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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필묵(紙筆墨) 가게 여주인

작성자-미션|작성시간26.06.10|조회수21 목록 댓글 0

지필묵(紙筆墨) 가게 여주인

지필묵 가게 들락거린 유 진사
이 초시 소문 듣고 사색되니 …

 


유 진사가 어험어험 헛기침을 뱉으며 대청에서 내려오자 시동이 얼른 가죽신을 댓돌에 가지런히 놓고
행랑아범은 삐거덕 대문을 열고 하인들은 안마당에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오늘은 나 혼자 다녀올 게야.”

뒤따르던 시동이 대문 밖에서 발길을 돌렸다.

유난히 멋을 낸 유 진사가 장롱 깊숙이 넣어뒀던 새빨간 허리띠를 옥색 비단 도포에 매고 가죽신을 신고
장죽을 뒷짐 진 채 동네를 활보하며 고갯마루로 올라섰다.

사랑방 다락에 지필묵이 잔뜩 있건만 보름 전 저잣거리에 새로 문을 연 지필묵 가게 여주인의 야릇한
눈빛이 아른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대서방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방에서 혼자 글을 읽다가 생각나면 끄적거리는 정도라 일년에 한두번
시동을 데리고 고개 너머 저잣거리 지필묵 가게에 가는 정도다.

보름 전 저잣거리에 갔다가 영감님이 하는 지필묵 가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로 문을 연 가게가 눈에 띄어 들어갔는데 깜짝 놀라게 우아한 여주인이 화사하게 유 진사를 맞았다.

유 진사가 구입한 지필묵을 싸서 시동의 노끈 망태에 넣고 값을 지불하고 나니 여주인이 야릇한 웃음을 흘리며 “진사어른, 차 한잔하고 가시지요”라며 말했다.

가게 뒤편으로 쪽문을 여니 널찍한 내실이 나왔다.

“어험어험” 계면쩍은 헛기침을 하며 따라 들어간 내실에서 유 진사는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벽에는 족자가 줄줄이 걸려 있고 방바닥에는 사군자를 치던 화선지가 그대로 펼쳐 있었다.

당시(唐詩), 유연지(劉延芝)의 <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을 유려한 솜씨로 써 내려간 족자 앞에서 유 진사는 얼어붙었다.

찻잔을 들고 오던 여주인에게 서예가를 묻자 “부끄럽습니다”라며 말을 흐렸다.

유 진사는 보이차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파는 족자가 아니라는 여주인을 밀치고 뺏다시피 그 족자를
말아서 나왔다. 보름이 지난 오늘, 쌀 열가마값 전대를 차고 지필묵 가게로 갔다.

여주인이 놀라서 한사코 받지 않겠다며 전대를 밀쳐내 그 돈으로 비싼 주목연먹과 송나라 때 골동 벼루를 샀다.

우아한 여주인이 가게 문을 닫아 안에서 잠가버리고 술상을 차려 왔다.

이름이 녹지(綠枝)라고만 알려줬지 신상에 관한 걸 물으면 잔잔한 미소로 답했다.

술은 못한다면서도 청주 세잔을 마셨다. 얼굴이 홍당무가 되더니 보료에 쓰러졌다.

사방이 깜깜한 이경이 돼서야 그 집에서 나온 유 진사는 다리가 후들거려 몇번이나 쉬어쉬어 집에 오니
그믐달이 기울어 감나무 가지에 매달렸다.

점잖은 유 진사지만 허우대가 멀쩡하고 전대가 화수분이라 기생 머리도 얹어주고 온갖 여인들 치마를
벗겨봤지만 항상 바지춤을 올릴 때 회한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녹지를 옆에 뉘어두고 바지춤을 올릴 때는 달랐다.

매번 모자라 입던 바지를 던지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다음에 올 날짜를 녹지가 정해주면 어두운 밤중에 찾아갔다.

그렇게 짜릿짜릿한 꿈같은 세월이 흘러갔다.

하오나 낙화 유수철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이 초시가 동헌 마당에 끌려가 곤장 서른대를 맞고 집에 누웠는데 엉덩이에 장독(杖毒)이 들어 의원이 들락거린다는 것이다.

함경도 변방에서 별기군관으로 4년을 근무하고 집으로 돌아온 군관이 부인의 간통 현장을 잡아 사또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그 군관의 부인이 바로 지필묵 가게 주인 녹지라는 사실에 유 진사는 사색이 되어 무당손의 사시나무 가지처럼 와들와들 떨었다.

모래 씹는 것 같아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 심신이 쪼그라들었는데 사또가 보냈다며 이방이 찾아왔다.

사또의 중재로 유 진사는 재산의 반을 내놓고 없던 일로 마무리 지었다.

사또가 중재한다며 왕창 떼먹고 이방도 적지 않게 떼먹었다.

유 진사가 재산의 반을 잃은 것뿐만 아니라 이 초시를 위시하여 지필묵 가게를 들락거린 모든 선비가
녹지 배 위에 올라탄 게 들통나 곤욕을 치렀다.

이방이 여기저기 쏘다니며 중재해 아랫도리를 함부로 휘두른 먹쟁이들의 재산을 왕창 빨아들인 우아한 녹지는 안개처럼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웃 고을 나루터 주막에 들어온 녹지와 군관은 너비아니 안주에 청주를 잔뜩 마시고 나서 가짜 군관이

“녹지씨, 오늘은 합방하면 안될까?”라며 통사정했지만 녹지는 “그런 소리 마시오”라며 쌀쌀하게 거절하고 제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사랑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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