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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지(列國志)*

- 3부 일통 천하 (100)

작성자-미션|작성시간26.06.16|조회수25 목록 댓글 1

🎎 열국지의 세계에 탐닉하다
- 3부 일통 천하 (100)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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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장 조무령왕과 호복기사 (1)

이제 장의(張儀)는 죽었다.
그를 등용하여 중원을 호령한 진혜문왕도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 진무왕(秦武王)도 재위 4년 만에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진(秦)나라는 여전히 연횡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상앙이 이룩해 놓은 엄격한 정책 또한 변함없이 시행되고 있었다.

- 나의 대(代)에 천하 패업을 이루리라!
진소양왕의 즉위 첫 일성이었다.
그만큼 그의 야심은 컸다.

그 무렵, 초(楚)나라는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단양과 남전에서 제(齊)나라와 싸운 두 차례 패전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상대적으로 제(齊)나라의 입지가 퍽 강해졌다.
초(楚)나라는 진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끼여 이중 외교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않아 초나라는 양국 모두로부터 침공을 당하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초회왕 29년이면 BC 300년이요, 진나라 연호로는 진소양왕 7년이었다.
초나라로서는 양단간에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다다르게 되었다.
- 진(秦)나라냐, 제(齊)나랴냐!

최근 2년간의 진나라 침공으로 인해 초(楚)나라 조정은 굴원 등을 주축으로 한 친제파가 득세했다.
초회왕(楚懷王)은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제나라와 친교하리라!"

그러나 지난날 초(楚)나라는 제나라를 배신한 바 있었다.
여간해서는 제(齊)나라가 초나라의 화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세자 횡을 제나라에 볼모로 보내라!"

이런 치욕과 수모를 감수한 끝에 초회왕(楚懷王)은 겨우 제민왕을 달래 동맹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반면 세자 횡은 두번씩이나 타국에서 인질 생활을 해야 하는 불운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 초ㆍ제 동맹
이 소식을 접한 진소양왕(秦昭襄王)은 불같이 노했다.
자신의 대에 천하 패업을 이루겠다는 야심에 불타있는 그가 아니던가.
"초왕(楚王)을 용서할 수 없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이제 24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 왕이었다.
지금까지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걸핏하면 군사를 내어 초나라를 쳤다.
그는 이번에도 무력으로써 제나라와 동맹을 맺은 초(楚)나라를 응징하리라 마음먹었다.

이듬해인 BC 299년(초회왕 30년, 진소양왕 8년).
그는 또 한 번 대규모의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 국경을 침범했다.
대장으로 임명된 장수 미융(芈戎)은 초나라 요새인 방성을 공격하여 주변의 여덟 개 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진소양왕(秦昭襄王)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배반한 초회왕을 무릎 꿇게 하고 싶었다.

진소양왕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시(市), 경양 땅을 식읍으로 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경양군(涇陽君)이라 불렀다.

경양군은 나이는 젊었지만 지략이 풍부했다.
그는 형인 진소양왕(秦昭襄王)이 초회왕에게 보복하려는 마음이 있음을 짐작하고 한 가지 꾀를 내었다.
"이리이리하면 왕께서는 검중 땅을 얻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초(楚)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경양군의 계책을 들은 진소양왕(秦昭襄王)은 대단히 기뻐하며 즉시 실행에 옮겼다.
"초나라에 사자를 보내라."

- 무관(武關)에서 서로 만나 지난날의 오해를 풀고 동맹을 맺읍시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이 초회왕 앞으로 보낸 서신의 내용이었다.

느닷없는 화평 제안에 초회왕(楚懷王)은 어리둥절했다.
진소양왕의 외교적 성향으로 볼 때 그것은 확실히 정상이라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의미일까?'
반가움보다는 의심이 일었다.
초회왕(楚懷王)은 조정 중신들을 모아 의견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 무관(武關)으로 나가 회담에 응하는 것이 좋겠소.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이 좋겠소?
이 물음 하나로 초나라의 조정은 한동안 시끄러웠다.
그때까지도 초나라는 여전히 친진파(親秦派)와 친제파(親齊派)로 나뉘어져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주도권을 잡은 쪽은 지난해 제나라와의 동맹을 성사시킨 바 있는 굴원, 소저(昭雎) 등 친제파였다.
친제파의 대표인 굴원(屈原)은 두말할 필요 없다는 듯이 주장했다.

"진(秦)나라는 속이 검은 늑대와 같아서 믿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왕께서 가시면 다시는 돌아오시지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군대를 보내어 국경을 단단히 방비하는 것이 낫습니다."

처음은 친제파(親齊派)의 주장이 유리했다.
그러나 조정의 주도권을 빼앗긴 친진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일찍이 장의와 친하게 지낸 바 있는 근상(靳尙)은 물론 초회왕의 아들 공자 난(蘭)이 바로 그 주축 세력이었다.

공자 난(蘭)은 진혜문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바 있었기에 더욱더 진(秦)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주장했다.

"굴원(屈原)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초(楚)나라는 이미 수차례 진나라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공연히 항거하여 장수와 군사를 잃고 땅까지 잃느니, 차라리 이번 기회에 동맹을 맺어 잃은 땅을 회복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두 당파의 주장 사이에서 고민하던 초회왕(楚懷王)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 무관으로 가 진왕(秦王)과 회담하리라!

진나라 도읍인 함양성은 분주해졌다.
그러나 그들이 바빠진 것은 회담을 성공적으로 성사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 경양군(涇陽君)은 과인으로 가장하여 무관으로 나가라.
진소양왕의 입에서 떨어진 명이었다.

그의 지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 장수 백기(白起)는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나가 무관 안에 매복해 있으라.
- 장수 몽오(蒙鰲)는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나가 무관 밖에 매복해 있으라.

마침내 함양성 문밖으로 한 행렬이 나타났다.
왕이 타는 수레에 왕을 호위하는 시위대(侍衛隊)가 무관으로 뻗어 있는 가도를 따라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연변을 가득 메운 백성들은, 그러나 그 수레 안에 경양군(涇陽君)이 타고 있을 줄은 꿈에도 짐작지 못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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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진고개 | 작성시간 26.06.17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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