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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우리역사(終)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24

작성자미션|작성시간24.07.25|조회수76 목록 댓글 0

배한철의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24


24. 이제현의 <역옹패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 정체 불명의 인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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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110호 익재 이제현 초상. 원나라 화가 진감여가 그렸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 태조 왕건은 한 나라의 개국 시조인데도 뜻밖에 정체 불명의 인물이다. 할아버지인 작제건 이전 부계 조상의 기록이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왕건의 계보를 정리한 '고려세계'에 따르면 작제건의 어머니는 보육이라는 인물의 딸이었다. 보육의 딸은 예성강을 거쳐 개성으로 들어온 당나라 귀인과 동침해 아이를 갖게 되는데 그가 바로 작제건이다. 고려 후기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익재 이제현은 고려 태조의 계보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당나라 귀인을 두고 당 숙종이라는 설이 파다했지만 당대에 이미 사실무근으로 판명났다. 왕건이 고려를 건립하면서 고구려를 계승하고 고토 회복을 내건 것으로 미뤄 작제건의 아버지가 상당한 부를 가진 고구려계 상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오늘날 언급된다.





▲ 고려 왕씨 족보의 고려 태조 왕건 초상. 이제현은 왕건이 태조의 실명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왕건이라는 이름도 모호하다. 이제현은 본조편년강목을 중수하고 실록, 국사 등을 편찬한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고려 태조가 할아버지(작제건), 아버지(용건)의 이름을 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한다. 그러면서 3대에 걸쳐 '건'자 이름을 붙이면 왕이 나온다는 고려계보의 기록은 호사가들의 얘기를 전한 것뿐이라고 덧붙였다.

신라시대에는 임금을 마립간이라고 일컫고 신하를 아간이나 대아간으로 불렀다. 아간을 쓸 때는 아찬 또는 알천이라고도 했다. 간(干), 찬(餐), 찬(粲) 등 3글자는 비슷하게 소리 나 함께 적혔다. 민간에서도 서로 높이는 존칭으로 간을 이름에 종종 붙여 불렀다.

이제현은 이처럼 태조의 건도 존칭이었을 뿐 실제 불리던 이름은 아니었다고 했다. 고려 왕씨 역시 고려 건국 이후 어느 시점부터 붙여졌을 것으로 결론 짓는다. 무엇보다 후고구려의 궁예는 의심이 많았다. 아버지에 이어 궁예 밑에서 벼슬을 했던 왕건이 처음부터 왕씨 성을 가졌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

이제현의 대표작인 역옹패설은 고려계보를 언급하면서 고려 태조의 이름은 왕건이 아니라는 주장을 편다. 책은 4권 1책으로 구성돼 있다. 역사, 인물일화, 시화, 민담 등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적은 수필이다. 이제현이 인생과 문학에서 모두 원숙한 56세에 쓴 만큼 작품성이 높다.

우리나라는 대체로 문약했지만 그렇지 않은 시절도 있었다. 일본을 두 차례 원정했던 충렬왕 때 군사 동원체제가 오랜 기간 유지돼 군대가 강성했다. 글만 읽던 선비들도 모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과 창을 잡았다. 책을 들고 글을 읽는 자들은 열 사람 중 한두 사람도 안 되었다.

이제현은 선배나 늙은 선비들은 모두 죽어가고 육적(六籍·시, 서, 예, 역, 악, 춘추 등 6경)은 겨우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다고 기술했다. 안향이 재상이 되어 국학을 다시 짓고 상서(庠序·향교)를 고쳐 내시, 오군, 삼관의 7품 이하나 생원까지도 모두 따라서 배우고 듣게 하면서 다시 문을 중시하는 풍조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우리는 승자인 조선개국세력에 의해 쓰인 고려 역사, 즉 고려사에 익숙하다. 역옹패설에는 고려사와 다른 내용이 다수 발견된다. 임금에 대한 평가가 사뭇 다르다. 고려 11대 문종(재위 1046∼1083)은 37년간 재위하면서 고려 전 시대를 걸쳐 가장 찬란한 문화황금기를 이룩했다.

