 지금은 무너진 돌탑과 흔적만 겨우 남아 있었다. 이번 모험은 사실 내가 먼저 수내리 안골에 가보자며 형을 꼬드긴 것이 원인이었다. 동네 어른들이 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어두워지니 겁이 나 미칠 지경이었다.

“야, 김정우! 너 5학년이나 됐으면서 남자 녀석이 왜 이렇게 겁이 많냐? 끄나풀이라도 건져야지, 우리가 며칠 동안 고생한 게 아깝지도 않아? 그냥 가잔 말이 나와?”

민우 형이 복숭아나무 작대기로 풀숲을 헤치며 핀잔을 주었다.

“골이 깊어서 어둠이 금방 내릴 거란 말이야. 진짜 동네 어른들 말대로 구미호나 둔갑여우가 나타나면 우릴 홀려서 간이라도 빼 먹으면 어떡해?”

“푸히히! 정우 너 진짜 겁쟁이구나? 여우를 잡으러 와놓고 여우를 무서워하다니, 앞뒤가 안 맞잖아!”

형이 배를 잡고 웃어대던 바로 그때였다.

부스럭, 바스락!

절터 뒤쪽에 우거진 숲과 풀총이 심하게 흔들리더니, 알 수 없는 거대한 물체가 내 키보다 더 크게 자란 억새풀을 헤치며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형…… 형! 저기, 저기 봐! 저거 뭐야!”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민우 형의 옷자락을 붙잡고 형을 내 앞패로 방패처럼 세웠다. 억새풀의 거친 흔들림이 뚝 멈췄다. 그리고 머리가 마구 헝클어지고 너덜너덜한 누더기 옷을 입은, 사람인지 귀신인지 도무지 구별할 수 없는 기괴한 형체가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둔갑한 여우가 드디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라 확신했다. 민우 형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어…… 어서 오세요! 고기는 많습니다! 얼마치 드릴까요?”

수내리 절터 한복판에서 형과 나는 아주 특별한 요리를 하고 있었다. 동네 어른들 말로 여우는 쥐 고기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며칠 동안 쥐틀을 놓아 겨우 잡은 쥐 세 마리를 철판 위에 굽고 있었다. 오전부터 오후 내내 기름을 듬뿍 쳐가며 타는 냄새를 피웠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다가 해가 질 무렵에야 겨우 반응이 온 것이었다.

수내리 안골은 원래 수상한 기운이 돌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수십 년이 흘렀고, 나무꾼조차 찾지 않아 나무와 풀들이 딴 세상처럼 비정상적으로 크게 자랐다. 오래전부터 이곳에는 사람을 홀리는 백년 묵은 여우가 산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실제로 여우에게 홀려 정신을 잃었다가 며칠 만에 발견됐다는 동네 사람도 있어서, 누구도 이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않았다. 괴괴한 소문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수내리 쪽은 쳐다보지도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아주 별난 분이셨다. 모험을 무척 좋아하셨고, 남들이 무섭다고 하는 험한 일만 골라서 하시는 성격이었다. 사촌 민우 형이 딱 그 피를 이어받은 게 분명했다. 증조할아버지는 생전에 전설 속의 여우를 직접 확인하겠다며 혼자 수내리 안골로 들어가셨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처럼 절터에서 쥐 고기를 구우셨다. 여우를 잡아서 잘만 하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위험한 생각을 실천에 옮기신 것이다.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고기를 굽고 두어 시간쯤 지나 냄새가 골짜기에 가득 차자, 집도 절도 없는 그 깊은 숲속에서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났다고 했다. 잘 차려입은 신사도 오고, 허름한 옷차림의 농부도 오고, 화려한 파라솔을 든 아줌마도 오고. 그들은 할아버지가 구운 고기를 사면서 고깃값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보따리를 툭툭 던져주고 갔단다. 그 돈이 얼마나 많은지 바지게에 가득 담고도 넘칠 정도였다고 하셨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신이 나가지고 마당에다 그 돈을 촤르륵 쏟았는데, 아 글쎄! 그게 전부 누런 가랑잎으로 변해버린 거란다. 백년 먹은 여우가 조화를 부려 할아버지를 홀린 거지.”

할아버지는 생전에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며 혀를 내두르셨다. 쥐 고기를 사러 왔던 손님들은 전부 사람으로 둔갑한 여우들이었고, 가랑잎을 돈으로 보이게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진짜 돈을 주고 간 여우가 몇 마리 있었는지, 할아버지는 그 돈으로 논 두 마지기를 사고도 남았다고 하셨다.

동네 사람들은 허풍이라며 믿지 않았지만, 나는 할아버지의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할아버지가 그 뒤로 두 번 다시 수내리 안골에 가지 않으신 것도 증거였다. 할아버지는 쥐가 모자라서 나중에는 닭고기를 대충 썰어 질긴 쥐 고기처럼 속여 파셨는데, 쥐 고기가 아니라 닭고기라는 걸 알게 된 여우들이 할아버지가 다시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을 거라고 하셨다. 수내리에 발을 들이는 순간 여우들에게 큰 해코지를 당할까 봐 무서워서 못 가신다며 허허 웃으시던 모습이 선했다.

민우 형과 나는 바로 그 증조할아버지의 모험을 재현해보기로 한 것이었다. 우선 쥐를 잡으려고 창고에서 쥐틀을 찾아 마당 구석에 놓아두고 일주일을 기다렸다. 목표는 할아버지처럼 7마리였지만, 요즘 시골에도 쥐가 귀한지 겨우 2마리밖에 잡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우리도 증조할아버지의 비법을 쓰기로 했다. 생닭을 사다가 잘게 난도질해서 잡은 쥐 고기와 마구 섞은 뒤 양념을 듬뿍 버무렸다.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켜고 철판 위에 고기를 굽자,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는 냄새가 온 골짜기에 진동했다. 겉보기에는 아주 훌륭한 요리 같았다. 하지만 몇 시간째 기름을 둘러가며 태워도 여우는커녕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아 내가 철수를 주장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 거대한 억새풀 속에서 귀신 같은 형체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 존재는 흘끔거리지도 않고, 망설이지도 않았다. 형과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철판 위에서 이글거리는 뜨거운 고기를 맨손으로 덥석 집어 게걸스럽게 뜯어먹기 시작했다. 스스로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자부하던 민우 형조차 그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모습에 몸을 부르르 떨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순식간에 고기 한 마리 분량을 해치운 그 존재는, 너풀거리는 누더기 옷소매로 남은 고기들을 몽땅 쓸어안고 다시 숲으로 돌아가려 했다. 나는 겁에 질린 채로 민우 형의 등을 앞으로 밀었다.

“저…… 저기요! 돈! 돈을 주셔야지요!”

내게 떠밀려 앞으로 나선 형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지만, 나름대로 힘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전설 속 이야기와 달리 그 존재는 돈보따리를 가져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제야 고개를 돌려 우리를 쳐다보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이글거리는 눈동자 속에는, 신기하게도 우리를 해치려는 악의 같은 것은 읽히지 않았다. 두려움을 조금 털어낸 형이 용감하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고기 말입니다. 값을 주셔야 할 거 아닙니까!”

그 존재는 잠시 형을 매섭게 쏘아보더니, 이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외국어 같은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획 돌아 서서 다시 억새풀 속으로 번개처럼 달려가 버렸다.

“우…… 우우…….”

그 존재가 사라진 깊은 숲속 방향에서, 평생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기괴한 동물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서글프게 들려왔다. 민우 형은 뒤쫓아가려다 코를 찌르는 역한 노린내를 맡았는지 얼굴을 심하게 찡그리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형, 그만 가자. 저 여우가 닭고기인 거 눈치채고 다른 대왕 여우들 데리고 오면 우린 끝장이야!”

내가 형의 팔을 잡아끌자, 형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요즘 여우들은 가랑잎으로 돈을 만드는 기술은 잃어버렸나 보다. 게다가 진짜 쥐 고기가 아니라는 걸 알면 사기 쳤다고 해코지하러 올지도 몰라. 철수하자.”

우리가 서둘러 짐을 챙길 때, 수내리 안골 골짜기 위로 짙고 어두운 산 그림자가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3장: 색맹인 벌의 비밀과 민우 형의 추리

“쿠르릉!”

소나기도 아닌데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사방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내가 원래 겁이 없는 성격이라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벌써 무서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방구석에 숨어 있었을 판이었다.

태풍 예보도 없었는데 바람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골목길로 들어서니 양옆으로 늘어선 집들과 높은 담장들이 방패막이가 되어주어 걷기가 한결 수월했다. 이 엄청난 바람은 도대체 어디서 불어오는 걸까? 나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부딪치는 바람을 받아보았다. 희뿌연 하늘 아래로 수내리 앞산의 윤곽이 어슴푸레 실루엣을 드러냈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여우바람이야.”

여우가 백 년을 살면 조화를 부려 마음먹은 대로 날씨를 바꾸고 사람으로 둔갑을 한다는 이야기. 어릴 적 한여름 밤, 마당에 깐 멍석 자리에 누워 할아버지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던 전설이었다. 요즘같이 우주선이 화성으로 날아가는 최첨단 시대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누군가는 비웃겠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믿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실 분이 아니었고, 그 여우에게서 받은 가랑잎 돈의 기억을 돌아가실 때까지 생생하게 증언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와 형이 확인한 그날의 존재는 아무리 생각해도 백년 먹은 여우는 아닌 것 같았다. 원시인처럼 누더기를 걸친 그 존재는 여우라기보단 사람이 확실해 보였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한국의 토종 여우는 1970년대까지는 전국에 제법 분포해 있었다고 한다. 수명은 대략 5년에서 길어야 10년인데, 당시에 대대적으로 벌어진 ‘쥐잡기 운동’ 때문에 쥐를 좋아하는 여우들이 약 먹고 죽은 쥐를 받아먹으면서 무더기로 떼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남은 여우들도 비싼 털을 노린 밀렵꾼들에게 잡히면서 씨가 말랐단다. 지금은 환경부에서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지만, 야생에서 발견됐다는 뉴스는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수내리의 그 존재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민우 형은 수내리 첫 모험이 실패로 끝난 지 딱 일주일 뒤에 나를 다시 불렀다. 형은 그날 밤새 고민해본 결과, 그 존재는 여우가 아니라 어딘가에 흔적을 남긴 '사람'이 분명하다며 다시 안골로 가보자고 했다. 내 생각도 형과 같았다. 이번에는 단단히 무장을 하기로 했다. 군인처럼 간결한 옷을 입고, 둔갑 여우에게 효과가 직빵이라는 복숭아나무 작대기를 하나씩 손에 쥐었다.

