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쿠레 기리시탄:16~18세기 일본의 가톨릭교도]
로만가톨릭의 일본 선교는 1549년 스페인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규슈 가고시마에 입국하면서 막을 올렸다.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의 주된 목표는 영주(다이묘)들을 포섭하여 짧은 시간 내에 되도록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었다. 다이묘가 개종하면 영지 내 백성들이 집단으로 세례를 받는 방식이었기에, 깊이 있는 교리 교육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였다. 그 결과 초기 일본 가톨릭교도인 '기리시탄'들의 신앙 이해는 지극히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라틴어로 된 몇 구절의 기도문을 간신히 외우고 성모와 성인을 공경하는 법을 익혔으나, 이마저도 현지의 불교나 신도(神道) 같은 토착 신앙과 기묘하게 뒤섞인 형태였다.
그리스도교가 불법화된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추방령을 지나 1597년 나가사키에서 26명이 처형당하면서 본격적인 피의 박해가 시작됐다. 특히 1637년 가혹한 세금 수탈과 종교 탄압에 맞서 일어난 대규모 민중 봉기인 ‘시마바라의 난’은 막부가 그리스도교를 체제를 뒤흔드는 위험 사상으로 규정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영주를 잃은 무사(로닌)들과 농민 3만 7천여 명이 16세의 소년 장수 아마쿠사 시로를 중심으로 뭉쳤으나, 에도 막부의 잔혹한 진압으로 전원 몰살당했다. 이 참혹한 사건 이후 막부는 완전한 쇄국 정책을 펼치며 숨이 막힐 듯 정교한 색출 작업을 시작했다. 예수나 성모가 새겨진 동판이나 목판을 밟게 하는 ‘후미에’를 매년 정기적으로 실시하여 통과하지 못한 자들을 온천 구덩이에 던지거나 거꾸로 매달아 처형했다. 또한 모든 백성을 의무적으로 불교 사찰에 강제 등록시키는 ‘종문개’ 제도를 통해 종교적 감시망을 촘촘히 조였다.
그러나 이 잔혹한 탄압도 신앙의 명맥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상당수의 신도들은 막부의 눈을 피해 규슈 서부의 외진 어촌이나 고토 열도 같은 고립된 섬으로 도망쳐 수백 년간 비밀리에 신앙을 이어갔다. 오늘날 학계에서 ‘가쿠레 기리시탄(숨겨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이들이다. 한때 그 수가 15만 명에 이르렀다는 교황청의 기록도 있으나, 막부에 들키면 곧장 십자형이나 참수형에 처해지는 고립된 상황 속에서 이 수치는 그리 의미가 없었다. 철저한 비밀주의와 정통 서방 교회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은 이들의 신앙생활을 기괴하고도 독특한 형태로 변모시켰다.
감시를 피하기 위해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의 상은 자비를 상징하는 불교의 관세음보살을 닮은 ‘마리아 관음’의 형태로 위장되었다. 언뜻 보기에는 아이를 안고 있는 영락없는 불상이었으나, 그들은 품 안의 아이를 예수로, 보살을 마리아로 여기며 은밀히 절했다. 세월이 흐르자 본래의 서구적 성상 모습은 잊힌 채, 이 불교화된 성상이 아예 독자적인 신앙의 뿌리로 자리 잡았다. 동양의 조상 숭배 문화와 결합하면서 박해로 죽은 조상들을 가톨릭의 성인(聖人)과 동일시하여 제사를 지내는 현상도 나타났다.
발각의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는 성경과 교리서는 글로 적지 못하고, 공동체의 우두머리들이 입에서 입으로 외워 전승했다. 그러나 세대가 바뀌며 내용의 왜곡과 현지화는 불가피했다. 어린 예수가 유대교 사원의 랍비들이 아닌 불교 승려들과 논쟁을 벌여 가르침을 주었다고 믿거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낙원의 위치가 다름 아닌 일본의 궁궐이었다고 구전되는 식의 흥미로운 변질이 생겨났다. 라틴어와 포르투갈어의 원형을 간직했던 그들의 기도 ‘오라쇼(Oratio)’ 역시 문맹이었던 신도들을 거치며 점차 불경을 외우는 듯한 억양으로 변했고, 나중에는 전수하는 사제조차 뜻을 모른 채 주술처럼 읊조리게 되었다.
성사(聖事)의 핵심 요소들도 일본의 일상 물질로 대체되었다. 가톨릭 신앙의 중심인 성체성사를 집전하려 해도 밀가루 빵과 포도주가 없었기에, 두 명의 지도자가 서로의 손바닥에 밥 한 숟가락을 얹어주는 것으로 성체를 대신했고, 미사의 포도주는 일본 고유의 술인 사케(청주)가 그 자리를 채웠다. 정식 신부가 없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들은 철저한 조직 체계를 만들었다. 공동체의 총책임자인 '조초(帳方)'를 중심으로, 가쿠레 기리시탄의 달력을 관리하며 대축일과 단식일을 계산하는 '미치히키(導引)', 그리고 갓 태어난 아이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미즈카타(水方)'라는 직책을 두어 대를 이어가며 신앙의 맥을 유지했다.
19세기 접어들어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일본이 문호를 개방하면서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자, 이번에는 프랑스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일본을 찾았다. 1865년 나가사키에 외국인 거주용으로 지어진 오우라 천주당에서 은신해 있던 가쿠레 기리시탄들이 프랑스 출신의 프티장 신부에게 다가와 "우리의 마음은 당신과 같다. 산타 마리아의 성상은 어디 있느냐"고 낮게 속삭였다. 신부도, 성경도 없이 250년의 대박해를 버텨낸 신도들이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온 이 '신도 발견(信徒発見)'의 순간은 세계 종교 사학에 전무후무한 기적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감격도 잠시, 다시 들어온 선교사들은 깊은 딜레마에 빠졌다. 기리시탄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굳게 믿었지만, 오랜 격리 속에 변형된 그들의 믿음은 가톨릭 교회의 정통 교리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 가톨릭의 일종으로 인정하기조차 민망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가톨릭 교회는 이들에게 조상들의 변형된 전통을 포기하고 정통 교회에 새로 입교(복귀)할 것을 권유했다. 당시 약 3만 명의 가쿠레 기리시탄 중 절반은 교회의 지도를 받아들이고 개종하여 정통 가톨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끝내 복귀를 거부했다. 이들에게는 박해의 세월 동안 조상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온 독특한 의식, 손바닥 위의 밥 한 숟가락, 불경처럼 변해버린 오라쇼 자체가 진짜 신앙이었다. 도리어 서구의 정통 가톨릭 가르침을 조상의 전통을 부정하는 낯선 타자의 종교로 여겼던 것이다. 이들은 가톨릭으로 복귀한 이들과 차별화하여 진정한 의미의 '가쿠레 기리시탄'으로 고립을 자처하며 자신들만의 길을 걸어갔다.
놀랍게도 이 마지막 가쿠레 기리시탄 집단이 발견된 것은 현대에 이른 1991년 나가사키현 고토 열도에서였다. 이들은 그 오랜 세월 동안 가톨릭도, 일본 신도도, 불교도 아닌 독특한 형태의 고유 종교를 고집스럽게 유지해 오고 있었다. .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들의 은신처와 마을 흔적은, 인간의 믿음이 극한의 환경에서 어떻게 형태를 바꾸며 완강하게 생존하는지를 보여주는 경이로운 문화적 증거로 남아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Silence'는 가쿠레 기리시탄의 시대,일본에서 가톨릭의 박해가 심했던 시절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만든 것입니다.
마리아관음보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