문종은 이자연(1003~1061)의 세 딸과 결혼하면서 그에게 권력을 집중시켰다. 그의 손자 이자겸(?~1126)은 조부가 구축한 막강한 인주 이씨 세력에 힘입어 국정을 농단하다가 난을 일으켰다. 이제현은 문종이 많은 대신들을 총애했으며 그중에서 연로하고 덕망 높은 이자연을 항상 편전으로 불러들여 정사를 논했다고 했다.

그런 연후에 문종과 이자연은 술상을 차려놓고 밤이 깊도록 밝은 등불 아래에서 잔을 기울였다. 임금과 신하가 다 흰 눈썹과 센 머리로 머리를 맞대고 즐거움을 다하니 그 광경은 마치 아름다운 그림과도 같았다고 이제현은 논했다.

25대 충렬왕(재위 1274~1308)은 음주가무와 사냥으로 소일하며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왕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이제현은 "세자였을 적에 학자 김구, 이송진, 승려 조영과 함께 용루집이라는 시집을 만들었고 왕위에 즉위한 후에도 날마다 문신 최옹에게 자치통감을 가르치게 해 무인과 환관들까지 글을 못 읽고 시를 짓지 못하는 이가 없었다"고 했다.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이자 한국사 최초의 혼혈왕인 26대 충선왕(재위 1308~1313)은 재위 기간 고려보다 원나라에 더 오래 머물렀으며 말년에는 아예 원나라에서 국정을 통치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연경에 머물면서 학문에 몰두했다. 중국 조정에 입시해서도 중국의 유명 선비들에게 강론했는데 고금을 넘나드는 해박함이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이제현은 전한다.

그 시절 원나라 조정을 통하면 고려에서 벼슬 한자리는 쉽게 얻었다. 환관으로 원나라 궁궐에 들어간 이대순은 고려의 태안 사람으로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았다. 이대순은 원나라 황제에게 자기 형의 파격적 승진을 청했다. 그러자 쿠빌라이는 "그 나라에 임금이 있거늘 내가 어찌 관여하겠느냐"면서도 원나라 대관에게 명하여 충렬왕을 불러 술잔치를 베풀어 부탁하도록 했다.

 충렬왕은 처음에는 영문을 모른 채 이대순의 청탁을 불쾌하게 여겼으나 쿠빌라이의 뜻이었다는 것을 전해듣고는 벼슬을 올려줬다. 이대순은 이후에도 황제를 사칭해 형과 동생을 고위관직에 등용했고 막대한 재산도 끌어모았다.

조선은 통역관을 중인이 전담케 했다. 그러나 이제현의 시대에는 몽골 말을 잘하는 사람이 출세를 했으며 심지어 재상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했다. 원나라 사신이 고려의 여러 재상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그런데 역관 출신으로 정승에 오른 유청신(?∼1329)이 몽골어로 직접 사신과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자 같이 있던 홍자번(1237∼1306)이 통역관을 불러 "너는 어디에 가 있었기에 재상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가"라고 꾸짖었다. 유청신은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유청신은 이후 수상에 올랐으며 원나라 손님을 만날 때는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할지라도 반드시 통역관을 통해 이야기를 나눴다.

광종 때 과거제 도입을 건의한 중국인 쌍기와 고려 학자들의 불화 사실도 언급한다. 쌍기는 중국 후주 사람으로 956년(광종 7년) 사신으로 고려에 온 뒤 병으로 머무르다 귀화했다. 광종은 호족 출신의 공신들을 견제해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교적 신진관료 집단이 필요했다.

광종은 958년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설치했으며 쌍기를 지공거에 임명해 과거를 관장토록 했다. 쌍기는 노비안검법 등 일련의 개혁정책 추진에도 핵심적으로 나섰다. 이러한 쌍기의 중용에 공신들은 노골적 불만을 드러냈으며 쌍기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실각당한다.