수내리 안골은 제대로 된 길이 없었다. 하지만 모험심이 강한 민우 형은 예전에 사진을 찍으러 혼자 수내리를 들락거리며 옛길의 흔적을 더듬어 자신만의 비밀 통로를 만들어놓았다고 했다.

“정우야, 내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미리 길을 다 닦아놨지. 혼자 솔가지를 꺾어서 표식을 해뒀거든? 나만 잘 따라와. 헤헤.”

형은 길 중간중간 꺾여 있는 솔가지 표식을 확인하며 망설임 없이 숲속으로 전진했다. 나는 형의 뒤를 바짝 따르며 물었다.

“형, 근데 여우 만나기 전에는 수내리에 뭐 하러 혼자 들락거린 거야? 사진은 무슨 사진?”

평소에 예술이나 아름다움에는 젬병인 민우 형이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는 말에 내가 헛웃음을 터뜨리자, 눈치 빠른 형이 뒤를 돌아보며 면박을 주었다.

“야, 웃지 마! 동네 어른들이 그러는데, 수내리 절터 앞에는 되게 넓은 구릉지가 있대. 근데 거기에 이름도 알 수 없는 국보급으로 예쁜 꽃들이 엄청 많이 피어 있다는 거야. 그래서 보물찾기하는 기분으로 카메라 들고 가본 거지.”

“에이, 여우가 무슨 꽃밭에서 살아? 음침한 골짜기에 웬 꽃이람.”

“그러니까 가보자는 거 아냐. 너도 보면 놀라 자빠질걸? 그리고 우리가 만난 그 괴상한 존재가 여우인지 사람인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고.”

형의 말대로 수내리에는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만 해도 여우가 참 많이 살았다고 한다. 원래 여우는 성격이 온순해서 사람을 잘 따르고 해를 끼치지 않는 동물이었다. 동네 어른들을 졸졸 따라다니기도 해서 아이들도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 군인들이 가죽을 얻으려고 잔인한 여우 사냥을 시작하면서 여우들이 사나워지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는 역사가 있었다.

형이 안내한 비밀 길은 작은 도랑 앞에서 끝이 났다. 도랑 너머로는 사람 키보다 큰 풀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어서, 무언가 숨어 살기에는 최적의 장소로 보였다.

스으으윽, 휙!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자 모로 누워버리는 풀숲 사이에서 후다닥! 하고 놀란 개구리들이 도랑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대낮인데도 주위가 온통 숲으로 가려져 있어서 어깨가 무거워지며 으스스한 한기가 소름으로 돋아났다. 도랑을 건너기 직전, 우리는 저 풀숲 안을 향해 긴장의 끈을 조였다. 아무리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중학교 2학년 민우 형이라도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어쩌지 못하는지 발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와……! 정우야, 이것 좀 봐! 진짜 별천지다!”

풀숲을 헤치고 나간 민우 형이 대뜸 환성을 질렀다. 형의 말대로 억새풀 뒤편으로 완만한 구릉지가 펼쳐져 있었고, 그 끝자락 산기슭 밑으로 온갖 화려한 꽃들이 기적처럼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형, 저기 무너진 돌탑 봐. 저기가 절터인가 봐.”

이끼가 새까맣게 끼어 누렇게 변해버린 3층 돌탑 뒤로, 지붕이 무너지고 한쪽 벽면이 휑하게 뚫린 폐허가 된 절이 보였다. 허물어져 가는 모습이었지만 한때는 제법 웅장했을 절의 위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가 절터의 풍경에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형은 조금씩 더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형이 비명을 지르며 내 쪽으로 돌아섰다.

“앗! 정우야, 도망쳐! 벌이야, 벌 떼다!”

형이 내 손을 낚아채며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형의 등 뒤로 새카만 말벌 떼가 구름처럼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다급하게 뛰다가 그만 엉겨 붙은 칡넝쿨에 발이 걸려 앞으로 무참하게 넘어지고 말았다.

“으아아앙! 형, 살려줘!”

사정없이 귓전을 때리는 윙윙 소리에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로 공포가 밀려왔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몸을 웅크렸다. 그 순간, 민우 형이 내 몸 위로 자신의 몸을 덮치며 소리쳤다.

“땅에 얼굴 박고 절대 움직이지 마! 가만히 있어!”

뒤통수가 불이 난 것처럼 화끈거렸다. 벌 몇 마리가 이미 나를 쏜 모양이었다. 형은 자기도 무서우면서 왜 내 위를 덮은 걸까? 온갖 무서운 생각에 몸을 바르르 떨고 있는데, 잠시 후 형이 내 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됐다. 벌들 다 갔어. 천천히 일어냐 봐.”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두어 군데 쏘여서 부어올랐는데, 정작 내 위를 다 덮고 있던 민우 형은 단 한 방도 쏘이지 않은 채 멀쩡했다. 그 많던 말벌 떼가 왜 형을 공격하지 않고 그냥 달아나듯 사라졌을까? 형은 그 이유를 현장에서 말해주지 않았다. 내가 스스로 추리해보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결국 그날도 우리는 여우는커녕 머리통에 커다란 혹만 달고 빈손으로 수내리를 걸어 나와야 했다.

4장: 민우 형의 집, 그리고 드러나는 은밀한 단서들

회상을 끝내고 정신을 차려보니, 멀리 수내리의 뒷산이 비바람 속에서 어렴풋이 보였다. 거대한 태양광 발전소 패널들로 뒤덮인 앞산과는 달리, 뒷산 쪽은 신기하게도 비바람의 기세가 조금 약해 보였다. 민우 형이 사는 큰집은 마을 앞쪽 소음에서 한참 떨어진 뒷산 자락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 덕분인지 걸어가기가 생각보다 아주 버겁지는 않았다.

쾅쾅쾅!

“형! 민우 형, 나야 정우야! 문 열어봐, 빨리!”

큰집 현관문 앞에 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돌풍이 내 등을 세차게 밀어붙였다. 내가 문을 두드리지 않아도 바람이 대신 문을 부술 듯이 두들겨 대고 있었다. 큰아빠와 큰엄마는 이장님 방송을 듣고 분명 마을회관 수색대로 가셨을 터였다. 이 지독한 비바람 속에 밖에 나돌아 다닐 형이 아니니 집에 있는 게 확실했다. 하지만 한참을 소리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목청을 높여 다시 악을 썼다.

“이민우! 문 열어!”

그 순간, 현관문이 휙 하고 안쪽으로 거칠게 열렸다.

“으악!”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내 눈앞으로 시뻘건 핏물 같은 액체가 확 쏟아지는 착시가 일어났다. 순간 너무 놀라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옆으로 스르륵 넘어졌다. 아니, 넘어지려는 몸을 간신히 현관 신발장 벽에 기대며 두 눈을 부릅뜨고 비벼 댔다.

“헤헤. 정우 너 많이 놀랐냐? 어서 와라.”

빨간 천을 온몸에 망토처럼 휘감은 민우 형이 불쑥 손을 내밀어 내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뭐야, 형! 아휴, 난 또 수내리 둔갑여우가 내려온 줄 알고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 복장은 또 왜 그 모양인데? 슈퍼맨 변신 놀이라도 하는 거야?”

이 와중에도 농담이 튀어 나갔다. 형의 엉뚱한 행동은 늘 내 긴장을 풀어주는 묘한 힘이 있었다. 형은 내 옷에 묻은 빗물을 털어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들어와서 문 닫아. 너 으니 때문에 온 거지?”

순간 소름이 쫙 돋으며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형은 내 속마음을 이리도 자상하게 꿰뚫고 있는 걸까? 거실 벽에 걸린 낡은 괘종시계가 열 시를 알리는 종을 힘차게 울려 대고 있었다. 평소에는 내 걸음으로도 10분이면 도착하는 형의 집인데, 시계를 보니 오는데 한 시간이나 걸린 셈이었다. 비바람이 방해했다고는 하지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근데 형, 방바닥에 이 천 조각들은 다 뭐야? 귀신 똬리 트는 것도 아니고.”

형의 방바닥에는 정체 모를 붉은색 천과 푸른색 천 조각들이 가득 널려 있었다. 평소 깔끔한 것을 목숨처럼 여기는 민우 형의 성격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난장판이었다. 하지만 뜻이 다 있을 터였다. 생각지도 못한 기발한 일을 저지르기 좋아하는 형이었기에 나는 형을 믿고 따랐다. 형이 바닥의 천들을 정리하며 물었다.

“정우야, 너 저번에 수내리에서 말벌 떼가 왜 우릴 놓아두고 그냥 갔는지 아직도 모르겠지?”

내가 오랫동안 궁금해했던 수수께끼였다. 드디어 형이 비밀을 말해줄 모양이었다. 나는 젖은 비옷을 대충 벗어두고 방바닥에 앉아 형에게 바짝 다가갔다.

“형, 벌들이 왜 우릴 안 쐈는데? 형이 무슨 벌들과 소통하는 마술이라도 부린 거야?”

“바보야, 마술은 무슨. 너 벌이 ‘색맹’이라는 사실 알고 있었냐?”

“벌이 색맹이라고? 뭔 소리야? 벌들이 색맹이면, 산에 피는 그 빨갛고 노랗고 하얀 예쁜 색깔의 꽃들은 왜 존재하는 건데? 꽃들이 벌들을 유혹하려고 색을 내는 거잖아.”

내 반박에 형은 짐짓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과학 잡지 한 권을 들고 왔다. 자신이 확실히 알고 있는 지식을 남에게 뽐낼 때 짓는 특유의 거만한 표정이었다.

“잘 들어, 이 무식한 초딩아. 내가 《사이언스》라는 과학 잡지에서 읽었는데, 벌은 적색맹이라서 파란색과 자외선 영역밖에는 볼 수 없대. 빨간색은 벌에게 그저 어두운 검은색이나 회색으로 보인다는 거지.”

