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야독(晝耕夜讀)□
옛날 시골 어느 냇가에서였다.
“아이, 그 댕기 어서 이리 내!”
“허허 단번에 내주려고 내가 빼앗은
줄 아는가?”
시냇물이 졸졸 흘러내리는 빨래터에서 정순이는 울상이 되어 떠꺼머리
김 총각에게 손을 내밀어
조르고 있었다.
잘록한 허리에 앞치마를 맵시있게 졸라맨 정순이의 예쁘장한 얼굴을 빙글 빙글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는 김 총각의 얼굴은 여드름이
숭숭 난데다가 어릴 적에 아궁이
앞 에서 졸다 맷방석만한 흉터가 대패로 함부로 밀어 놓 은 것 같은 이마빼기까지 죽 달리고 있었다.
정순이는 더 보기도 싫다는 듯이 휑하고 돌아서며 팔 장을 낀다.
김 총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로 아무 곳에서나 남이 쉽게 덤벼들 수 없는 일들 을 마구 해주며 밥을 얻어먹곤 했다.
특히 그가 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는 노총각이 다 되어 있었다.
얼굴 한쪽이 찌그러지고 곰보에 언청이라고 해도 장가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는데
그만 정순이를 보자 첫눈에 반해 버렸다.
허나 원래 본때 없이 생긴데다가
미 련하기로는 또 남 못지 않은 위인이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데 저 예쁜 줄 아는 정순이가 눈이나
한 번 돌려보겠는가?
마음이 후끈 단 것은 김 총각뿐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볼상없는 풍모를 하고 있어도 힘은 장사라 온 동네의 힘든 일은 으레 김 총각에게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김 총각에게는 또 하나의 재주가 있었다.
그는 바둑을 꽤 두었다.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니고 이집 저집 머슴살 이로 굴러다니는 동안 사랑에서 선비들이 바둑 두는 것을 보고 어깨 너머로 익힌 솜씨였다.
그리하여 바둑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그럴 만한 적수 역할을
해 주는 터라 그럭저럭 김 총각은 쫓겨나지 않고 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 김 총각의 소원이라면 배를 두드리며 빈속을 쌀밥으로 꽉 꽉 채워 보았으면 하는 것과 정순이를 한 번 안아보는 것 이었으나 물론 두 가지 다 그에겐 불가능한 꿈이었다.
허나 쌀밥은 안 먹어도 대신 보리밥으로나마 배를 채울 수 있어서 괜찮았으나 상사병만은 그도
어쩔 수 없었다.
언젠가는 제 답답한 심정을 털어 놓으리라 하고 틈만 있으면 멀찍이서 정순이의 꽁무니를 쫓아다녔지만 신통한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도 마침 바둑판에 불려 가고 있는데 정순이가 빨래터에서 혼자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 것이다.
김 총각은 신이 나서 살금살금 정 순이의 뒤로 다가가 정순이의 갑사댕기를 잽싸게 채어서 품에 넣고 한달음에 도망치려고 하자
놀란 정순이는 잽싸 게 김 총각을
잡아 갑사댕기를 내놓으라고 조르고 있는 터였다.
“정말 안 내 놓을 테야?”
“헤헤...아랫물과 윗물이 합칠 때 주마.”
“왜 남의 댕기는 빼앗아 가지고 난리야? 남이 보면 창피 하지, 어서 돌려줘.”
“석 자 가위 무명수건 기둥에 걸어 놓고 너 낯 닦고 나 낯 닦고 할 때 주마.”
김 총각은 서로 장가들고 시집와서 한데 얼려 살며 한 수건으로 낯 씻을 때 주겠다는 것이었다.
정순이는 기가 막혀 김 총각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쌩긋 웃으며 눈을 내려뜬다.
“너 정말 나한테 장가들고 싶니?”
김총각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럼 정말이야. 내가 정순이를 얼마나 좋아하는 줄 알아?”
“알았어. 댕기를 너한테 빼앗겼으니 이도 인연이라면 인연인가 봐. 그렇지만 지금같이 머슴살이를 하고 있는 너 에게 시집가긴 싫어,
네가 벼슬해서 벽제소리를 내며 돌 아오면 시집갈 테야!”
“정말? 약속을 꼭 지키는 거지?”
김 총각은 시집오겠다는 소리만 믿고는 댕기를 돌려주곤 희색이 만면하여 돌아왔다.
머슴방에 돌아와서야 김 총각은 이내 자기가 속은 것을 깨달았다.
사실, 자기 주제꼴에 무슨 벼슬을
할 수 있겠는가?
배가 아무리 고파도 슬픈 줄 몰랐던 김 총각은 처 음으로 가슴이 저릿저릿해지고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리고 자기 신세가 한스러웠다. 이튿날이 되어서였다.
김 총각은 막연한 생각으로 괴나리 봇짐을 짊어지고 그 마을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몇 십 리 길을 걷고 나니
그리운 정순이며 벼슬도 모두
잊어 버렸다.
다만 생각나는 것은 밥 한 그릇 뿐이었다.
해가 거의 질 무렵 이었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배창자가 등허리로 빨려 들어가 고 다리가 후들거려 우선 음식 냄새가 날 만한 골목만 기웃거리다가 한 골목을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
때는 초여름이라 골목 안에는 대문 밖에다 평상을 내놓고 두 노인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김 총각은 다리도 아프고,
또 두 노인의 바둑 솜씨도 궁금하여 평상 옆에 발을 멈추고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 구경에 열중해 있는데 언제 왔는지 시꺼먼 수염이 수더분하게 난 한 늙은이가 자기 옆에 서서 자기와 마찬 가지로 바둑판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을 알아 차렸다.
