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국지의 세계에 탐닉하다
- 3부 일통 천하 (92)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1장 하나를 다시 여섯으로 (5)
처음의 경계심을 품었던 때와 달리 초회왕(楚懷王)은 매달리듯 장의에게 말했다.
"우리가 동맹을 허락한다면 정말로 진왕은 우리에게 상어(商於) 땅을 내줄 작정이오?"
"왕께서 정히 믿지 못하신다면 신이 목숨을 걸고 약속하겠습니다. 왕께서는 아무 염려마시고 제(齊)나라와 손을 끊으신 후 진(秦)나라와 우호를 맺으십시오. 그러면 초(楚)나라는 가히 천세 만대까지 중원 땅의 반을 호령하실 수 있습니다."
장의의 말이 끝나자마자 초회왕(楚懷王)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장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선생의 가르침에 따르겠소. 부디 상어(商於) 땅을 할양하겠다는 약속을 어기지 마시오."
이렇게 하여 장의(張儀)는 난제 중의 난제인 초(楚)나라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세 치 혀가 또 한번 유감없이 그 위력을 발휘한 순간이었다.
- 상어(商於) 땅 6백 리를 할양받는 조건으로 진(秦)나라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이러한 소식은 곧 초나라 조정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 무렵, 초(楚)나라 신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나는 기존의 합종을 유지하자는 친제파(親齊派)였고, 다른 하나는 진나라와 손을 잡음으로써 초나라의 영항력을 더 키워나가자는 친진파(親秦派)였다.
초회왕(楚懷王)과 장의의 회담을 주선한 근상(靳尙)은 당연히 친진파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회담이 순조롭게 끝났음을 알고 초회왕을 찾아가 치하했다.
"진(秦)나라와 같은 강대국을 맹방(盟邦)으로 하신 것과 상어 땅 6백 리를 얻은 것을 경하드립니다."
반면, 친제파(親齊派)의 신료들은 한결같이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 아, 왕께서 장의(張儀)의 수단에 넘어가셨구나.
친제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진진(陳軫)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진진은 원래 진(秦)나라 사람으로 소진, 장의 등과 같은 유세객(遊說客)이었다.
세객은 원래 고국(故國)에 대한 개념이 약했다.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다 벼슬을 얻은 곳이 곧 자기 고국이 된다.
진진(陳軫)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한때 진(秦)나라에서는 잘 나가는 세객이었으나 장의의 등장 이후 요직에서 밀려났다.
그 후 진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와 객경(客卿)이 되어 합종책의 지지자가 된 것이다.
진진(陳軫)은 초회왕이 장의에게 초ㆍ진 동맹을 수락했다는 말을 듣자 얼굴빛을 달리했다.
동료 대부 굴원(屈原) 등과 더불어 초회왕을 찾아가 아뢰었다.
"진(秦)나라와 우호를 맺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신이 보건대, 이번 일은 기뻐할 일이 아니라 슬퍼할 일입니다."
초회왕(楚懷王)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과인은 이번에 군대를 쓰지 않고도 상어(商於) 땅 6백 리를 얻게 되었소. 그런데 기뻐할 일이 아니라 슬퍼할 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왕께서는 장의를 믿으십니까?"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으리오?"
"신은 장의의 사람됨을 잘 압니다. 진(秦)나라가 우리 초나라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는 까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제(齊)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나라와 수교를 끊으면 진나라는 더 이상 우리 나라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齊)나라에 단교를 선언하는 순간 진(秦)나라의 태도는 돌변할 것이 분명합니다. 더 이상 우리 초(楚)나라를 경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
"왕께서는 지금 장의(張儀)에게 속고 계십니다. 신이 장담하건대, 제(齊)나라와 단교하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첫째, 장의는 결코 상어(商於) 땅을 내주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제(齊)나라는 우리를 원망하여 도리어 진(秦)나라와 동맹을 맺을 것입니다. 셋째, 진나라와 제나라가 힘을 합해 우리 초(楚)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이번 일을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회왕(楚懷王)의 입에서는 엉뚱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대는 장의(張儀)를 질투하는 게요?"
진진(陳軫)은 기가 막혔다.
더 이상 말할 의욕이 일지 않았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굴원(屈原)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거들었다.
"왕이시여, 눈을 뜨십시오. 진진(陳軫)이 한 말은 모두 옳습니다. 장의는 모든 일에 신의(信義)가 없는 사람입니다. 결코 그를 질시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정히 왕께서 진(秦)나라와 동맹을 맺으시겠다면 상어 땅을 접수한 후에 단교해도 늦지 않습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본 친진파 대표 근상(靳尙)이 서둘러 반론을 펼쳤다.
"그대들은 교묘한 말로 왕의 총기를 어지럽히지 마시오. 우리가 제(齊)나라와 단교하지 않는다면 진나라가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상어(商於) 땅을 내주겠소?"