“어? 그럼 빨간 꽃이나 노란 꽃은 벌 눈에 어떻게 보이는데?”

“꽃들이 피워내는 빨강, 노랑, 주황 같은 색들이 벌의 눈에는 전부 파란색 계열의 밝은 빛으로 치환돼서 보인다는 거야. 진짜 신기한 건 뭔지 알아? 진짜 파란색과 검은색은 벌에게 완벽한 ‘검은색’으로 인식이 되는데, 벌은 검은색을 자신의 천적인 ‘곰’이나 ‘오소리’ 같은 동물의 털 색깔로 본다는 거지. 그래서 검은색을 보면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피한대.”

형의 장황한 과학 설명에 내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스쳤다.

“아! 그럼 그때 형이 입고 있던 옷이 검은색 바람막이였잖아! 그래서 벌들이 도망친 거야?”

“추리 하나는 지독히도 빠르구나, 김정우. 너는 그때 주황색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벌들의 표적이 된 거고, 네가 넘어졌을 때 내가 내 검은색 옷으로 네 몸을 완전히 덮어버렸잖아. 벌들은 순식간에 나타난 거대한 검은 물체를 보고 천적인 곰으로 착각해서 공격하려다가, 우리가 미동도 하지 않으니까 겁을 먹고 그냥 돌아간 거야.”

벌이 색맹이라 파랑과 검정밖에는 구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형에게서 처음 들었다. 어쩌면 진짜 과학적 사실 같았지만, 가끔 이야기를 지어내길 좋아하는 형의 성품으로 보아 뻥일 확률도 20% 정도는 열어두어야 했다. 하지만 지난 경험이 확실한 증거였기에, 나는 형의 권유대로 큰방에서 찾아낸 검은색 운동복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제 으니를 찾으러 수내리로 가려면 무조건 형의 지시에 복종해야 했다. 형이 창밖을 내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으니가 사라졌다는 방송을 듣자마자 내 머리에 직감이 딱 오더라고. 만약 으니가 읍내로 도망치거나 가려 했다면 무조건 버스를 탔을 거 아냐. 네가 알다시피 우리 집 창문으로 저기 마을 버스 정류장이 훤히 보이잖아. 우연히 오늘 아침 첫차가 왔을 때 내가 마침 밖을 보고 있었거든? 근데 읍내에서 장사하는 창식이 아저씨랑 동네 어른 세 분만 탔지, 으니 비슷한 아이는 털끝 하나 안 보였어.”

마을 끄트머리에는 제법 커다란 빈터가 있었고, 마을버스는 항상 거기서 차를 돌려 나갔다. 새벽부터 창가에서 수내리 안골 쪽을 연구하던 형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형, 으니가 지독히도 돈 안 쓰고 아끼는 애잖아. 버스비 아끼려고 읍내까지 그냥 걸어갔을 수도 있잖아.”

내 말에 형은 고개를 저으며 검은색 배낭의 지퍼를 열었다.

“그게 아닐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두 가지 있어. 첫째, 으니가 읍내로 가려는 유일한 이유는 요양원에 계신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야. 그럼 당연히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수내리의 ‘꽃’을 챙겨서 가야 하는데, 오늘 아침에 으니네 집 마당에는 아무 흔적도 없었어. 둘째, 으니가 아무리 험한 산길 생활에 익숙하다고 해도, 이 정도 태풍급 비바람을 맨몸으로 맞으면서 읍내까지 십 리 길을 걸어갈 수는 없어. 간다고 해도 길가 하우스에서 일하던 동네 어른들 눈에 무조건 띄었겠지.”

“그럼…… 으니가 수내리 안골로 들어갔단 말이야? 거기는 읍내 길보다 백 배는 더 험하고 무서운 곳이잖아. 이 날씨에 거길 왜 가?”

“너도 이젠 제법 추리력이 붙었구나. 내가 수내리라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알아맞히다니. 하지만 정우야, 앞만 보지 말고 뒤를 봐라.”

형은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는 수내리 앞산이 아닌, 먹구름이 아주 빠른 속도로 흘러가며 상대적으로 고요해 보이는 수내리 뒷산 자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작년부터 저 뒷산에 태양광 발전소 짓는다고 대형 포크레인이랑 트럭들이 다닐 수 있는 넓은 진입로를 깎아놨잖아. 우리 집에선 그 길이 훤히 보여. 산 앞쪽은 비바람이 정면으로 부딪쳐서 난리가 났지만, 산 뒷길은 산봉우리가 바람을 막아줘서 의외로 조용하단 말이지. 영리한 으니는 분명 저 뒷길을 통해서 수내리 안골 절터로 들어갔을 거야. 큰길로만 따라가면 안전하니까.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으니가 산사태나 부러진 나무에 다칠 수도 있어. 어서 떠나자.”

민우 형은 이미 내가 올 것을 알고 내 몫의 검은색 땀복까지 완벽하게 준비해놓고 있었다. 산길을 탈 때는 거치적거리는 비옷보다 몸에 딱 붙는 방수 땀복이 훨씬 낫다면서 말이다. 형의 작은 등산 배낭 안에는 비상용 랜턴, 만능 칼, 두꺼운 노끈, 그리고 초코파이 몇 개까지 119 구조대가 무색할 정도로 완벽하게 채워져 있었다. 나는 조금 겁이 나서 형의 옷자락을 잡았다.

“형, 근데 으니가 진짜 수내리에 있는 거라면, 우리가 먼저 마을회관에 가서 어른들한테 말해야 하는 거 아냐? 아니면 119에 신고부터 하던가.”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바람이 우리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다. 형은 내 손을 거칠게 잡아당겨, 정류장 옆에 서 있는 수령 백 년 된 거대한 느티나무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내 말을 잘랐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무 데도 연락하지 마. 어른들한테 말해봤자 ‘이 날씨에 애들이 미쳤냐’면서 집구석에 가둬두기나 하겠지. 그리고 확실한 증거도 없이 으니가 수내리에 있다는 말을 누가 믿어주겠어? 수내리의 비밀은 우리 스스로 캐낸다는 약속, 벌써 잊었어? 내 말만 믿고 따라와. 이상 끝!”

형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두꺼운 노끈을 꺼내더니, 내 허리와 자신의 허리를 약 2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꽁꽁 묶었다. 혀를 내두를 만큼 완벽한 모험의 준비였다. 어쩌면 형은 으니의 출생에 대한 비밀이나 숨겨진 사연까지 이미 다 짐작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군대 지휘관처럼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는 민우 형의 앞에서는 그 어떤 반박도 통하지 않았다. 저 확신에 찬 말투는 누구라도 무조건 복종하게 만드는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여우가 득실거리고 귀신이 나온다는 미지의 세계, 수내리 안골을 향해 민우 형과 나는 용기 있는 첫 발자국을 힘차게 내디뎠다.

5장: 가출 소녀 주으니의 고백

“세상에…… 형, 이런 비밀 산길을 그동안 혼자만 알고 다녔단 말이야? 진짜 대단하다.”

산 뒷자락 진입로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형의 추리대로 산의 뒤편은 믿기 힘들 정도로 고요했다. 번개가 치고 폭우가 들이치던 앞쪽 마을의 풍경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관심을 가지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알 수 있는 법이지. 나는 쭉 수내리의 생태와 지형을 연구하고 있었거든.”

형은 노벨상을 탄 과학자라도 된 것처럼 거드름을 피웠다. 비꼬고 싶어 하는 내 눈치를 미리 챘는지, 형은 계면쩍은 듯 뒤를 돌아보며 씩 웃어 보였다. 어찌 됐든 민우 형의 완벽한 준비 덕분에 비를 맞으면서도 몸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고, 공사용 큰길을 따라 걸으니 수내리 안골 깊은 곳까지 아주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걸어갈수록 걱정이 앞섰다. 으니는 정말 형의 생각대로 이 난리 통에 수내리 절터로 들어간 게 맞을까?

으니는 우리 학교에서 한마디로 ‘신출귀몰’한 아이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튀어나오기도 했고, 동네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엄청나게 아름답고 화려한 꽃을 한 움큼 들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학교를 오가는 버스 안에서는 단 한마디도 말을 섞지 않았다. 그런 비밀스러운 으니를 우리가 처음 ‘발견’했던 날은, 말벌 떼에게 쫓겨 수내리를 황급히 벗어났던 그날로부터 딱 일주일 뒤였다. 으니를 생각할 때마다 내 몸에는 지금도 강한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오싹한 소름이 돋아나곤 했다.

그날도 주말이었고, 나는 여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수내리에 가자며 민우 형의 집으로 달려갔었다. 형은 내 생각보다 한 발 더 빨라서 이미 내 몫의 등산 스틱까지 챙겨두고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이 통하는 형과 나는 또다시 수내리 안골 모험에 도전했던 것이다.

“벌들은 한 번 공격하고 나면 자기 영역을 잘 벗어나지 않으니까, 이번에는 도랑가를 따라서 우회하면 안전할 거야.”

도랑을 건너기 전, 형이 나직하게 속삭이며 앞장섰다. 멧돼지나 고라니 같은 산짐승들이 다녔는지 풀숲은 멋대로 헝클어져 길을 만들고 있었다. 등산용 지팡이로 앞 풀숲을 툭툭 두들기며 조심스럽게 전진하던 민우 형이 갑자기 몸을 웅크리며 제자리에 딱 멈춰 섰다. 순간 엄청난 긴장감이 내 주위의 공기를 얼려버렸다.

“정우야, 저기 봐. 바람도 없는데 풀잎이 격하게 흔들리지? 보이지?”

형이 가리킨 곳은 절터에서 조금 떨어진, 옛날에는 절 마당이었을 법한 넓은 공터였다. 그곳에는 붉은색 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 있었는데, 그 곁의 키 큰 억새풀들이 잔잔한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듯 심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맹수라도 숨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무서움이 왈칵 밀려와 나도 모르게 형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형…… 저기 진짜 무언가 있어. 무서워, 집에 가자. 혹시 엄청나게 큰 구렁이나 멧돼지면 어떡해?”

“바보야, 뱀은 지나갈 때 저렇게 풀잎 윗부분을 크게 흔들지 않아. 산짐승들도 마찬가지야. 맹수들은 사냥할 때 자기가 여기 있다고 광고하면서 걷지 않아. 저건 분명……”

“그럼 진짜 여우야? 사람으로 둔갑하는 중인 백년 먹은 여우?”