특히 시무28조를 통해 고려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최승로(927∼989)마저 쌍기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최승로는 6대 성종(재위 981~997)에게 상소를 올려 "우리나라가 중국의 풍속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영전(令典·아름다운 법도)은 들어오지 않았고 중국의 선비를 쓰고 하지만 중국의 큰 선비는 얻지 못했다"고 비꼬았다. 이제현은 최승로의 상소가 쌍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라고 했다.

고려와 조선의 제도와 풍습은 무척 달랐다. 고려시대에는 딸, 아들 차별 없이 재산이 분배됐다. 손변렴은 경상도 안찰사(지방5도의 장관)로 파견돼 소송사건을 맡게 됐다. 어떤 사내가 부모님의 유산을 누나가 혼자 독차지했다며 유산 배분을 요구했다. 누나는 그러나 아버지 임종 시에 가산을 모두 자신에게 물려줬으며 이를 증명하는 증서도 갖고 있다고 반박했다.

안찰사는 "부모는 아들이나 딸이나 똑같이 사랑한다. 그러나 그대들의 아버지가 사망할 때 아들은 일곱 살이었다. 어린 아들이 의지할 곳은 누나뿐이었다. 만일 그때 유산을 둘에게 똑같이 나눠줬다면 누나가 동생을 사랑으로 키웠겠느냐. 그대들의 아버지는 이를 염려해 딸에게 재산을 모두 물려준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말을 듣고 누나와 동생은 서로를 보면서 울었다. 손변렴은 재산을 반씩 나눠 배분했다.

고려의 국법은 지위 고하와 귀천을 막론하고 첩을 둘 수 없도록 금지했다. 고려에는 남자가 적었고 여자의 수는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제현은 음양의 법칙으로 인해 그렇다고 설명하지만 납득할 만한 원인은 파악되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여자들은 백발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하는 이가 있고 군사들과 백성들의 숫자가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상서 박유는 마침내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면서 "모든 신하들에게 첩을 갖도록 항구적인 제도를 국가에서 정비하는 것이 여인들의 한을 풀고 백성들을 번성하게 하는 길"이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박유의 주장과는 달리 여성들은 한목소리로 화를 내고 법이 실제로 실행될까 두려워했다. 박유가 임금을 수행해 거리에 나오자 여인들은 손가락질을 하면서 "늙은 거지새끼"라고 비아냥댔다.

국가문화재의 옛 흔적을 추적해볼 수 있다. 보물 463호 강원도 원주 흥법사
 




▲ 보물 463호 강원도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비석은 현재 사라지고 없지만 고려시대 최고 국보로 꼽혔다

사탑비는 당대에도 최고의 국보로서 대접받았다. 진공대사는 여말선초에 활약한 고승으로 비석은 태조 왕건이 직접 글을 지었고 서예가 최광윤이 글자를 집자해 새겼다.

이제현은 "말의 뜻은 웅대하고 심원하고 거룩하며 (중략) 글자는 큰 글씨, 작은 글씨, 그리고 해서와 행서가 서로 사이를 맞춰 봉황이 물 위를 헤엄쳐 다니는 것처럼 그 기상이 하늘 밖까지 삼킬 듯하다"면서 "정말 천하의 보물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탑비 몸체가 사라졌고 거북 모양의 귀부(받침돌)에 용을 새긴 이수(머릿돌)만 옛 흥법사 터에 남아있다.

▶이제현(1287~1367)=호는 익재, 역옹. 경주에서 출생했으며 15세에 성균시에 장원하고 곧이어 과거에 합격했다. 22세에 예문춘추관에 뽑혀 문명을 떨쳤다. 원나라의 고려 편입 야망을 봉쇄했으며 원나라의 내정간섭에 의한 숱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공민왕 즉위 후 정승에 임명돼 국정을 총괄했다. 중국에서 주자학을 배워 우리나라 성리학의 선구자적 공적을 남겼다. 저서로 익재난고가 있으며 역옹패설은 56세 때 씌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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