잠시 마음이 흔들렸던 초회왕(楚懷王)은 근상의 말에 다시 힘을 얻었다.
"장의(張儀)는 결코 과인을 저버릴 사람이 아니다. 진진과 굴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나는 기어코 이번에 상어 땅을 얻어내리라."
이리하여 초회왕(楚懷王)은 제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단교를 선언하는 한편, 장의에게 초나라 재상의 인(印)과 황금 1백 일(鎰), 그리고 네 마리 말이 끄는 비단 수레 10승(乘)을 하사했다.
아울러 대부 봉후축(逢侯丑)을 불러 장의를 따라 진나라로 가 상어 땅 6백 리를 받아오라고 명했다.
이런 과정을 직접 지켜본 진진(陳軫)은 궁을 물러나오며 크게 한탄했다.
"아아, 우리 왕께서 편안히 세상을 떠나시지 못하겠구나."
일종의 예언이랄 수 있는 이 말은 후일 그대로 적중한다.
좀 엉뚱한 얘기이긴 하지만 진진(陳軫)이라 하면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사족(蛇足)'이라는 말이다.
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진진(陳軫)은 진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제(齊)나라에 사자로 간 적이 있었다.
마침 그때 초나라 영윤 소양(昭陽)이 군대를 거느리고 제나라 땅을 침범했다.
소양은 서주 땅을 점령하고 그 기세를 몰아 임치성까지 쳐들어올 기세였다.
이에 겁을 먹은 제민왕(齊湣王)이 진진을 불러 물었다.
- 어떻게 하면 초군을 물리칠 수 있겠소?
진진(陳軫)이 호언장담했다.
- 왕께서는 아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초(楚)나라 진영으로 가서 저들이 돌아가도록 설득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초나라 진영으로 가 초군 대장 소양(昭陽)을 만나 물었다.
- 초(楚)나라에서는 적군을 쳐부수고 적장을 죽이는 사람에게 어떤 공훈(功勳)을 내립니까?
소양(昭陽)이 대답했다.
- 싸움에 이긴 장수에게는 상주국(上柱國, 초나라 벼슬 이름)이라는 관직에 올리고, 집규(執珪, 초나라 작위 이름)라는 작위에 봉하는 것이 관례요.
진진(陳軫)이 또 물었다.
- 그보다 더 높은 관작은 무엇이 있습니까?
- 영윤(令尹)이 있소.
이에 진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 장군께서는 이미 영윤의 벼슬에 올라 있습니다. 개선하여 돌아간들 한 사람이 또 영윤(令尹) 벼슬에 오를 수는 없습니다. 제가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의 집에 축하할 일이 생겼다.
집 주인은 문객들을 청해 함께 술을 마셨다.
그런데 술이 모자랐다.
이에 문객들끼리 의논했다.
"이 술을 여러 사람이 마시면 모자라겠지만 한 사람이 마시면 능히 취할 것이오. 우리 모두 뱀을 그려 가장 먼저 뱀을 그린 사람에게 이 술을 다 마시게 하는 것이 어떻소?"
"좋은 생각이오. 자, 그러면 지금부터 각자 뱀을 그립시다."
문객들은 재빨리 손을 놀려 뱀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 문객(門客)이 술잔을 낚아채며 말했다.
"내가 가장 먼저 뱀을 그렸으니 이 술은 나의 것이오. 그대들은 이제야 대가리를 그리는가? 나는 능히 다리까지도 그릴 수 있겠도다."
그러고는 다른 한 손으로 뱀의 몸통에 다리를 그려넣는 것이었다.
그러자 두 번째로 뱀을 그린 사람이 술잔을 빼앗으며 말했다.
"뱀에게는 원래 다리가 없소. 그런데 뱀에 다리를 그렸으니 그것은 뱀이라 할 수 없소."
결국 술은 두 번째에 그린 사람의 차지가 되었다.
- 이 얘기가 뜻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장군께선 이미 큰 공을 세웠고 돌아가시면 여전히 영윤(令尹) 자리에 머물러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제(齊)나라 도읍을 칠 까닭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 만일 임치성을 공격하다가 큰 손실이라도 입으면 오히려 생명을 잃거나 관작을 빼앗길 뿐입니다. 이것은 바로 방금 전에 예를 든 '뱀의 다리'를 그린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이에 소양(昭陽)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선생의 말씀이 옳소.
그 날로 소양은 군대를 돌려 초(楚)나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안 해도 될 일을 굳이 하는 것을 '사족(蛇足)'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족' 때문에 큰 공을 세울 기회를 놓친 소양(昭陽)을 생각하면, 어느 것이 사족이고 어느 것이 사족이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도 꽤나 어렵고 중요한 일인 듯하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