내 말에 형이 획 돌아섰다. 형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언가 확실한 심증을 잡았다는 증거였다.

“가보자. 무서워할 거 없어. 내 추리가 맞다면 저건……”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공터에 무리 지어 피어 있는 붉은 꽃은 다름 아닌 ‘달리아’였다. 우리 큰집 마당 작은 화단에 큰아빠가 애지중지 심어놓은, 수내리 마을 전체를 통틀어 딱 한 군데서만 자라는 귀한 꽃이었다. 달리아는 본래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자라는 화초라, 한국의 추운 겨울에는 뿌리가 몽땅 얼어 죽기 때문에 겨울이 오기 전에 구근을 캐서 따뜻한 방안으로 옮겨두어야 했다. 큰아빠는 몇 년 전 베트남 여행을 갔을 때 그곳 들판에 핀 달리아를 보고 첫눈에 반해, 국내 화원에서 어렵게 구한 구근이라며 엄청나게 아끼셨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겨울에 무조건 얼어 죽어야 정상인데, 아무도 살지 않는 이 음침한 빈 절터 한복판에 달리아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는 건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수내리 안골이 다른 곳보다 겨울에 유독 따뜻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이기도 했다. 꽃밭은 두어 발걸음 정도 크기로 정갈하게 가꾸어져 있었고, 그 곁으로 억새가 무성했다. 우리가 더 가까이 다가가자, 풀숲 사이에서 동물인지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는 끙끙거리는 얕은 신음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형, 조심해! 진짜 여우가 이빨 드러내고 있으면 어떡해!”

대담하지 못한 나는 겁에 질려 멀찍이 떨어져 섰다. 하지만 형은 복숭아나무 작대기로 흔들리는 억새풀 속을 거침없이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냅다 비명을 질렀다.

“으앗! 정우야, 여우가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

형의 외침에 달려가 보니, 풀숲 속에 여우가 아닌 한 어린아이가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 머리카락이 마구 흐트러져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가슴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숨을 쉬고 있었고, 우리의 인기척에 힘겹게 눈을 뜨며 손을 내밀었다. 여우가 아니라 인간이었다. 게다가 입을 열어 말까지 했다.

“음…… 물…… 물 좀 주세요…….”

형은 얼른 허리에 차고 있던 등산용 물통을 꺼내 아이의 입술에 조심스럽게 물을 흘려주었다. 물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든 아이의 얼굴이 드러난 순간, 나는 자지러지게 놀라며 뒤로 나자빠졌다.

“앗! 형, 저 애…… 저번에 우리 철판에 구운 쥐 고기 돈도 안 내고 몽땅 훔쳐 먹은 그 둔갑여우야! 분명해!”

“야, 김정우 정신 차려! 여우가 아니라 우리랑 나이가 비슷한 어린 여자아이잖아! 지금 도움이 필요해서 쓰러져 있는 거라고!”

“하지만 여긴 핸드폰이 안 터지잖아! 119를 어떻게 불러, 형!”

내가 발을 동동 구르자, 민우 형은 다급하게 내 등을 떠밀었다.

“내가 여기서 이 아이를 지키고 있을 테니까, 너는 왔던 길로 미친 듯이 달려 내려가서 전파 터지는 곳에서 119에 연락해! 그리고 마을 입구에서 구급차 기다렸다가 이리로 인도해 와! 빨리!”

그날 나는 평생 달릴 뜀박질을 다 하며 내려가 신고를 했고, 구급차가 수내리 앞까지 도착했다. 구급대원 아저씨들과 함께 들것을 들고 다시 안골로 들어가 축 늘어진 아이를 싣고 나왔다. 나와 형이 한동안 ‘수내리 타잔’ 혹은 ‘둔갑여우’라고 불렀던 그 정체불명의 아이가 바로 ‘주으니’라는 사실은, 으니가 우리 마을 빈집으로 이사 오고 학교에 전학을 온 뒤에야 알게 되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 첫 등교를 하던 날이었다. 마을 어귀 빈집에 한 여자아이가 이사 왔고, 이름이 주으니라는 사실은 동네 아주머니들의 입소문을 통해 들었었다. 학교 버스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한 낯선 여자아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맨 뒷자리에 따라서 탔다. 어딘가 낯익은 실루엣과 걸음걸이에 나는 버스 뒷자리에 앉은 그 애를 흘끔거리며 기억의 필름을 마구 뒤감았다.

“앗! 저 애는…… 맞다! 수내리 절터에서 쓰러져 있던 그 애잖아!”

버스 안에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들것에 실려 가던 그 수내리 사람의 이목구비와 무표정한 얼굴, 고개를 수그리고 주위를 경계하던 그 몸짓이 지금 내 뒷자리에 앉아 있는 주으니와 정확히 일치했다.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깨끗한 옷을 입어서 달라 보였을 뿐, 형과 내가 둔갑여우로 오해했던 그 아이가 분명했다.

으니는 전학 첫날부터 동네 아이들과 단 한마디도 섞지 않았다. 학교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의 질문에 묵묵부답이었다. 선생님도 무슨 사연을 아는지 으니에게 억지로 말을 시키지 않았고, 으니가 교실 구석에서 조용히 있는 것을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자꾸 주위를 맴돌며 말을 걸고 다문화라며 수군거리자, 으니는 아예 이튿날부터 학교 버스를 타지 않았다. 마을 길과 논두렁을 따라 걸으면 학교까지 족히 30분은 걸리는 먼 거리였음에도, 으니는 개의치 않고 매일 아침 혼자서 묵묵히 걸어서 등교했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내 머릿속은 온통 주으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서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이름부터가 수수께끼였다. 은히도 아니고, 은이도 아니고, ‘으니’라니? 우리나라에 저런 이름이 주으니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엄마와 둘이 산다고 했는데 원래는 어디서 살다 온 걸까? 왜 그 무서운 수내리 안골에 혼자 들어가 살았던 걸까? 도무지 혼자서는 답을 낼 수 없어, 나는 물음표를 가득 안고 다시 민우 형을 찾아갔었다.

형은 내 이야기를 듣고 방바닥에 수내리 지도를 펼치며 추리를 시작했다.

“정우야, 수내리는 역사적으로 임진왜란 때 피란 온 사람들이 바위산 틈새에 숨어 살면서 형성된 마을이야. 하지만 거긴 사람 꽃이 피기 힘든 척박한 곳이지. 지금 절터가 있는 양지바른 쪽만 겨우 흙이 조금 붙어 있어서 풀과 나무가 자라지, 그 외의 지형은 전부 거대한 암반으로 뒤덮여 있어. 바닥에 온통 바위가 깔려 있으니까 비가 내리면 빗물이 땅에 고이지 않고 돌 틈새로 바로 빠져나가 버려. 그래서 곡식을 심을 수가 없는 땅이란 말이지. 역사 기록을 보면 조선 중기 때 ‘수내사’라는 절이 세워져서 한때 번창했다는데, 무슨 연유인지 스님들이 절을 한순간에 버리고 모두 떠났대. 세월이 흐르면서 절은 무너지고 흔적만 남은 거고.”

“형, 내가 궁금한 건 수내리의 역사용어가 아니라, 으니가 왜 거기서 거지처럼 숨어 살았냐는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을 끝까지 들어봐. 확실하진 않지만 으니는 이전 동네나 학교에서 큰 상처를 받고 가출을 한 거야. 그리고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땅인 수내리로 들어와 몸을 숨긴 거지.”

“하지만 형, 으니는 겨우 11살이고 여자애잖아! 동네 골목길도 밤에는 무서워서 못 다니는데, 여우가 나오고 귀신이 산다는 그 음침한 수내리 안골에서 혼자 밤을 지새웠다고? 그게 말이 돼?”

“바로 그 점이 미스터리라는 거야. 먹을 것도 없었을 텐데…… 아, 잠깐만!”

형은 스스로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손가락을 튕겼다.

“이제 기억났다! 그날 우리가 절터에서 쥐 고기 구울 때 말이야. 으니가 나타나서 그 뜨거운 걸 맨손으로 허겁지겁 뜯어먹었잖아. 그때 으니 얼굴 기억나?”

“무서워서 제대로 못 보긴 했는데…… 엄청 해쓱하고 핏기가 하나도 없었던 거 같아.”

“바로 그거야! 살이 완전히 빠지고 해쓱했던 걸로 보아, 으니는 우리가 발견하기 한 일주일 전부터 수내리에 들어와 있었던 게 분명해. 우리가 그날 쥐 고기를 굽는 냄새를 피우지 않았으면, 으니는 굶어서 정말 큰일 났을지도 몰라. 그리고 우리가 발견했을 때는 그로부터 또 일주일 뒤였잖아. 으니의 몸 상태는 이미 한계를 넘은 실신 상태였어. 그때 구조되지 않았으면…… 아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형의 추리를 종합하면 이랬다. 으니는 가출해서 아무도 모르는 수내리 안골로 숨어들었다. 무너진 절터 뒤편의 벽체가 비바람을 막아주어 거기를 임시 거처로 삼았고, 바로 아래 도랑에서 물을 길어 마시며 주변의 풀뿌리를 캐 먹으며 버텼지만 일주일을 넘기며 체력이 바닥난 것이었다. 그때 마침 우리가 나타나 고기 냄새를 풍겼고, 으니는 본능적으로 끌려 나와 고기를 먹은 뒤 다시 숨었다가 결국 일주일 뒤 영양실조로 쓰러진 것을 우리가 구해낸 셈이었다.

“으니를 직접 만나서 당당하게 물어보는 게 가장 정확한 해답이야.”

“형, 개가 우리한테 말을 해줄까? 학교에서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마디도 안 하는데.”

“무턱대고 물어보면 도망칠 테니까, 우리가 자연스럽게 접근할 타이밍을 만들어보자.”

형과 나는 그날 으니의 마음을 열기 위한 수십 가지 작전을 짰다. 그리고 실행에 옮기기로 작정한 금요일 오후, 나는 학원까지 빼먹고 하굣길에 으니의 뒤를 몰래 밟았다. 학교 앞 큰길에는 거대한 가로수 은행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서 몸을 숨기며 미행하기에 아주 좋았다. 으니는 내가 뒤를 따르는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는데, 갑자기 큰길을 버리고 사방이 훤히 트인 논두렁길로 방향을 틀었다. 곧게 뻗은 두렁길이라 들킬 위험이 99%였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멀찍이 거리를 두고 살금살금 으니의 뒤를 쫓았다.

