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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지(列國志)*

- 3부 일통 천하 (96)

작성자-미션|작성시간26.06.12|조회수20 목록 댓글 0

🎎 열국지의 세계에 탐닉하다
- 3부 일통 천하 (96)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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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장 하나를 다시 여섯으로 (9)

장의(張儀)가 초나라의 수도 언영(鄢郢)을 출발하고 난 뒤였다.

그 무렵, 친제파의 대표 중 한 사람인 굴원(屈原)은 지난해에 파기된 제(齊)나라와의 동맹을 다시 맺기 위해 제나라에 가고 없었다.

굴원(屈原)은 중국 최고의 시인 중 한 사람이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이소(離騷)>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원래 이름은 평(平), 자(字)가 원(原)이라서 굴원이라 불리고 있다.
그는 학식이 높았을 뿐 아니라 성품이 강직하고 급했다.
그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거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초ㆍ진ㆍ제나라 간의 외교 관계에 관해서만 얘기하겠다.

굴원(屈原)이 겨우 설득하여 제나라와 다시 우호 관계를 맺고 언영으로 돌아왔을 때 장의는 막 그 곳을 떠난 뒤였다.

굴원은 초회왕(楚懷王)이 장의를 석방했을 뿐 아니라 진(秦)나라와 우호 조약을 맺은 사실을 알고는 크게 격분했다.
궁으로 들어가 거친 목소리로 항의했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장의(張儀)를 죽이지 않고 살려보내셨습니까? 아니 살려보낸 것까지도 괜찮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우호 조약까지 맺으셨습니까?"

초회왕(楚懷王)은 장의가 했던 말을 그대로 들려주고 나서 말했다.
"소진도 죽고 없는 마당에 합종(合縱) 동맹이 계속 유지될 것 같지 않아 진나라와 화친하기로 했던 것이오."

굴원(屈原)은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왕께서는 장의에게 속으셨습니다. 장의(張儀)는 오로지 합종을 깨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말로는 무엇인들 약속하지 못하겠습니까? 왕께서는 어찌 그 점을 헤아리지 못하십니까?"

"왕께서는 진(秦)나라와 화평하기 전에 천하의 다섯 나라로부터 지탄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서둘러 군사를 보내어 장의를 잡아오십시오."

초회왕(楚懷王)은 귀가 얇았다.
굴원의 말에 금세 후회하는 마음이 일었다.
급히 군사를 보내어 장의를 잡아오게 했다.

그러나 장의(張儀)는 이미 그러한 것을 예측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레를 달려 진(秦)나라 영토로 들어간 뒤였다.

이에 초회왕(楚懷王)은 굴원에게 다시 말했다.
"기왕 약속한 것이니 어찌 그것을 저버릴 수 있으리오. 과인은 진(秦)나라와의 우호를 유지하겠소."


생환(生還).
죽음의 소굴에서 살아나온 장의는 감격했다.
내심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는 함양으로 돌아가자마자 진혜문왕에게 아뢰었다.

"신은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돌아와 다시 왕을 뵙게 되었습니다. 이제 진실로 말하노니, 왕께서는 초(楚)나라에 대해 신용을 잃지 마십시오."
"어찌하는 것이 신용을 잃지 않는 것이오?"

"먼저 지난날 약속했던 한중(漢中) 땅의 반을 반환하고 초나라와 통혼(通婚)하십시오. 그리하면 초나라는 우리 진나라를 신용하게 될 것이요, 나아가 다른 다섯 나라들도 제각기 우리 나라와 친교 맺기를 원할 것입니다."
"좋은 일이오. 선생이 시키는 대로 하리다."

진혜문왕(秦惠文王)은 장의의 말에 따라 한중 땅의 반을 초(楚)나라에 떼어주었다.
동시에 초회왕의 딸을 맞이하여 세자 탕(湯)의 아내로 삼고 자기 딸을 언영으로 보내어 초회왕의 아들 공자 난(蘭)과 혼인시켰다.

이에 초회왕(楚懷王)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장의가 과인을 속이지 않았구나!"

그 해, 장의(張儀)는 자신의 생애 최고의 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초나라와의 화평을 성사시킨 공을 인정받아 다섯 고을을 하사받고 무신군(武信君)이라는 작호까지 받았다.

뿐만 아니다.
다시 열국 순방길에 올라 한(韓)과 제(齊)와 조(趙), 연(燕)나라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합종 동맹을 깨고 자신의 평생 숙원인 연횡책(連衡策)을 이루어낸 것이었다.

아무리 언변술을 타고 났다 해도 웬만한 성의와 노력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역대 최고의 외교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만 태생의 일본 작가 진순신(陳舜臣)은 이 같은 장의의 활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잇다.
- 장의(張儀)는 괴물이다.
소설가다운 평이다.
그러나 장의의 절정기는 짧았다.

육국을 분리시킨 후 이를 복명하기 위해 함양으로 돌아가는 도중, 진혜문왕이 세상을 떠나다.

그랬다.
진혜문왕(秦惠文王)의 죽음과 더불어 장의(張儀)의 전성기도 끝났다.
BC 311년, 재위 27년으로 진혜문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탕(湯)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진무왕(秦武王)이다.

진무왕은 세자 시절부터 장의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이를 눈치챈 장의의 정적(政敵)들이 그 동안의 서러움을 만회하기 위해 일제히 장의에 대한 탄핵을 올렸다.

- 장의(張儀)는 신의가 없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기를 애걸하고 있습니다. 왕께서 계속 장의를 등용하신다면 아마도 열국은 우리 진(秦)나라를 광대의 나라로 여길 것입니다.

지난날 진나라를 개혁한 상앙(商鞅)과 처지가 너무나 흡사하다.
진(秦)이라는 나라의 성향이 애초 그러한 모양이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여기에 제민왕이 동맹을 깨고 반기를 들었다.
진혜문왕의 죽음을 기화로 제(齊)나라가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제민왕(齊湣王)은 우선 초회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함께 진나라를 치자고 꼬드겼다.

그러나 초회왕(楚懷王)은 차마 자신의 사위인 진무왕을 칠 수가 없었다.
거절의 뜻을 비치자 제민왕은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 땅을 공격했다.

초회왕(楚懷王)은 진나라에 인질을 보내고 원군을 요청했다.
진군이 출병한다는 소식에 제민왕(齊湣王)은 재빨리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때부터 제민왕은 스스로 중원 맹주를 자처하며 진나라에 대항했다.

이로써 소진의 합종도 깨졌지만 장의의 연횡책(連衡策)도 무너진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확실히 진나라 내에서의 장의(張儀)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장의의 정적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장의를 몰아붙였다.
진무왕(秦武王)은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았지만 여론은 점점 장의에게 불리해져갔다.

눈치 빠르고 지혜로운 장의(張儀)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조만간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닥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내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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