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국지의 세계에 탐닉하다
- 3부 일통 천하 (107)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2장 조무령왕과 호복기사 (8)
조무령왕이 중산국을 멸망시킨 바로 그 해에 초회왕(楚懷王)이 함양을 탈출하여 조나라 국경으로 도망쳐왔다.
조혜문왕(趙惠文王)이 신하들을 불러 물었다.
"국경을 지키는 관리의 보고에 의하면 지금 초왕(楚王)이 우리 나라로 도망쳐와 망명하기를 바란다 하오. 초왕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소, 아니면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소?"
재상 비의(肥義)가 대답했다.
"주보의 말씀에 의하면, 진(秦)나라는 함부로 대적할 나라가 아니라고 합니다. 초왕을 받아들이면 진왕은 크게 노하여 군대를 낼지도 모릅니다. 굳이 초왕(楚王) 때문에 진나라와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조혜문왕(趙惠文王)은 노재상 비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국경 관리를 불러 지시했다.
"초왕(楚王)을 돌려보내라."
이 소식을 들은 초회왕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녕 이 넓은 땅에 내가 갈 곳이 없단 말인가?"
초회왕(楚懷王)은 절망에 빠져 다시 발걸음을 위나라 대량 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이미 다했음인가?
조나라 국경을 떠나 위(魏)나라로 향하는 중에 마침 뒤쫓아온 진(秦)나라 추격군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어쩌면 조(趙)나라 측에서 그를 진나라 군대에 넘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초회왕(楚懷王)은 다시 함양성으로 끌려와 감금되었다.
그는 더 이상 삶에 대한 의욕을 잃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지내더니 끝내는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보다 더한 비운(悲運)의 왕이 있을까?
진소양왕은 그제야 초회왕의 시체를 관에 담아 초나라로 돌려보냈다.
초(楚)나라 백성들은 초회왕의 유해를 보고 몹시 동정했다.
타국 땅에서 연금 생활을 하다가 한(恨)을 품고 죽은 초회왕은 그래서 '회(懷)'라는 시호를 받았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온 초회왕(楚懷王)의 모습을 보고 통탄을 금치 못한 사람은 반진파(反秦派)의 대표 굴원이었다.
'이 모든 게 공자 난(蘭)과 간신 근상(靳尙) 때문이다.'
그런데 굴원을 더욱 분노케 한 것은 새 왕인 초경양왕(楚頃襄王)이 공자 난과 근상의 감언이설에 속아 변함없이 친진(親秦)정책을 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이때부터 굴원(屈原)은 기회가 날 때마다 초경양왕에게 간(諫)했다.
"왕께서는 간신을 멀리하고 현자(賢者)를 초빙하십시오. 그리하여 군대를 훈련시켜 부왕의 원수를 갚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왕을 꼬드기는 데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난 근상(靳尙)을 당해낼 수 없었다.
"요즘 들어 굴원(屈原)이 벼슬이 오르지 않는다 하여 불평이 몹시 심해졌습니다. 보는 이마다 '우리 왕은 불효한 사람이다. 부왕의 원수는 갚을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진(秦)나라에 아첨하고 있다' 고 떠벌리고 다닙니다. 가만 놔두면 신료와 백성들이 왕을 우습게 알까 두렵습니다."
친밀도로 치면 근상(靳尙)이 굴원보다 더 초경양왕과 가까웠다.
왕을 접하기도 자주 접했다.
그는 초경양왕을 그림자처럼 따라 붙으며 굴원(屈原)을 참소했다.
여기에 영윤이자 이복동생인 공자 난(蘭)까지 가세했다.
"굴원(屈原)은 능력에 비해 지위가 너무 높습니다. 또한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는 결국 왕만 욕보일 것입니다."
근상과 공자 난의 참소를 믿은 초경양왕(楚頃襄王)은 마침내 굴원을 파직시키고 시골로 추방해버렸다.
굴원(屈原)의 고향은 장강 중류 이남에 있는 장사(長沙)라는 땅이었다.
장강 지류의 하나인 상수 근처다.
삭탈관직(削奪官職) 당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굴원(屈原)은 자신의 울분을 이길 수가 없었다.
집 근처에 멱라강이라는 강이 있었다.
호남성 동북쪽을 거쳐 상수(湘水)로 흘러드는 작은 강이다.
그는 날마다 멱라강가로 나갔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강변을 거닐며 시를 지음으로써 자신의 울분을 달랬다.
이때 지은 시(詩)가 그 유명한 장편 서사시 <이소(離騷)>다.
긴 한숨과 눈물로써
인생의 어지러움을 슬퍼하노라.
나 언제나 청정(淸淨)에 힘썼건만
아침에 간(諫)했다가 저녁에 파직되었도다.
향초로 만든 띠를 두르고
향초를 꺾어든 것이 그토록 죄이던가.
내 마음에 옳다고 하는 것이 있다면
아홉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으리.
이렇게 시작되는 <이소(離騷)>는 이후 자신의 억울한 평생을 통렬하게 읊고 있다.
'이소(離騷)' 라는 뜻은 '슬픈 일을 당하다' 라는 뜻이다.
어떤 이는 '이별의 슬픔' 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나, 앞의 것이 대체적인 주장이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의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에서 굴원이 '이소'를 쓰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해설해놓고 있다.
굴원(屈原)은 왕이 한쪽 말만 듣고 시비를 가리지 못한 것과, 아첨하는 무리들이 왕의 총명을 가로막은 것과, 사악한 무리들이 공명정대한 사람을 해치는 것과, 단정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풍토를 애석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수와 근심을 이기지 못하고 지은 것이 <이소>다.
'이소(離騷)'는 근심스러운 일을 만났음을 말한다.
.... 그러므로 굴원이 지은 <이소>는 원망으로부터 이루어졌다.
굴원에게는 수(嬃)라는 누님이 있었다.
'수'는 누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먼 지방으로 시집가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누님 수(嬃)는 친정 동생인 굴원(屈原)이 파직당하여 고향으로 쫓겨내려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동생 굴원을 위로하기 위해 고향 집으로 갔다.
그녀는 굴원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오랫동안 빗질을 하지 않아 머리가 산발인데다가, 안색은 초췌했고, 몸을 몰라볼 정도로 야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누님은 굴원의 손을 잡고 애원하듯 부탁했다.
"동생의 고뇌를 내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무슨 보람이 있으리오. 이제 지난날은 다 잊고 조용히 땅을 일구며 남은 생(生)이나마 편안히 보내도록 해라."
누님의 정겹고 따스한 말에 굴원(屈原)은 한결 마음이 가라앉는 듯 했다.
그때부터 굴원은 다소 안정을 되찾고 농사를 지으며 속세의 일을 잊으려 했다.
한 달쯤 지나 누님은 시가로 돌아갔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