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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뻘짓-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Cultural Revolution) 1

작성자미션|작성시간25.08.11|조회수47 목록 댓글 0

[대륙의 뻘짓-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Cultural Revolution) 1 ]

1966년 8월 8일 20세기 중국 최고의 뻘짓인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벌어졌던 사회적, 정치적 격동.
공식명칭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문화대혁명

1953년 3월 5일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인 스탈린이 사망한 후,니키타 흐루쇼프가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스탈린주의를 비판하였고 대외적으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와의 공존을 모색한 인물이었다. 
그의 반 스탈린 정책은 중국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에 폭넓은 충격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56년 2월 24일 밤,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개최되던 소련 공산당 제 20회 당 대회가 정규 일정을 끝내고 폐막된 직후, 당 제 1서기인 흐루쇼프가 7시간에 걸쳐서 ‘개인 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보고를 했다. 
소련의 절대 지배자로 군림하며 오점이 없는 인물로 신격화된 스탈린에 대한 규탄이었다.

이 대회에는 중국 공산당도 당 부주석인 주덕을 단장으로 하여 당 비서장 등소평, 부비서 장담진림 등이 수행하는 대표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보고는 외국 대표단을 제외한 비밀 회의에서 발표되었기 때문에 모택동은 이를 3월 10일 의 특종의 번역본으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모택동은 후에 이에 대한 긴급 회의를 열고 “뚜껑은 열렸지만 문제도 불러일으켰다”라고 총평했다. 
소련 공산당과 스탈린조차 반드시 옳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하여 미신을 타파했지만, 내용이나 방법에서 큰 실수를 범했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그는 “스탈린은 실수도 저질렀지만 위대한 공적도 있다. 흐루쇼프의 비밀 보고가 초래한 손실은 될 수 있는 한 보충해야 한다”며 흐루쇼프의 비밀 보고를 비판했다. 
스탈린에 대한 비판은 중국 공산당과 독재적 지도자인 모택동의 신뢰성을 뿌리채 뒤흔들 만한 위험성이 컸기 때문이다. ‘비밀 보고가 초래한 손실’이란 바로 이를 가리킨다. 실제로 비밀 보고가 밝혀진 이후, 폴란드와 헝가리 당 내외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와 동란으로 발전하였고, 헝가리에서는 소련군이 전 영토를 제압하는 유혈 대참사가 일어났다. 모택동의 걱정은 적중했고, 이후 모택동은 흐루쇼프에게 심한 분노를 느끼며 그를 ‘공산당의 배반자’로 간주했다.
당시 소련은 소위 "사회주의 조국"으로 행세하며 일종의 패권주의를 견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가장 많은 인구를 지니고 국제적 발언권도 강할 수 밖에 없는 중국을 통제하려고 했었다.

이러한 흐루쇼프에 대한 적대감이 무리한 ‘대약진 운동’의 입안으로 이어진 것이다. 1957년 11월 6일, 10월 혁명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공산권 국가들의 당 지도자들이 모스크바에 모였다. 
이 날, 소련의 서기장 흐루쇼프는 소련이 공업 생산과 농업 생산으로 15년 이내 미국을 ‘평화적으로’추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모택동은 이를 보고 경쟁 심리를 느껴, 당시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인 영국을 15년 이내에 추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그는 중국이 자체의 목표를 세우고 실천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이는 현실을 망각한 무모한 계획이었다.

