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의 폭력에서 벗어나라
우리는 숫자의 시대를 살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출근해서는 실적을 확인하며, 저녁에는 조회 수와 좋아요 수를 확인한다. 학생은 성적으로 평가받고, 직장인은 연봉으로 평가받으며, 기업은 매출로 평가받고, 국가는 GDP로 평가받는다. 숫자는 어느새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점령했다.
원래 숫자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훌륭한 도구였다. 길이를 재고, 무게를 측정하며, 시간을 기록하고, 경제를 분석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숫자 덕분에 인류는 과학과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문제는 숫자가 도구의 자리를 넘어 주인의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숫자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숫자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기 시작했다. 연봉이 높으면 성공한 사람이라 하고, 재산이 많으면 존경받을 사람이라 생각하며, 팔로워가 많으면 영향력이 큰 사람이라고 여긴다. 성적이 높으면 우수한 학생이고, 순위가 높으면 더 가치 있는 사람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는 정말 숫자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일까. 어머니가 자녀에게 쏟아부은 사랑은 얼마의 금액으로 계산할 수 있는가. 평생 곁을 지켜준 친구의 우정은 몇 점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힘겨운 시절 건네받은 따뜻한 위로 한마디는 얼마의 경제적 가치가 있는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한 사람의 숭고함은 몇 평의 아파트와 바꿀 수 있는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은 대부분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다. 사랑, 신뢰, 우정, 양심, 배려, 희생, 감사, 존중과 같은 가치들은 측정할 수도 없고 비교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만 숫자가 보여주는 세계 속에서 자신을 평가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숫자는 때로 폭력이 된다. 숫자가 폭력이 되는 순간은 인간이 숫자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숫자가 인간을 평가하기 시작할 때이다. 숫자는 편리한 기준을 제공하지만, 그 기준이 인간의 존엄보다 앞서게 되면 사람은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평가 대상이 되고 만다.
숫자는 비교를 낳는다. 비교는 경쟁을 낳고, 경쟁은 불안을 낳는다. 더 높은 연봉, 더 큰 집, 더 많은 재산, 더 많은 팔로워를 향한 끝없는 경쟁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지쳐간다. 이미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에도 숫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사람들은 통장 잔고를 떠올리지 않는다. 주가 그래프를 떠올리지도 않는다. 더 많은 좋아요를 받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대신 사랑했던 사람들, 함께 웃었던 시간들, 고마웠던 인연들,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들을 떠올린다. 결국 사람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관계이며, 성과가 아니라 의미이며, 소유가 아니라 사랑이다.
숫자를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숫자는 여전히 필요하다. 다만 숫자가 인간보다 위에 서서는 안 된다. 숫자는 삶을 돕는 도구여야지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돈은 필요하지만 돈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해서는 안 되며, 성과는 중요하지만 성과가 인격을 대신해서도 안 된다.
진정으로 성숙한 사람은 숫자를 다룰 줄 알지만 숫자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숫자의 의미는 이해하되 숫자 너머의 가치를 볼 줄 안다. 사람을 평가할 때 연봉보다 인품을 보고, 성적보다 가능성을 보며, 재산보다 마음을 본다.
세상은 앞으로도 더 많은 숫자를 만들어낼 것이다. 인공지능은 더 정교한 평가 지표를 만들 것이고, 사회는 더 세밀한 순위를 매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인간은 숫자가 아니다. 인간은 측정될 수 없는 존재이며, 비교될 수 없는 존재이고, 그 자체로 존엄한 존재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언제나 숫자 밖에 있다. 그러므로 때때로 숫자의 세계에서 한 걸음 물러나 사람을 바라보자. 성과가 아니라 마음을,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숫자가 아니라 인간을 바라보자. 그때 비로소 우리는 숫자의 폭력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의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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