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국지의 세계에 탐닉하다
- 3부 일통 천하 (93)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1장 하나를 다시 여섯으로 (6)
초회왕(楚懷王)이 제나라에 대해 단교를 선언 하는 것을 확인한 장의(張儀)는 봉후축과 함께 초나라를 떠났다.
진(秦)나라로 가는 동안 그는 형제를 대하듯 봉후축을 친밀하게 대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딴 계획을 품었다.
'어떻게 하면 상어(商於) 땅을 내주지 않을 것인가.'
진나라 도읍인 함양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장의(張儀)는 일부러 술에 취한 척 달리는 수레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좌우 시종배들이 놀라 황급히 부축해 장의를 일으켰다.
장의는 얼굴을 찡그리며 엄살을 떨었다.
"다리가 부러진 모양이오. 급히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소. 나는 먼저 갈 테니 그대는 천천히 오시오."
장의(張儀)는 누울 수 있는 수레로 바꿔타고 먼저 함양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즉시 진혜문왕에게 편지를 써서 그 간의 일을 보고한 후 덧붙였다.
- 무슨 일이 있어도 봉후축(逢侯丑)을 만나지 마십시오. 신은 당분간 집에서 요양하겠습니다.
며칠 후 함양에 당도한 봉후축(逢侯丑)은 진혜문왕을 알현하기 위해 궁으로 갔다.
그러나 진혜문왕(秦惠文王)은 급히 처리할 일이 있으니 며칠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봉후축(逢侯丑)은 다시 장의의 저택을 방문했다.
하지만 그 역시 다리가 낫지 않아 만날 수 없다는 답변만 주었을 뿐 통 대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3개월이 후딱 지나갔다.
혼자 가슴앓이하던 봉후축(逢侯丑)은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보내어 초회왕에게 보고했다.
- 진왕(秦王)을 만날 수 없어 아직 상어(商於) 땅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찌하오리까?
초회왕(楚懷王)은 지레짐작했다.
'장의(張儀)는 내가 제나라와 단교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여기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확실한 것을 보여주지.'
그러고는 송유(宋遺)라는 장수에게 명하여 제나라 국경으로 가 그 곳 관리들을 향해 제민왕의 욕을 한바탕 하고 돌아오게 했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제민왕(齊湣王)은 크게 격분했다.
조정 신료들에게 선포했다.
- 초(楚)나라는 이제 더 이상 동맹국이 아니다. 나는 진(秦)나라와 우호를 맺고 함게 초나라를 공격하리라!
이어 신하 한 사람을 뽑아 진나라로 보냈다.
진나라 재상 장의(張儀)는 제나라에서 화친 사절이 왔다는 보고를 듣고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제 병이 다 나았으니 궁으로 들어가봐야겠다."
장의(張儀)는 궁으로 들어가는 길에 조문 앞을 서성거리는 봉후축(逢侯丑)을 보았다.
그는 깜짝 놀라는 체하고 물었다.
"그대는 어째서 땅을 받아가지 않고 여태까지 여기에 머물러 계시는게요?"
봉후축(逢侯丑)은 장의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달려와 애걸했다.
"진왕께서 도무지 저를 만나주지 않습니다. 재상께서는 어서 들어가 왕께 아뢰어 상어(商於) 땅의 경계를 정해주십시오."
장의(張儀)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듯 능청을 떨었다.
"그깟 일 가지고 왕께 아뢸 필요가 무엇 있소? 초(楚)나라에 주기로 한 땅은 내가 국록으로 받은 상어 땅 중 사방 6리뿐이오. 내가 주면 그만일 뿐 굳이 왕의 허락을 받을 것까지도 없소."
봉후축(逢侯丑)은 기절초풍할 듯 놀랐다.
"6리라니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내가 우리 왕에게서 위임받아온 것은 6백 리입니다. 6리는 말도 되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있소? 아마 초왕(楚王)이 잘못 들으신 게지요. 그 땅이 어떻게 해서 얻은 땅인데, 아무런 대가없이 다른 나라에 선뜻 내준단 말이오?"
"그대 같으면 그리하겠소? 나는 상상도 못할 일이외다."
봉후축(逢侯丑)은 기가 막혔다.
더 이상 말해봐야 소용없음을 알고 휭하니 초(楚)나라로 돌아가 초회왕에게 보고했다.
그제야 장의에게 속은 것을 안 초회왕(楚懷王)은 약이 오르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여 크게 소리쳤다.
"내가 장의란 놈을 산 채로 잡아 씹어먹지 않으면 결단코 왕위에 앉아 있지 않으리라!"
그러고는 굴개(屈匃)를 대장으로 삼고 봉후축(逢侯丑)을 부장으로 삼아 진나라 단양(丹陽) 땅을 향해 쳐들어가게 했다.
총 병력은 10만.
BC 312년(진혜문왕 26년, 초회왕 17년)의 일이었다.
이 해는 곧 연소왕(燕昭王)이 즉위한 해이기도 하다.
- 진초대전(秦楚大戰).
사가(史家)들은 이때의 싸움을 이렇게 부르고 있다.
그러나 거창한 이름답지 않게 승패는 너무나 쉽게 판가름이 났다.
아니, 애초부터 승자와 패자는 정해져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방 6백 리를 6리로 속인 진(秦)나라는 초(楚)나라의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다.
위장(魏章)을 대장으로 삼고, 감무(甘茂)를 부장으로 삼아 군사 10만 명을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여기에 초나라의 행위에 분노한 제민왕(齊湣王)이 5만 군사와 함께 장수 장광(章匡)을 보내왔다.
치밀한 계산하에 군대를 낸 진혜문왕(秦惠文王)과 이성을 잃고 충동적으로 군대를 낸 초회왕(楚懷王).
첫 전투는 단양에서 벌어졌다.
여기서의 단양은 단수(丹水)북쪽 일대의 땅을 말함이다.
지금의 섬서성 단봉현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
장의(張儀)가 할양하기로 약속한 상어 땅과 그다지 멀지 않다.
이 단양 전투에서 초군(楚軍)은 대패했다.
병사 8만 명이 죽고, 대장 굴개(屈匃)와 부장 봉후축(逢侯丑) 등 장수급만도 7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진군(秦軍)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초나라 영토인 한중 남부 지역까지 진격, 사방 6백 리 땅을 점령했다.
6백 리 땅을 얻으려다 오히려 6백 리 땅을 빼앗긴 것이었다.
초회왕(楚懷王)은 더욱 격분했다.
숨을 쉴 수조차 없을 지경이 되었다.
- 이대로 있을 수 없다.
전국에 징집령을 내려 또 한차례 격전을 준비했다.
제 2차 전투는 남전(藍田)이라는 땅에서 벌어졌다.
남전은 지금의 섬서성 서쪽 일대로 진(秦)나라 영토다.
초군이 방향을 바꿔 기습공격을 한 것이다.
그러나 남전 전투에서도 초군(楚軍)은 대패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어떠한 시대인가.
조금이라도 약점이 보이면 사방에서 물어뜯으려고 덤벼드는 때였다.
- 초군 대패.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주변의 열국들이 기회를 놓칠세라 초(楚)나라 땅을 향해 쳐들어왔다.
그것은 죽어가는 사자를 향해 하이에나가 덤벼드는 광경과도 같았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위(魏)나라와 한(韓)나라였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출병하여 등읍(鄧邑)까지 남하했다.
등읍은 춘추시대에는 채나라 땅이었으나 채가 멸망하면서 초나라 영토가 되었다.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 서남쪽에 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