1957년 4월 27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모택동 주석의 ‘정풍운동에 관한 지시’를 발표했다. 인민 내부의 모순을 처리한다는 취지로 관료주의, 종파주의 등을 극복하기 위한 정풍운동을 벌일 것이라는 결정이었다. 
이는 1년 전 모택동이 지시한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운동의 강력한 재추진이었다. 백화제방 백가쟁명이란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고,서로 다른 많은 학파가 논쟁을 벌인다’라는 뜻으로, 인민들에게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을 장려하는 방침이었다. 이에 따라 당원뿐만 아니라 당 외 지식인들의 공산당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비판이 허용되었다. 
처음에는 지식인들이 말하길꺼려했으나, 공산당은 ‘말하는 자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言者無罪)’라고 천명하며 적극적인 발언을 호소했다. 
그러나 예상 외로 공산당의 일당독재와 모택동 권력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오자 이는 반우파투쟁으로 변모했다. 1957년 6월 인민일보에 우파의 책동을 비난하는 사설이 실리며 지식인들은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농촌으로 추방되었다.
대중 동원에 의한 ‘대약진’과 대규모 집단화인 ‘인민공사’를 통해 철강이나 곡물 생산을 단숨에 확대시키려는 모택동의 대호령은 생산 현장에 대혼란을 야기했다. 공산주의의 이상 실현을 서두르는 모택동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생산은 조금도 신장되지 않고 오히려 식량난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제사해 운동’

사건은 1958년부터1962년까지 장려된 정책이었다. ‘제사해’란 “4가지 해충을 제거한다”라는 뜻으로, 모택동은 들쥐, 파리,모기 그리고 참새를 멸종시키자고 역설했다. 
참새가 곡식 낟알을 먹어 인민의 노동의 결실을 빼앗는다는 이유였다. 
전국의 참새들의 둥지와 알은 부숴졌고, 어린 새들은 살해당했다. 학교, 작업반, 정부 기관마다 죽인 새의 부피에 따라 비물질적인 상과 표창이 주어졌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참새가 해충도 잡아먹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1960년 4월이었다. 결론적으로 제사해 운동은 메뚜기 개채수의 폭등을 초래해 생태계를 초토화시켰다. 이는 3년 연속 대기근을 초래한 한 원인이 되었다.중국은 1959년부터 3년 연속 대흉작이 계속되고 있었다. 무계획적이고 강제적인 증산 정책이 가뭄이나 수해의 피해를 확대시켰다. 대약진의 성과를 과시하려고 곡물 생산량을 실제의 배 이상으로 부풀렸기 때문에 과대한 공출을 할당받게 되었고, 농민에게는 곡물 징발을 엄격하게 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 말단 간부에겐 ‘우경’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공출을 내지 못하는 농민은 결박해서 매달 아 두거나 집을 부수어 버리기도 했다. 이러한 참극의 정점이 바로 남부의 신양전구에서 발생한 참극이다.신양전구에서는 1958년 4월에 전국 최초로 위성(衛星)공사가 조직되어, 신양전구 당 위원회 서기인 노헌문은 모택동에게 최고의 칭찬을 받았다.
그래서 아무도 노헌문을 거역하지 못했다. 1959년 11월에서 1960년 7월까지, 신양전구 전체에서 ‘생산량 속이기 반대’ 운동으로 인해 체포된 농민들은 공식 자료만으로 1,773명이고 그 중 36명은 옥사했다. 구류당했던 사람은 17020명이며, 667명이 유치장에서 사망했다. 농민들이 씨앗이나 동물들 사료로 이용할 곡물도 모두 징수해가서, 1960년 봄에는 누구나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고 선전한 ‘공공 식당’조차 운영하지 못하게 되었다. 영양 실조로 온몸이 퉁퉁 부어오르는 부종병이 만연하자 농민들은 도망치기도 했지만, 노헌문은“곡식이 없는 것이 아니다. 9할은 사상에 문제가 있다”라고 말하며 마을을 봉쇄했다. 인민들의 인민 공사에 대한 불만감은 더 심화되어 갔다.곡물 증산에서도 경작지에 빽빽이 씨앗이나 모종을 심는 ‘합리밀식’의 성과가 선전되어 한 때는 곡물이 너무 많아질 것이라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열광적인 대중 동원으로 일손을 빼앗기는 일도 많아, 1960년 곡물 생산량은 대약진 이전인 1957년에 비해서 26%나 감소했다. 결과적으로 물가는 폭등했고, 굶주림이나 영양 실조로 죽은 사람은 2천 7백만 명에 이르렀다.-펌글

https://youtu.be/ShpKruYUTzI

중국 문화혁명 격동의 10년 1부 홍위병의 탄생중국,마오쩌둥.모택통,홍위병,중국근대역사www.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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