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장례문화는 이미 오래전 3년상에서 3일장으로 축소되었다.
이제는 그 3일장마저 빈소도 조문도 음식도 없는 무빈소 장례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2024년 무연고 사망자가 12년 전보다 6배 가까이 늘어 6,366명에 달한다는 통계 앞에서, 이것이 일시적 현상이 아님은 분명해진다. 장례식장은 줄어드는데 사망자는 늘어나는 역설 속에서, 죽음을 치르는 형식은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이 지점에서 묵가(墨家)가 떠오른다. 묵자는 유가의 후장구상(厚葬久喪), 즉 호화로운 장례와 긴 복상 기간이 산 사람의 생업을 해치고 국가의 생산력을 소모한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죽은 이를 위해 지나치게 많은 재물을 쓰고, 산 사람이 오랫동안 일상과 생업에서 물러나는 것은 도리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을 해친다고 보았다. 허례를 줄이고 살아남은 자의 현실을 먼저 살피라는 절장(節葬)과 절용(節用)의 논리는, 오늘날 무빈소 장례의 외양과 묘하게 겹친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묵가의 절장은 철학적 결단이었다. 오늘의 무빈소 장례는 사상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압박이 빚어낸 결과다. 가족 공동체가 해체되고, 조문 문화가 약해졌으며, 비용은 치솟는데 상주는 늙거나 홀로 남았다. 지금의 변화는 묵가 사상의 승리가 아니다. 유교적 상례를 떠받치던 기반이 무너진 자리에서, 감당할 몸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묵가처럼 행동하게 된 것에 가깝다.
유교의 장례는 낭비 요소를 품고 있었지만, 죽음이라는 거대한 충격을 공동체가 함께 짊어지는 장치이기도 했다. 빈소는 단순한 접객 공간이 아니라, 고인의 생애가 마지막으로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정리되는 자리였다. 문상객은 고인과 유족의 관계를 확인했고, 상주는 슬픔을 홀로 견디지 않았다. 곡(哭)과 조문, 상복과 음식, 밤샘과 배웅은 번거롭고 때로는 과했지만, 죽음을 사적인 고립 속에 방치하지 않는 사회적 형식이기도 했다.
효율로 다듬어진 무빈소 장례는 그 자리를 없애면서 죽음을 고요한 행정 절차로 만들었다. 장례는 간결해졌지만, 죽음은 더 외로워졌다. 남은 사람의 부담은 줄었지만, 고인의 삶이 마지막으로 불려 나오고 기억되는 시간도 함께 줄어들었다. 문제는 장례의 간소화 그 자체가 아니다. 허례를 걷어내는 일과 죽음의 사회적 자리를 지워 버리는 일은 같지 않다.
결국 오늘의 무빈소 장례는 묵가가 대세가 되었다기보다, 유교적 상례 공동체가 파산한 빈자리에서 묵가적 절용(節用)의 논리가 생존의 언어로 되살아난 현상이다.
조선의 상례는 유교의 이름으로 너무 무거웠고, 오늘의 장례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너무 가벼워지고 있다. 묵자가 비판한 것은 죽은 이를 위한 낭비였지, 산 사람이 죽음을 함께 감당할 자리 자체의 소멸은 아니다
#김희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