다행히 으니는 두렁길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논두렁길 끝 갈림길에서 으니는 마을 쪽이 아닌, 우측 산자락 길로 들어섰다. 그 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풀로 막혀 끊어진 길이었다.

“앗…… 저 길은 수내리로 들어가는 길인데!”

나는 미행이고 뭐고 사정없이 뛰기 시작했다. 꽉 우거진 숲속으로 으니가 들어가 버리면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숲에 들어서기 전에 으니를 잡아야 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커다란 노송나무 모퉁이를 거칠게 돌아서는 순간, 누군가 풀숲에서 불쑥 나타나 내 팔목을 강하게 낚아챘다.

“악!”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 팔목을 잡은 건 다름 아닌 주으니였다. 으니는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김정우. 맨날 학교에서 멍청한 표정만 짓고 있더니, 할 일 없이 왜 내 뒤를 밟는 거야?”

으니가 완벽한 우리말로 또박또박 말을 구사하는 모습을 나는 평생 처음 보았다. 너무 놀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말을 받았다.

“너…… 너 말할 줄 알았어? 그것보다 저쪽은 여우가 살고 뱀이 우글거리는 무서운 수내리 안골이란 말이야! 너 또 저기 들어가서 쓰러지려고 그러는 거지? 내가 못 가게 하려고 쫓아온 거야!”

내 외침에 으니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동네에 여우에 미쳐서 수내리 들락거리는 멍청이 형제가 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니, 그게 바로 너랑 네 사촌 형이었구나. 이제 보니 진짜 소문 그대로네.”

으니가 생각보다 부드럽게 대화에 응해주자, 나는 작정하고 가슴속에 뭉쳐두었던 의문부호들을 마구 던졌다.

“야! 소문이 아니라 진짜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거기서 여우한테 돈도 받았단 말이야! 그것보다 너 저번에 수내리에서 왜 거지처럼 쓰러져 있었던 건데? 거기서 진짜 여우 못 봤어? 왜 혼자 거기 숨어 살았냐고!”

내 속사포 같은 질문에 으니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버렸다. 입을 앙다문 으니는 내 팔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오던 길로 푱 하고 돌아서서 걸어가 버렸다. 상처받은 듯 일그러진 으니의 얼굴 잔상이 뇌리에 남았지만, 나는 당돌하게도 다시 앞으로 달려가 두 팔을 크게 벌리고 으니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답변 안 해주면 집에 못 가! 여기서 밤새도록 버틸 거야!”

내 목소리는 용기를 쥐어짜 내어 컸지만, 사실 내 다리는 미세하게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으니는 한참 동안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하고 설익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내 손목목을 잡아당겨 길가에 무성하게 자란 질경이 풀밭 위로 펄썩 주저앉았다. 아니, 정확히는 나를 바닥으로 강하게 주저앉혔다. 의외로 엄청난 완력에 나는 꼼짝도 못 했다.

“너의 그 쓸데없는 용맹함에 내가 졌다, 김정우. 그래, 도대체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건데?”

바람이 한 차례 휙 하고 논두렁 언저리를 휘돌아 나갔다. 바람의 끝자락에는 눅눅한 비 냄새가 짙게 묻어 있었다. 으니는 무릎을 모아 안고 수내리 산자락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원래 으니는 읍내의 외할아버지 집에서 엄마와 함께 살았다고 했다. 집 근처의 초등학교에 다녔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어떤 지독한 사건 때문에 강제로 지금의 우리 시골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으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내게 무슨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충격적이고 흥미로웠다.

“내가 다니던 전 학교 반장네 집이 제법 큰 꽃가게를 했어. 반장 엄마는 매일 아침마다 학교에 올 때 자기가 파는 비싸고 예쁜 꽃들을 가져와서 교탁 위 화병을 화려하게 장식하곤 했지.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화병의 꽃들이 한 송이, 두 송이씩 야금야금 없어지기 시작한 거야. 처음에 한두 송이 사라질 때는 아무도 몰랐는데, 그게 반복되니까 반장 무리 애들이 나를 범인으로 지목했어. 내가 방과 후에 가방에 꽃을 꽂고 집에 가는 걸 몇 번이나 봤다고 선생님께 고자질을 한 거지.”

으니의 목소리에 억울함이 묻어났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나를 교탁 앞으로 불러내 잔인하게 나무라셨어. ‘너 서랍에 꽃 숨겨놨지? 당장 꺼내!’ 하면서 소리를 지르셨지. 나는 머리만 푹 수그린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실제로 딱 한 번, 화단에 떨어져 있던 꽃 한 송이를 주워 가방에 넣은 적은 있었거든. 하지만 반장 애들이 본 내 가방 속의 화려한 꽃들은, 학교 꽃이 아니라 우리 할아버지가 알려준 수내리 절터에서 내가 직접 꺾어온 꽃들이었어. 내가 수내리로 꽃을 찾으러 간 이유는 단 하나였어. 요양원에 계신 우리 외할아버지가 수내리에 가면 자기가 젊은 시절 심어둔 진짜 아름다운 꽃들이 많다고 하셨거든. 내가 그 꽃을 꺾어서 요양원에 들고 가면, 누워만 계시던 할아버지가 소년처럼 너무너무 좋아하셨단 말이야…….”

으니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런데 진짜로 내가 완벽한 도둑놈이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학교에서 터졌어. 어느 날 반장의 최신형 스마트폰이 교실에서 사라진 거야. 반장 애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고, 선생님은 교실 문을 잠그고 전부 책상에 머리를 수그리고 눈을 감으라고 하셨어. ‘폰 훔쳐 간 사람 양심적으로 지금 손들어라’ 하셨지. 그때…… 내가 손을 들었어.”

“어? 네가 진짜 훔친 거야?”

내 질문에 으니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도끼눈으로 쳐다봤다.

“바보야, 내가 왜 훔쳐! 선생님이 눈 감으라고 하셨을 때, 내 책상 서랍 안쪽에서 갑자기 진동 소리가 울리는 거야. 깜짝 놀라서 손을 집어넣어 보니까, 반장의 스마트폰이 내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더라고. 누군가 나를 완벽한 도둑으로 몰아서 학교에서 쫓아내려고 내 서랍에 몰래 넣어둔 거지. 그 상황에서 ‘이거 내 거 아닌데요, 누가 넣어놨는데요’ 해봤자 이미 꽃도둑으로 찍힌 내 말을 누가 믿어주겠어? 변명해봤자 비참해질 게 뻔하니까, 차라리 내가 뒤집어쓰고 끝내자 싶어서 손을 든 거야.”

으니의 덤덤한 고백에 가슴 한구석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선생님은 폰을 찾았다며 다들 눈을 뜨라고 하셨고, 범인이 누구인지는 아이들에게 끝까지 말씀하지 않으셨어. 모두 눈을 감고 있었으니 내가 손을 든 걸 아무도 몰라야 정상이었지. 그런데 바로 다음 날부터 내가 반장 폰을 훔친 지독한 도둑년이라는 소문이 온 학교에 파다하게 퍼졌어. 반장 무리 중 어떤 독한 년이 눈을 살짝 뜨고 손을 든 나를 본 게 틀림없어. 그때부터 시작된 거야. ‘이지메’라고 하지? 집단 따돌림. 내 책상에 쓰레기를 버리고, 지나갈 때마다 대놓고 비웃고 침을 뱉었어. 엄마는 일하느라 매일 밤늦게 오고, 내 편은 세상에 아무도 없었지.”

으니는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먼 산을 보았다.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학교를 뛰쳐나왔어. 그리고 할아버지가 말해준 수내리 안골 절터 깊숙한 곳에 주저앉아 곰곰이 생각했지. ‘아, 그냥 확 죽어버리고 싶다’ 하고. 나 같은 거 하나 세상에서 없어져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 같았어. 그래서 그냥 여기서 아무도 모르게 굶어 죽자고 결심하고 숲속에 누워 버린 거야. 나는 어릴 때부터 아주 깊은 산골촌에서 자라서 산을 타는 데는 도가 튼 사람이거든. 아빠는 나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엄마는 돈 버느라 바빠서 난 늘 혼자 산을 오르내리며 놀았어. 그래서 도시 애들과 달리 산이나 숲에 대한 무서움은 눈곱만큼도 없었지.”

으니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가슴을 살짝 폈다.

“신기하게도 수내리 안골은 엄청나게 따뜻하더라. 겨울에도 얼음이 얼지 않는대.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절대 자랄 수 없는 열대성 귀한 꽃들이 사방에 피어 있었어. 그중에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시는 ‘달리아’ 꽃이 가득했지. 첫날 밤을 보내고, 두 번째 밤이 오니까 배가 고파서 걷기조차 힘들었어. 칡뿌리를 캐서 씹어 먹어봤지만 칡즙이 밥을 대신해 주진 못하더라고. 힘이 없어서 그냥 며칠 동안 계속 누워만 있었지. 그러다 한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나? 어디선가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는 고기 굽는 냄새가 온 숲에 진동하는 거야. 나도 모르게 이끌려서 비틀비틀 걸어 나갔더니, 너랑 네 사촌 형이 철판에 고기를 굽고 있더라고. 그때 내가 먹은 고기는 내 평생 먹어본 음식 중에 최고로 맛있었어. 너희들 나중에 커서 요리사 하면 대박 날걸?”

으니의 칭찬에 내 얼굴이 붉어졌다.

“근데 으니야, 너 그 고기…… 진짜 쥐 고기인 거 알고 먹은 거야? 안 징그러웠어?”

내 질문에 으니는 피식 웃었다.

“나는 냄새만 맡고도 쥐 고기인 줄 진작 알고 있었어. 거짓말 같지? 내가 아주 어릴 때 살던 고향 나라에서는 쥐 고기가 엄청 고급 요리여서 시장에서 되게 비싸게 팔아. 집에서 자주 구워 먹기도 했고. 그래서 난 쥐 고기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었어. 어쨌든 그 고기 덕분에 며칠을 더 버티다가, 결국 기운이 다 빠져서 실신했을 때 너희가 119를 불러서 날 살려준 거잖아. 나는 바보가 아니야, 김정우. 마음속으로 늘 너희 형제한테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어. 아까 네가 멍청하게 등산 스틱 들고 내 뒤를 졸졸 밟을 때도 진작 다 알고 있었고. 이상 끝! 더는 해줄 말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이제 가로막지 말고 비켜.”

