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국지의 세계에 탐닉하다
- 3부 일통 천하 (101)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2장 조무령왕과 호복기사 (2)
저 멀리로 무관(武關)이 보였다.
무관이 가까워지면서 초회왕의 눈에는 주변의 풍경이 선명히 들어왔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관문 또한 활짝 열려있었다.
문을 지키는 병사들 외에 다른 군사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진왕(秦王)을 의심한 것은 기우였던가.'
초회왕(楚懷王)은 다소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행차가 관문 앞에 이르렀다.
문밖에 진(秦)나라 사자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진나라 사자는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초회왕을 영접했다.
"우리 왕께서 초왕(楚王)을 기다리신 지 벌써 사흘째입니다. 먼 길에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초회왕(楚懷王)은 자신을 극진히 대우하는 사자의 태도에 적이 만족하며 관문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좌우에서 수십 명의 병사들이 나타나 재빨리 관문을 닫아버렸다.
초회왕(楚懷王)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어째서 관문을 급히 닫아버리는 게요?"
사자가 여전히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이것은 우리 진나라의 법도입니다."
"진왕(秦王)은 어디 계시오?"
"공관에 계십니다. 제가 곧 그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얼마쯤 갔을까.
문득 초회왕의 수레가 멎었다.
화려한 저택 앞에서였다.
"이제 공관에 당도했습니다. 어서 내리시지요."
초회왕(楚懷王)이 수레에서 내리는 것과 동시에 저택의 대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금포(錦袍)에 옥대(玉帶)를 두른 것으로 보아 그가 진소양왕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초회왕의 눈에 그 모습이 어딘지 어색해보였다.
서늘한 기운이 가슴 한구석에서 솟아났다.
초회왕(楚懷王)은 멈칫하며 수레 위로 도로 올라가려 했다.
그 사이 금포(錦袍)를 입은 사람이 초회왕 앞에까지 이르러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왕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신은 진왕이 아니라 동생인 경양군(逕陽君)입니다. 일단 공관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왕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초회왕(楚懷王)은 하는수없이 경양군을 따라 공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대청으로 올라서려는 순간이었다.
별안간 공관 밖에서 천지를 무너뜨릴 듯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1만 명의 군사가 순식간에 공관 주변을 에워쌌다.
초회왕(楚懷王)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나는 진왕(秦王)과 회견하러 왔소. 이게 웬 병사요?"
경양군(逕陽君)이 웃으며 대답했다.
"왕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원래는 우리 왕께서 직접 오시려 했으나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저를 대신 보낸 것입니다. 그러니 왕께서는 함양까지 가시어 우리 왕과 회견하십시오. 저 군사들은 왕을 호위하기 위한 호위 병사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어리석은 초회왕(楚懷王)은 아니었다.
그는 대뜸 자신이 진소양왕의 계략에 빠졌음을 직감했다.
굴원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거듭 후회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진(秦)나라 군대에 의해 납치당한 것을.
초회왕(楚懷王)은 경양군과 나란히 수레를 타고 함양으로 향했다.
그 앞뒤로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와 몽오(蒙鰲)가 철통같이 호위했다.
아니 그것은 호위가 아니라 감시였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행원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눈치를 챈 경양군(逕陽君)이 쾌활한 음성으로 말했다.
"왕을 따라온 수행 신하들은 시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초(楚)나라로 돌려보냈습니다. 아마도 지금쯤 언영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가고 있는 중일겁니다."
초회왕(楚懷王)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쏟았다.
'아아, 내가 늑대 소굴로 들어가는구나.'
며칠 후 초회왕(楚懷王)은 함양성에 당도했다.
경양군의 안내를 받아 궁성으로 들어갔다.
그는 진소양왕과의 회담 시 이번 일에 대해 강력히 따지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진소양왕을 만나는 순간 그는 또 다른 당혹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 배알하시오.
경양군(逕陽君)이 곁에서 속삭였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진소양왕(秦昭襄王)은 남향으로 놓은 왕좌에 높이 앉아 있었고, 자신은 계단 아래서 엎드려 절을 하라는 것이다.
왕 대 왕이 아닌 왕 대 신하의 접견 절차였다.
속국의 제후에게도 이러지는 않는다.
초회왕(楚懷王)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 분노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나는 초나라 왕이오. 진(秦)나라를 믿고 회담하기 위해 무관까지 나왔거늘, 진왕은 어찌하여 나를 속이고 이런 무례를 저지르는 것이오?"
그러나 진소양왕(秦昭襄王)은 태연자약했다.
오히려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지난날 그대는 우리 진나라에게 장의를 보내주면 검중 땅을 내주겠다고 약속했소. 그런데 그대는 아직까지 검중(黔中) 땅을 내주지 않고 있소."
"오늘 과인이 그대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그대가 검중(黔中) 땅을 내주기만 하면 과인은 지금이라도 당장 그대를 초(楚)나라로 돌려 보내주겠소. 어떻소? 검중 땅을 우리에게 내주겠소?"
초회왕(楚懷王)으로서는 여간 엉뚱한 말이 아니었다.
벌써 언제 적의 얘기인가.
더욱이 그는 장의(張儀)를 정중히 대접하여 돌려보내지 않았던가.
억지가 분명했다.
그는 진소양왕의 수작에 말려드는 줄 알면서도 분통을 이기지 못해 다시 소리쳤다.
"검중(黔中) 땅이 탐이 나면 얼마든지 좋은 말로 요구할 수도 있는 일이거늘, 진왕(秦王)은 어찌하여 이런 얄팍한 속임수를 쓰는 게요? 이런다고 과인이 검중 땅을 내줄 성싶소?"
"검중 땅을 내주지 않으면 영원히 초(楚)나라 땅을 밟을 수 없음을 명심하오!"
진소양왕의 이러한 협박에 초회왕(楚懷王)은 오기가 일었다.
"너희들이 나를 속여 이 곳까지 유인해놓고 땅까지 요구하고 있으니 내 어찌 그것을 들어줄 수 있겠는가. 나는 죽으면 죽었지 너희들의 협박에 굴하지 않겠다!"
그러나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진소양왕대로 기어코 검중(黔中)을 빼앗아낼 작정이었다.
그는 싸늘한 눈길로 초회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법 용기가 가상하구나. 네가 언제까지 버티는지 지켜보리라. 여봐라, 초왕(楚王)을 옥에 가두어라!"
이리하여 초회왕(楚懷王)은 고금을 통해 찾아보긴 힘든, 타국에서의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