김 총각은 다시 바둑판으로 눈을 돌렸다.
바둑판의 형세 는 흑이 백에게 자꾸 휘둘러 먹히고 있었다.
그러나 김 총각이 보기에는 흑이 헤어나갈 수 있는 구멍이 충분히 엿보였다.
그런데도 흑을 가진 노인은 심사숙고 하여 한 참을 지켜보더니
드디어 흑 한 점을 놓는데 마땅히
놓아 야 할 급소에 놓지를 않고 다른 곳에다 놓는 것이었다.
김 총각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저런!’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침내 흑이 졌다.
그러자 이긴 노인이 김 총각을 올려다보며
“한 판 하겠 소?” 하고 자신만만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게 하지요.”
김 총각은 흑을 놓던 노인의 자리에
앉았다.
허나 바둑을 절반도 놓기 전에 노인의 말은 다 죽고 더 싸워 볼 여지도 없이 김 총각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노형 바둑 수가 밝소.”
이제까지 죽 옆에 서서 구경하던 시커먼 수염의 사나이도 감탄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가 했더니 김 총각더러
“내 집에 가서 한 번 겨루어 보지 않겠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김 총각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리였다.
그런데 멋모르고 따라가 보니 시꺼먼 수염의 사나이는 바로 상감이 아닌가? 상감은 가끔 변복을 하고 항간을 암행하는 습관이 있어 이 날도 시꺼먼 수염을 붙이고 나온 것이었다.
김 총각은 숨이 칵 막히는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둑에 이기지 말걸!’
아무리 후회를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제 운명을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김 총각이 상감 앞에 나아가니 좀 전에 있었던 지저분하고 억세게 보이던 수염은 간 데가 없고
명월 같이 훤한 용안이 앞에 있었다.
김 총각은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바둑판만 뚫어지게 내려다 봤다. 상감은 백을 쥐고 김 총각은 흑을 쥐었다.
그리고 흑을 쥔 김 총각의 선수로 시작이 되었다.
김 총각은 그야말로 사생결단,
온 정신을 가다듬어 한 점 한 점
신중히 놓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상감이 이만저만 꿀리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되니 이번엔 도리어 상감을 이길 가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첫판을 김 총각이 이십 집을 이겼다. 상감의 흰 얼굴에 붉은 기가 확 솟구치는 것을 김 총각은 곁눈으로 흘겨 보았다.
‘이번에는 반드시 지리라.’
이렇게 단단히 마음을 먹고 두 번째 판을 벌렸는데 어찌 됐는지 김 총각이 첫판보다 더 많은 삼십 집이나 대승을 거둔 게 아닌가?
김 총각이 얼핏 상감을 보니 안색이 창백해지는 듯 하더니 마침내
상감은 바둑알을 놓고는 김 총각을 빤히 쳐다 보며
“자네, 보아하니 서울에 사는 사람 같지 않은데 어디에 사는 누구인고?” 하고 물었다.
“예, 소인은 김태섭이라 하옵고 살기는 전라도 후백제의 수도인 전주에 사옵니 다.”
“그렇게 시골에 사는 자가 어이하여 서울에는 왔는고? 그리고 글공부는 얼마나 했는고?”
“예, 소인은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막일을 해주고 몇 푼 벌어 살아가느라고 배운 것이라고는 일자무식이옵니다.
그리고 소인이 서울에 상경한 것은
제 가 살고 있는 동네에 정순이라는 처녀가 있는데 그 처녀 를 제가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머슴살이를 하거나 막노동을 해서 살아가는 총각이라서 저와 결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벼슬을 해야만 저와 결혼하겠다는 것입니다.
상감께서 제 능력에 맞는 벼슬자리 하나 내려주실 수 없으신가요?
좀 도와주십시오. 상감마마”
김 총각은 이렇게 말한 뒤에 코가 땅에 닿도록 상감께 큰 절을 올렸다.
그러자 상감은 이내 곰곰히 생각에 젖는 듯 하더니
“그래 그대에게 전주 덕진동에 있는 왕능 참봉에 명하겠네.
내 임명장을 부탁해 놓겠으니 고향에 내려갈 때 가지 고 가서 정순이 아가씨에게 보이고 결혼하여 잘 살아가도 록 하게.
그리고 낮으로는 능참봉 일을 하고 밤으로는 공부를 하여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도록 하게.
그렇게 되 면 암행어사도 될 수 있고 그리고 그에 버금가는 좋은 벼슬 자리들은 얼마든지 있네.
김 총각이라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말하는 것이네.”
이렇게 하여 김 총각은 바둑 때문에 능창봉의 벼슬을 얻어 금의환향하니 과연 정순이가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다.
즉시로 결혼하니 첫날밤의 그 운우의 정이란 그렇게 황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김 총각은 상감의 말대로 밤이면 계속해서 공부를 하여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니 이 때부터 주경야독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지켜본 시골의 많은 젊은이들이 너도 나도 낮엔 일하고 밤에는 책과 더불어 씨 름하는 주경야독의 경지에 빠져 들었다고 한다.
#사랑방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