으니는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풀떼기를 툭툭 털어냈다. 그리고는 마을 쪽으로 쌩하니 걸어가 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으니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6장: 무너진 태양광, 위기 속의 수색

“야, 김정우! 너 내 말 듣고 있냐? 초코파이 혼자 다 처먹지 말고 으니 만난 이야기 좀 더 자세히 해봐!”

민우 형이 내 등짝을 세차게 때리는 바람에 나는 과거의 회상에서 번쩍 깨어났다. 우리는 지금 태풍의 중심부나 다름없는 수내리 뒷산의 거대한 상수리나무 밑 부러진 가지들 사이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공포의 회오리바람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기적적으로 고요함이 찾아와 있었다. 부러진 거대한 나뭇가지들이 오히려 천연 우산이 되어 들이치는 장대비를 완벽하게 가려주고 있었다. 당치도 않게 달콤한 초코파이를 씹어 삼키며 나는 형에게 으니의 고백을 조목조목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형, 으니 말로는 자기가 수내리에 들어올 때마다 길을 잃지 않으려고, 그리고 나중에 요양원 갈 때 출구를 찾으려고 자기만의 표식으로 생솔가지를 꺾어서 바닥에 던져두거나 나뭇가지에 걸어놓았다고 했어. 저기 우리가 발견한 꺾인 솔가지들, 그거 전부 으니의 작품이 확실해!”

내 확신에 찬 외침에 민우 형은 다 먹은 초코파이 비닐봉지를 배낭 깊숙이 집어넣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형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하얗게 말라버린 솔가지를 등산 스틱 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냉정하게 분석했다.

“정우야, 내 생각은 좀 달라. 네 말대로 이 솔가지 표식들이 으니가 해둔 게 맞다고 치자. 하지만 이건 솔잎이 하얗게 바랜 걸로 보아 지난 겨울이나 최소 몇 달 전에 해둔 오래된 표식이야. 지금은 여름이고 기상이변 때문에 풀들이 으니 키보다 훨씬 더 높게 자라버렸잖아. 오래된 표식들은 잡풀에 가려져서 전혀 보이지 않을 거라고. 산짐승들이 지나다니면서 훼손했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최근에 으니가 이 길을 통해 안골로 들어갔다고 볼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는 안 된다는 뜻이지.”

형의 냉정한 지적에 흥분했던 내 가슴이 맥없이 푹 꺼졌다. 순간 민우 형이 평소의 대담한 모험가가 아니라 꼼꼼하고 소심한 좀팽이처럼 느껴져 짜증이 확 밀려왔다.

“아니, 그럼 어쩌자고? 여기까지 갖은 고생을 하면서 노끈으로 허리까지 묶고 기어 와놓고, 이제 와서 포기하자는 거야? 형답지 않게 왜 그래?”

내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자, 형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며 수내리 절터 도랑 쪽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포기하자는 게 아니라, 더 신중하자는 거야. 왜냐하면 손에 닿을 듯 거리는 짧아 보이지만, 저 도랑가 주변은 지금 진흙탕과 산사태로 함정이 도사리고 있거든. 잠깐…… 정우야, 저기 좀 봐! 저기 도랑 사이에 처박혀 있는 거대한 태양광 패널 조각 보여? 저거 움직임이 좀 수상하지 않니?”

형의 손가락 끝을 따라 내 시선이 이동했다.

뿌지직…… 찌이이익!

산비탈에서 쓸려 내려와 깊은 도랑 사이에 비스듬히 쐐기처럼 처박힌 거대한 태양광 패널이, 간헐적으로 불어오는 돌풍에 밀릴 때마다 괴상한 기계음 같은 소리를 온 골짜기에 울려 대고 있었다. 알루미늄 프레임이 뒤틀리는 날카로운 소리였다. 그런데 그 굉음의 끝자락에, 아주 가느다랗고 희미한, 울부짖는 듯한 사람의 신음소리가 섞여 나오는 것이 내 귀에도 똑똑히 박혔다.

“……으…… 아…… 살려줘요…….”

내 눈과 민우 형의 눈이 동시에 크게 마주쳤다.

“정우야! 들었지? 내 귀가 잘못된 게 아니지?”

“어, 형! 맞아! 사람 소리야! 으니 목소리가 확실해!”

우리의 추리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순간이었다. 형은 가방을 단단히 고쳐 매며 작대기를 거칠게 꼬쳐 잡았다.

“한시가 급하다! 으니가 저 무너진 패널 더미 밑에 깔려 있는 게 분명해! 빨리 구조하러 가자!”

형은 상수리나무 밑 안전지대를 거침없이 벗어나 빽빽한 풀숲을 헤집으며 도랑 쪽으로 돌진했다. 형의 허리와 내 허리를 연결한 2미터의 노끈이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나도 반강제적으로 형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풀숲을 헤치고 나아가는데, 놀랍게도 나뭇가지에 송진이 아주 싱싱하게 맺혀 있는, 부러진 지 몇 시간 안 된 생솔가지 표식들이 눈에 확확 들어왔다.

“이것 봐, 정우야! 내 말이 맞지? 으니는 똑똑한 애야. 오늘 아침에 이 비바람을 뚫고 들어오면서도, 자기가 나갈 때를 대비해서 새로 생솔가지를 꺾어 가며 길을 표시해둔 거라고! 이 표식들만 따라가면 패널이 있는 도랑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어!”

형은 지휘관처럼 외치며 전진했다. 마침내 우리는 거대한 태양광 패널이 도랑을 가로막고 있는 절터 안골의 중심부에 당도했다.

끼이이익, 쿵!

위태롭게 처박힌 패널 위로 부러진 커다란 참나무 둥치가 얹혀 있어서, 바람이 불 때마다 엄청난 무게로 아래를 압박하고 있었다. 다른 우회로는 보이지 않았다. 으니를 구하려면 무조건 이 뒤틀린 패널 더미를 타고 넘어가야만 했다. 형이 뒤를 돌아보며 내게 물었다.

“정우야, 이 패널 위를 기어서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경사가 심하고 진흙 때문에 엄청 미끄러워. 밑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물웅덩이가 고여 있고. 네 생각은 어때? 할 수 있겠어?”

언제나 독단적으로 결정하던 형이 내게 의견을 묻는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상황이 무시무시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돌아설 내가 아니었다. 슬쩍 겁이 나긴 했지만 힘주어 말했다.

“형, 물어보긴 왜 물어봐! 패널이 완전히 쪼개진 건 아니잖아! 군인들 유격 훈련 하듯이 배를 대고 미끄럼 타면서 기어가 보자고!”

내 당찬 답변에 민우 형은 씩 웃으며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서슴없이 미끄러운 패널 표면 위로 몸을 붙여 기어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형과 연결된 끈의 텐션을 유지하며 패널 위로 몸을 던졌다.

스으으윽, 콰르릉!

그런데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재앙이 닥쳤다. 민우 형의 몸무게와 내 몸무게가 동시에 실리자, 바위 틈새에 간신히 걸려 있던 태양광 패널이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사정없이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패널 표면에 묻은 흙탕물 때문에 마찰력이 전혀 없었다.

“앗! 형! 몸이 미끄러져! 으아악!”

“안 돼! 정우야, 뭐든지 손에 잡히는 대로 꽉 잡아! 얼른!”

형의 외침과 동시에, 허리에 묶인 노끈 때문에 민우 형도 중심을 잃고 나를 따라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패널의 끝자락 바로 밑에는 비바람으로 인해 급조된, 시커먼 흙탕물이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물웅덩이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저 깊이를 알 수 없는 웅덩이에 부러진 철골 구조물과 함께 빠진다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나는 살기 위해 양손을 마구 휘저으며 패널의 날카로운 알루미늄 모서리를 손가락이 터져라 꽉 움켜쥐었다.

드드득!

장갑을 꼈음에도 마찰 때문에 손바닥이 타는 듯이 아팠지만, 다행히 미끄러짐이 극적으로 멈췄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두 발은 이미 물웅덩이 표면 바로 위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간신히 패널 밑바닥 바위틈에 한 발을 디뎌 지탱하는 데 성공했다. 위를 보니 민우 형도 패널 중간 프레임을 붙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찌이이익…… 끙…….

우리가 숨을 돌리기도 전에, 바로 우리 발밑, 뒤틀린 패널의 가장 깊숙한 음지 공간에서 좀 전의 그 애절한 신음소리가 다시금 선명하게 터져 나왔다.

“……아…… 으…… 살려줘…… 숨이…… 안 쉬어져…….”

“형! 으니야! 으니가 바로 이 밑에 깔려 있어!”

나는 웅덩이 바위를 딛고 소리쳤다. 첫 번째 수내리 모험에서 으니를 구출할 때 들었던 그 가냘픈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민우 형은 위기 상황이 닥치자 오히려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이성적으로 변했다. 형은 신속하게 지시를 내렸다.

“정우야, 발 바위틈에 단단히 고정해! 그리고 허리에 묶인 밧줄 천천히 풀어봐! 으니가 지금 내 발밑, 무너진 프레임 사이에 몸이 끼어 있는 게 보여!”

내 어린 힘으로는 패널의 거대한 무게를 들어 올릴 수도 없었고, 형과 으니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당기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 하늘에서는 가늘어졌던 빗줄기가 다시 작정하고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다. 민우 형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소리쳤다.

“안 되겠다! 으니가 지금 뒤틀린 철골에 가슴이 눌려서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있어! 내가 등짝으로 이 패널을 받쳐서 공간을 만들어볼 테니까, 너는 내 허리에서 밧줄 완전히 풀고 가장 안전한 바위 위쪽으로 대피해!”

나는 웅크린 채로 조심스럽게 허리의 매듭을 풀어 형의 몸을 완전히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다. 형은 웅덩이 밑으로 과감하게 몸을 집어던져, 자신의 등과 어깨로 무너져 내리는 태양광 패널의 하중을 온 힘으로 받쳐 안았다. 형의 얼굴이 순식간에 터질 듯이 붉게 핏줄이 섰다.

