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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는 사후세계의 구원을 바라는 종교가 아니었다.

작성자-미션|작성시간26.06.07|조회수22 목록 댓글 0

대종교는 사후세계의 구원을 바라는 종교가 아니었다.


이땅에 단군의 이상향을 펼치는 것이고 그것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쳐부수는 것이었다.

청산리 대첩의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빛난 주인공은 김좌진 장군이었다.

그러나 김좌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감독 기획을 한이는 백포 서일(徐一, 1881~1921) 선생이었다.

서일은. 청산리. 전투의 각본을 짜고 군자금과 병사를 대어 승리를 가능케 하였다.

청산리전투의 영웅으로 김좌진 장군은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전투를 기획감독한 서일 선생은 아는이가 드물다.

​전도유망한 엘리트 교육자였던 서일 선생이 왜 거친 만주 땅에서 대종교에 투신하고 무장 투쟁의 총수가 되었을까?

그의 삶과 사상을 따라가 보면 깊은 울림을 마주하게 된다.

​서일 선생은 함경북도 경원 출신으로, 당시 최고 수준의 근대식 교육기관이었던 함경북도 정산학교ㅈ사범과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졸업 후 고향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던 평범한 지식인이었으나,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기면서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나라가 망한 것은 우리의 정신, 즉 민족의 혼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지식 전달만으로는 나라를 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망국이라는 거대한 절망 앞에서 조선인들을 하나로 묶어줄 강력한 정신적 구심점을 찾기 시작했고, 그때 대종교를 만나게 된다.

​당시 많은 지식인이 개신교나 천주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를 접했지만, 서일 선생이 선택한 것은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였다.

여기에는 세 가지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조선인'이라는 강렬한 주체성 회복 대종교는 외래 종교가 아닌,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모시는 민족 고유의 신앙이었다. 서일 선생은 우리는 모두 단군의 자손이며, 하나로 연결된 핏줄이라는 대종교의 교리가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을 정면으로 부수어 버릴 가장 강력한 사상적 무기라고 보았다.

​대종교를 중광한 홍암 나철 선생의 강렬한 민족주의와 도덕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서일 선생은 나철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며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종교의 핵심 간부로 자리 잡을 만큼 깊이 몰입했다.

대종교는 사후 세계의 구원을 바라는 종교가 아니었다. 지상에 단군의 이상향(덕교)을 세우는 것이 곧 종교적 목표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 목표는 곧 조국의 독립과 정확히 일치했다. 즉, 대종교 신도가 되는 것 자체가 독립투사가 되는 길이었던 셈이다.

​1911년, 서일 선생은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북간도로 망명한다. 이후 그의 삶은 거대한 거목처럼 독립운동의 뿌리를 지탱하는 데 바쳐진다.

서일 선생의 사진을 보면 스님처럼 머리를 바짝 깎은 삭발형태를 하고 있다.

​서일 선생이 머리를 그렇게 깎은 것은 불교의 스님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대종교의 독특한 수행 문화와 독립운동에 임했던 비장한 결의 때문이었다.

​대종교는 단군을 모시는 민족 종교로, 머리를 기르고 상투를 틀던 조선의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과는 결이 달랐다. 대종교의 지도자들과 수행자들은 정신을 맑게 하고 오직 민족 구원과 수행에만 집중하기 위해, 머리를 아주 짧게 깎거나 단정하게 정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일 선생의 삭발에 가까운 머리 모양은 종교적 수행자로서의 결연한 자세를 보여준다.

​서일 선생은 종교 지도자이기도 했지만, 만주의 엄혹한 기후 속에서 수천 명의 독립군(북로군정서)을 이끌고 관리하던 군정서의 총재,최고 사령관이였다.

​만주의 겨울은 영하 30~40도까지 떨어지는 극한의 환경이었고, 숲과 산악 지대를 이동하며 게릴라전을 준비해야 했다.

​당시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조국을 찾기 전까지는 머리를 치장하거나 사치하지 않겠다", 혹은 "언제든 목숨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각오의 표현으로 머리를 삭발하거나 빡빡 깎는 경우가 흔했다. 서일 선생의 강인하고 꼿꼿한 눈빛과 어우러진 삭발 머리는 바로 그 당당한 기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청산리 대첩의 위대한 승리 이후, 일본군의 보복을 피해 밀산으로 이동했던 독립군단은 러시아 자유시에서 참변을 겪으며 와해된다.

서일 선생은 수많은 부하와 청년들을 잃은 슬픔과 책임을 통감하며, 1921년 만주 밀산의 한 숲속에서 대종교의 수행법 중 하나인 '폐식법(호흡을 멈추는 수행)'으로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스님처럼 맑고 군인처럼 단단했던 그의 삶은 마지막까지 독립운동 역사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사진은 ㅡ청산리 전투의 감독이며 숨은 영웅 서일선생이다.

조국 독립의 날까지 머리를 치장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삭발하였다.

만주땅 대종교 삼종사묘에 묻혀있다.

#석현장역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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