“정우야! 으니 맞다! 다리가 철골에 끼었어! 내가 힘으로 버티고 있을 테니까…… 너는 지금 당장 왔던 길로 미친 듯이 뛰어가! 산을 벗어나서 전화 터지는 삼거리 나오자마자 119에 신고해! 그리고 마을 입구에서 구조대 아저씨들 이리로 데려와! 내 힘이 언제까지 버틸지 몰라! 빨리 가, 새끼야! 한시가 급해!”

민우 형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아우성을 쳤다. 나는 다급함에 허리에 감겨 있던 노끈을 대충 둘둘 말아 쥐고는, 오던 길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거센 비바람이 내 등 뒤에서 불어 주어 앞으로 나아가는 데 엉뚱하게도 큰 추진력이 되어주었다.

어떻게 그 험하고 미끄러운 숲길과 가시넝쿨 지대를 빠져나왔는지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혼이 유체 이탈을 한 것처럼 오직 으니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형이 깔리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산허리를 돌아 공사용 진입로가 끝나는 삼거리 안골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징~ 하고 진동하며 안테나가 가득 찼다. 화면을 볼 겨를도 없이 긴급전화 119를 눌렀다.

“여보세요! 119죠? 여기 수내리 안골 깊은 절터인데요! 사람이요! 초등학생 여자애랑 제 사촌 형이 무너진 태양광 패널에 깔렸어요! 빨리 와주세요, 제발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허덕이면서도, 나는 구조대원 아저씨의 질문에 내가 서 있는 위치와 형이 처한 위험한 상황을 울먹이며 자세히 설명했다. 119 안전센터는 읍내 중심부에 있어서 아무리 빨리 달려와도 시골길 특성상 20분은 족히 걸릴 터였다. 그 잠깐의 10분, 20분이 내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민우 형이 패널의 엄청난 무게를 이기지 못해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두 사람 모두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구르며 삼거리를 미친 듯이 서성거렸다.

얼마 후, 저 멀리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빨간색 구조 차량과 구급차가 버스가 다니는 큰 길이 아닌, 내가 알려준 논두렁 둑길을 따라 진흙을 사방으로 튀기며 돌진해왔다.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숲길 초입에 차가 멈춰 섰고, 오렌지색 구조복을 입은 거구의 아저씨들이 문을 열고 내렸다. 그들은 굵은 장대비 속에 홀로 서 있는 내 모습을 보더니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신고자가 웬 쬐그만 초등학생 아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얘야! 네가 신고한 학생이니? 패널에 깔린 애들은 어디 있어? 위험하니까 넌 여기 가만히 있어라!”

대장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내 어깨를 잡았지만, 나는 그 손을 뿌리치고 등산 스틱을 앞세우며 숲속으로 먼저 뛰어 들어갔다.

“아저씨, 저 따라오세요! 길잡이 없으면 가시넝쿨이랑 웅덩이 때문에 못 가요! 제가 다 아니까 빨리요!”

아무리 용감하고 훈련된 119 대원들이라지만, 평소에도 사람의 왕래가 전혀 없어 풀들이 정글처럼 우거진 수내리 안골의 지형을 무턱대고 들어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발을 헛디뎌 늪 같은 진흙탕에 빠지기라도 하면 구조가 더 지체될 게 뻔했다. 나는 오며 가며 눈에 익혀두었던 으니의 생솔가지 표식들을 정확히 짚어내며 구조대를 안내했다. 마침내 우리가 형이 있는 도랑가 패널 더미에 당도했을 때는, 내가 처음 산을 내려간 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흐른 뒤였다.

“형! 민우 형! 119 구조대 아저씨들 오셨어! 정신 차려봐!”

내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지만, 패널 밑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치며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마지막 남은 기운이 완전히 소진된 것이었다. 내 모습을 본 구조대 아저씨가 나를 급히 일으켜 세우며, 커다란 확성기를 입에 대고 골짜기가 떠나가라 소리쳤다.

“119 구조대입니다! 안에 계신 분, 들리시면 소리를 질러주거나 철판을 두들겨주세요!”

지독한 침묵이 몇 초간 흐른 뒤, 무너진 참나무 둥치 밑 프레임 사이에서 가느다랗지만 분명한, 민우 형의 오기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기요…… 여기 밑에…… 으니 숨 쉬고 있어요…… 빨리요…….”

형의 목소리를 확인한 구조대원 아저씨들의 움직임이 번개처럼 빨라졌다. 거대한 유압 절단기와 지지대가 투입되었고, 쿵쾅거리는 작업 소리가 온 절터를 가득 채웠다. 자신의 등짝과 어깨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거대한 패널을 떠받치고 있던 중학생 민우 형의 초인적인 수고 덕분에, 주으니는 다리에 타박상만 입은 채 무사히 공간을 확보하여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두 아이 모두 기적적으로 구출되는 순간이었다.

7장: 영원히 시들지 않는 사람꽃

“태풍도 아닌데 어째서 예보에도 없던 그런 무시무시한 비바람과 돌개바람이 한꺼번에 몰려왔을까? 진짜 신기해.”

하늘의 먹구름이 완전히 사그라진 건 아니었다. 해가 중천에 높이 떠올랐지만, 얇고 하얀 구름막이 하늘을 살짝 가리고 있어서 햇살이 부드럽게 대지를 내리쬐고 있었다. 읍내 요양원으로 향하는 넓은 아스팔트 큰길을 걷는 민우 형의 발걸음은, 어제 그렇게 큰 사고를 당한 사람 같지 않게 아주 가볍고 경쾌해 보였다. 형의 등 뒤 운동복에는 어제 패널을 받치다 쓸린 거친 흉터와 소독약 자국이 선명했다.

“내가 말했잖아, 기상이변 탓이라고. 지구 온난화 때문에 수내리 안골 같은 특수한 분지 지형에는 순간적으로 기류가 엉키면서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발생할 수 있어. 과학적으로 아주 설명이 잘 되는 현상이지.”

형은 언제나처럼 만물박사 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하긴, 그 회오리바람만 아니었으면 으니가 위험하게 패널에 깔릴 일도 없었을 거고,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도 무사히 다 끝냈겠지?”

내가 달리아 꽃을 만지작거리며 말하자, 민우 형이 내 어깨를 툭 치며 호쾌하게 웃어재꼈다.

“하하하! 그러니까 임마, 네가 오늘 아침에 큰아빠 눈치 보아가며 화단에서 이 달리아 꽃을 몰래 꺾어오는 도둑질을 안 해도 됐을 거 아냐!”

어제 구출 작전이 끝난 뒤 큰집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마을회관 수색대에 갔던 큰엄마와 큰아빠가 먼저 집에 돌아와 계셨다. 동네 유선 전화와 전기가 아직 복구되지 않은 상황이라, 어른들은 우리가 우리 집 방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을 줄로만 알고 계셨단다. 그런데 웬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초췌한 녀석 둘이 문을 열고 들어오니 까무러치게 놀라셨다. 우리는 그저 밖에서 놀다가 비를 쫄딱 맞았노라고 대충 얼버무리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영웅 행세를 했다간 이 위험한 날씨에 수내리에 들어갔다고 등짝 스매싱을 맞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마을의 전기와 전화선이 완벽하게 복구되었다. 나는 아침밥을 입에 마구 밀어 넣자마자 곧바로 민우 형의 집으로 해 달렸다. 어제 병원으로 이송된 으니의 마지막 비밀, 그리고 으니가 왜 그 난리 통에 수내리에 들어갔는지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으니의 할아버지가 계신 읍내 요양원으로 함께 가기로 미리 약속을 해두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큰집 마당을 나서며 화단 가장자리에 예쁘게 피어 있는 붉은 달리아 한 송이를 큰아빠 모르게 슬쩍 꺾었다. 으니 할아버지가 좋아하신다니 선물로 드릴 생각이었다. 큰아빠가 나중에 아시더라도 좋은 일에 쓴 거니 절대 나무라지 않으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근데 정우야, 읍내까지 버스를 타고 가면 10분이면 가고 편한데, 왜 굳이 이 지루한 길을 걸어서 가자고 한 거야? 다리 아파 죽겠네.”

민우 형이 투덜거리자, 나는 등산 스틱을 땅에 콕콕 찍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 그건 말이야 형. 내가 어제 밤에 침대에 누워서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내 나름대로 엄청난 추리가 하나 완성됐단 말이지. 걸어가면서 형한테 그 답을 검증받고 싶어서 그랬어.”

형은 내 손에 들린 달리아 꽃송이에 코를 슥 박고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음…… 달리아는 알뿌리로 번식하는 구근류 식물이라 굳이 벌들을 유혹할 필요가 없거든? 그래서 향기도 거의 없고, 꿀도 안 나와. 꽃 자체도 그리 화려하진 않단 말이지. 근데 으니 외할아버지는 왜 유독 수내리 안골의 그 많은 야생화 중에 이 달리아 꽃을 목숨처럼 좋아하셨을까? 으니가 이 비바람을 뚫고 꺾으러 갈 정도로 말이야.”

“형, 내 말이 바로 그거야! 달리아 꽃 한 번 잘못 좋아했다간 으니는 물론이고 우리 형제까지 황천길 갈 뻔했잖아. 근데 형, 으니 이름 말이야. 내가 예전부터 이상하다고 했지? 은히도 아니고, 은이도 아니고, ‘으니’라는 이름.”

내 질문에 민우 형의 눈빛이 예리하게 반짝였다.

“그래, 나도 그 이름의 발음이 줄곧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정우야, 너 혹시 으니네 가정이 ‘다문화 가정’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냐?”

“다문화? 가만있어 봐…… 그러고 보니 저번에 내가 으니랑 논두렁에서 처음 이야기 나눌 때, 으니의 억양이나 발음 끝자락에 묘하게 서툰 외국어 느낌이 섞여 있어서 혹시 너 베트남 출신 아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어! 근데 그때 으니가 엄청나게 불같이 화를 내면서 절대 아니라고 펄쩍 뛰더라고.”

내 증언에 민우 형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당연하지! 아이들에게 놀림 받기 싫은 감추고 싶은 아픈 가정사였을 테니까. 내 추측이 맞다면 으니는 베트남과 깊은 연관이 있어.”

“말도 안 돼, 형. 으니의 성이 ‘주’ 씨잖아. 주으니. 베트남 사람 중에 주 씨 성을 쓰는 사람이 어딨어? 아빠가 한국 사람이라는 뜻 아냐?”

“그 주 씨 성이 아빠가 아니라, 요양원에 계신 외할아버지의 성이라면 어떨까? 맞아! 왜 그 생각을 내가 진작 못 했을까!”

민우 형은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학교 인맥을 총동원해 읍내 사정에 밝은 중학교 동창 창호에게 전화를 걸어 대뜸 주으니와 요양원 할아버지의 인적 사항을 캐묻기 시작했다.

“어, 창호야 나 민우야. 너 저번에 말한 읍내 요양원에 계신 주 씨 성 쓰시는 할아버지 기억나지? 베트남 전쟁 참전하셨다던…… 어, 어! 그래? 주으니가 그 할아버지 손녀 마크 맞지?…… 오케이, 알았어!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형이 전화를 끊자마자 하늘을 가리고 있던 얇은 구름막이 완전히 걷히며 온 세상에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지나가는 바람조차 상큼하고 시원해서, 어제 온 동네를 집어삼킬 듯 몰아치던 그 지독한 비바람이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날씨의 변덕이 신기할 정도였다. 형은 흥분한 목소리로 내게 전화 내용을 설명했다.

“정우야, 드디어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맞춰졌어! 요양원에 계신 주 씨 할아버지는 으니의 친할아버지가 아니라 ‘외할아버지’야! 즉, 으니 엄마의 친아버님이란 뜻이지. 창호네 할아버지도 베트남 참전 용사라 두 분이 옛날부터 엄청 친한 사이여서 읍내 사정을 다 알고 계셨대.”

형의 말에 내 머릿속에도 엄청난 단서가 스쳤다.

“형! 그럼 혹시…… 으니 엄마가 말로만 듣던 ‘라이따이한’ 아닐까?”

내 외침에 민우 형이 획 돌아 서서 나를 보더니, 이보다 더 해맑을 수 없을 정도로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김정우, 대박이다! 드디어 진짜 정답을 찾았어! 이건 네가 찾아낸 거나 다름없어!”

드디어 목적지인 읍내 요양원에 다다랐다. 형과 나는 마지막 퍼즐의 완성본을 확인하기 위해, 요양원 출입구로 향하는 긴 석조 계단에 나란히 앉아 숨을 골랐다.

“정리하자면 이래. 요양원의 주 씨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셨던 군인이셨어. 그리고 그곳에서 베트남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눴고 딸을 낳으셨지. 그 딸이 자라서 낳은 아이가 바로 주으니인 거야. 즉, 으니는 베트남 전쟁의 아픈 역사 속에서 태어난 ‘라이따이한’의 자녀이자 할아버지의 소중한 외손녀인 거지.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뒤늦게 한국에 들어왔는데, 할아버지의 가정이 으니를 온전히 데리고 살기에는 형편이나 환경이 적합하지 않아서 수내리 시골 마을의 빈집에 숨기듯 거처를 마련해준 거였어.”

나는 형의 설명을 들으며 휴대전화 검색창에 ‘라이따이한’이라는 단어를 쳐보았다.

라이따이한(Lai Đại Hàn):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자녀를 이르는 말.

교과서 한 구석에서나 잠깐 보았던 비극적인 역사의 단어가, 지금 우리 반 구석에 웅크려 앉아 있던 주으니의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우리의 추리가 맞다면, 으니의 할아버지는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한국으로 강제 귀국당하면서 사랑하는 가족을 베트남 땅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평생을 죄책감과 그리움 속에서 살아가던 할아버지는 고향인 수내리로 돌아와, 베트남의 붉은 흙에서 흔하게 피어나던 그 ‘달리아’ 꽃 구근을 가져와 아무도 찾지 않는 음침한 안골 절터에 비밀 기지처럼 심어 가꾸며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달랬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손녀인 으니를 한국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은 중병에 걸려 요양원에 갇히게 되었고, 외톨이가 된 으니는 학교에서 도둑 누명까지 쓰고 아이들의 따돌림을 받자 할아버지의 유일한 흔적이자 고향의 냄새가 가득한 수내리 안골 달리아 꽃밭으로 도망쳐 숨었던 것이었다. 모든 수수께끼가 눈물겹도록 완벽하게 풀려나갔다.

“왜 그걸 진작 생각 못 했을까? 베트남에는 지금도 쥐 고기를 흔하게 먹는 문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으니는 학교에 다녀도 말투가 다르고 생김새가 미묘하게 다르다고 놀려대는 아이들 때문에 단 하루도 재미가 없었겠지. 매일 아이들과 싸우고 외톨이로 지내다가 강제 전학까지 당하고…… 세상 모든 것이 싫어지니까 결국 할아버지의 영혼이 깃든 수내리로 들어가 버린 거야.”

민우 형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폰 화면을 보여주며 덧붙였다.

“형, 방금 나도 폰으로 찾았는데, ‘으니(Như)’라는 이름이 베트남어로는 ‘원하는 대로, 뜻대로 되라’는 의미로 아주 흔하고 예쁜 이름이래. 한국식 성인 ‘주’ 씨와 합쳐져서 주으니가 된 거지. 우리가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미안하네…… 일단 할아버지부터 뵙자. 이 달리아 꽃 시들기 전에 말이야.”

나와 민우 형은 비장한 각오로 요양원 로비를 지나 5층으로 향하는 승강기에 올랐다.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우리는 복도 끝에 위치한 513호 병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하얀 병실 안에는 여섯 분의 할아버지가 침상에 나란히 누워 계셨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꼬맹이 둘이 검은색 운동복 차림으로 쭈뼛거리며 들어서자, 병실 안 노인들의 시선이 일시에 우리에게로 쏠렸다. 우리는 그중에서 유달리 눈빛이 맑고 반짝이는, 하지만 창백하게 여윈 한 할아버지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 할아버지의 침상 머리맡 협탁 위에만 낡은 플라스틱 꽃병이 놓여 있었기에, 이분이 으니의 외할아버님이 확실했다. 꽃병에 꽂혀 있는 꽃들은 이름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까맣게 심하게 시들어 가고 있었다. 으니가 어제 그 지독한 태풍 속에서도 새 꽃을 꺾어다 갈아 끼우려고 목숨을 걸고 수내리에 들어갔던 이유가 바로 저 시들어가는 꽃병 때문이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민우 형의 손에 들려 있는 싱싱하고 붉은 달리아 꽃송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표정에는 그 어떤 미소나 감정의 변화도 일지 않았다. 내가 먼저 용기를 내어 침상 머리맡으로 다가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우리는요, 수내리 마을에서 주으니하고 같이 학교 다니고 한동네 사는 으니의 진짜 친한 친구들이에요.”

민우 형은 낡은 꽃병에 남아 있던 썩은 물을 화장실에 버리고, 새로 받아온 맑은 물을 가득 채운 뒤 내가 가져온 붉은 달리아 꽃을 정성스럽게 꽂았다. 하지만 새 꽃이 화사하게 피어났음에도 할아버지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어? 이상하다…… 으니 말로는 할아버지가 이 수내리 달리아 꽃을 보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하시고 활짝 웃으신다고 했는데…… 다 거짓말이었나?’

괜한 헛고생을 했다는 생각과 으니의 말이 가짜였을지도 모른다는 실망감에, 형도 나도 슬그머니 시무룩해져서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병실 안의 무겁고 가라앉은 공기가 우리 두 소년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병실 문이 스르륵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번쩍.

순식간에 침상에 누워 계시던 할아버지의 죽어가던 눈빛이,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믿기 힘들 정도로 강렬하게 반짝이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메마른 얼굴에 기적 같은 환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우리는 그제야 깨달았다. 할아버지의 절박한 눈길은, 처음부터 우리가 가져온 붉은 달리아 꽃 따위에는 단 1밀리미터도 머물지 않았다는 것을. 할아버지의 간절한 두 눈은, 우리가 들어오기 전부터 내내 저 두껍고 무거운 병실 문가만을 향해 간절하게 고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우리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할아버지…….”

문가에 서 있는 아이는 다름 아닌 주으니였다. 어제 거대한 태양광 패널 철골에 깔려 온몸에 타박상을 입고 다리를 심하게 다쳤을 터인데도, 으니는 하얀 붕대를 칭칭 감은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룩거리며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으니의 눈에는 병실 안에 서 있는 나와 민우 형의 존재 따위는 아랑곳도 없다는 듯, 오직 침대의 할아버지만 가득 차 있었다.

으니는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침상으로 다가가 할아버지의 마른 손을 두 손으로 꼭 쥐었고, 할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으니의 뺨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셨다. 두 사람만의 완벽한 세상이었다.

민우 형이 슬그머니 내 옷소매를 밑으로 잡아당겼다.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의 모습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 복도로 나왔다.

복도 창가로 쏟아지는 찬란한 여름 햇살을 받으며, 민우 형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나직하게 읊조렸다.

“정우야, 우리가 완전히 착각했어…… 할아버지가 그토록 갈망했던 진짜 ‘꽃’은 수내리에 피어 있는 식물 달리아가 아니었어. 할아버지의 유일한 꽃은 바로 저기 있는 ‘주으니’야. 모진 바람과 상처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살아남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꽃’ 말이야…….”

형의 말에 내 콧날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시들지 않는 꽃.

베트남의 아픈 역사와 한국 땅의 차가운 따돌림 속에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고 서로를 지탱해 준 두 사람. 할아버지에게 주으니는, 그리고 으니에게 외할아버지는, 그 어떤 태풍과 돌개바람이 몰아쳐도 영원히 시들지 않는 가슴속 깊은 곳의 유일하고 영원한 사람꽃이었다. 요양원 창문 너머로 보이는 수내리 안골의 푸른 산등성이가, 오늘따라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하게 빛나고 있었다.

- 완결 -

마음에 드시나요?

원작의 감동적인 주제인 '사람꽃'의 의미를 극대화하고, 앞부분의 긴박한 복선들이 결말에서 아름답게 회수되도록 확장해 보았습니다. 혹시 전체적인 문체나 특정 장면의 비중을 더 늘리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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