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64
ㅡ 고려의 무신정권시대 20 ㅡ
(무신정권시대와 몽골침략 6-
'최항' '최의' 세습정권)
최씨정권 몰락은 '최항' 집권과 함께 시작되었다
고려 무신정권의 최씨정권은 1196년(명종 26), '최충헌'이 이의민 일당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 최우, 손자 최항, 증손자 최의>로 이어지며 4대 62년간 고려의 실권을 쥐었다.
그중에서도 '최우'는 강화천도 이후 40년 가까이 권세를 누리며, 1248년 84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생을 마감했다. 금수저로 태어나 부귀영화를 누린 그의 삶은 겉보기엔 천복(天福)을 타고난 듯했지만, 자식 복만은 넉넉지 못했다.
최우는 정실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고, 창기 '서련방'(瑞蓮房) 소생의 서자인 '최항'을 후계자로 삼았다.
최항의 본관은 우봉(牛峰), 초명은 '최만전'(崔萬全)이었다. 그는 서자라는 이유로 어릴 적부터 정계와 거리를 두었고, 송광사와 쌍계사 등지에서 승려로 지냈다. 그러나 1248년(고종 35), 아버지 최우의 부름을 받아 환속한 뒤 후계자 수업에 들어 갔다.
이 과정에서 최우사위 '김약선'과 그의 아들 '김미'·'주숙'등이 권력 승계를 두고 암투를 벌였고, 최항은 이들을 제거한 뒤에야 권력을 안정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다. 최우가 죽은 이듬해인 1249년(고종 36), 최항은 정식 으로 정권을 계승했다.
고려 고종 사위이기도 했던 그는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하여 정방을 통한 인사권 장악과 군사 통제를 이어갔다.
그러나 김약선은 최우정권 핵심 기반이던 인물로, 그와 그의 일가 제거한 것은 곧 최씨정권 내부 균열이 본격화되었음을 뜻했다. 최항이 이어받은 권력은 겉보기엔 무탈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기반이 취약했다.
실제로 최항집권기에 이르러 무신정권 내부 분열은 점차 심화 되었다. 최항은 자신정권에 위협되는 인물들을 제거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지추밀원사 '민희'와 추밀원부사 '김경손'을 귀양 보냈으며,
전 추밀원부사 '주숙'과 형부상서 '박훤'을 죽였다.
특히 1251년(고종 38)에는 계모 대씨를 독살한 뒤, 귀양 보냈던 김경손까지 제거했다.
김경손은 김약선의 친동생이자, 몽골 1차침략 당시 '13인 돌격대' 로 활약했던 귀주성 영웅이자 용장이었다. 그는 '척준경'에 비견될 만큼 무예가 출중했다. 고려가 낳은 출중한 영웅적 무장 척준경, 김경손 둘 다 전장에서 칼이 아니라 권력투쟁 서늘한 그림자로 생을 마감 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최항은 집권 초기에는 지방의 별공(別貢)과 어량선세(魚梁船稅)를 면제하고, 가렴주구로 악명 높던 교정도감의 수획원을 소환 하여 안찰사에게 임무를 맡기는등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펼쳤다. 당시 그의 정치에 대해 백성들의 호의적인 평도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의 출신 콤플렉스와 권력 불안은 삐뚤어진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어머니가 천민출신이었고 자신도 승려생활 하다 정권을 물려받았다는 열등감 심했던 그는, 자신의 권위를 훼손 할 만한 이들을 제거하기 시작 했다. 평판 좋은 이들을 시기하며, 제거 수위는 점차 숙청과 학살로 치달았다.
최항은 아버지 최우가 죽은 지 겨우 이틀 만에 아버지 첩들을 겁탈하였고, 과거 승려시절 자신을 불편하게 했던 인물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집권 후 이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절차도 없이 죽여버렸다.
심지어 최우의 정실부인이 자신의 생모를 '천줄'이라 무시했다는 이유로 그 재산을 몰수하고, 그녀의 오빠들을 전원 처형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이러한 최항의 패악으로 인해, 아버지 최우시절 누렸던 무신정권 권위는 완전히 실추되었다. 최씨 정권 기반은 흔들렸고, 고려 무신 정권 몰락은 눈앞으로 다가왔다.
최항은 이중적인 인물이었다.
백성을 위한 개혁적 시도와 함께, 출신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광폭한 숙청도 동시에 존재했다. 그 어떤 것이 진짜 그의 모습이었는지는 단정짓기 어렵지만, 아마 두 가지 모두가 그의 진짜 얼굴이었을 것이다.
최항집권기에는 몽골과 오랜 전쟁 으로 인해 문무관료들 사이에서 '강화론'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전국 각지에서 일반백성 들이 지방관을 살해하고 자발적 으로 몽골에 항복하는 사례도 적지 않게 발생하였다. 이는 강경한 '주전론'을 기반으로 정권을 유지해오던 최씨정권에
큰 위협으로 작용하였다.
몽골에 대한 정책에 있어서도 최항은 부친 최우의 '반몽노선'을 계승하였다.
1250년(고종 37)에는 몽골의 출륙 요구에 형식적으로 응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승천부(현 경기도 개풍군)에 새 궁궐을 짓기도 하였으나, 전반적으로는 강경책을 유지하였다.
1253년(고종 40), 고려가 강화도로 부터 여전히 출륙을 하지 않자
몽골장수 '야굴'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몽골은 태자 또는 왕자 안경공 '왕창'을 보내면 회군 하겠다는 서신을 보내왔다.
그러나 최항은 이를 거부하였고, 몽골군이 고려국토 전국을 짓밟고 유린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고종은 '승천부' 새 궁궐로 나아가 몽골사신을 접견함으로써 일시적 으로 위기를 넘겼다. 이와 동시에 각 지역에 방호별감을 파견하여 주민들이 섬이나 산성으로 피난 하도록 독려하였다.
1257년, 최항은 생을 마감한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향년 또한 명확하지 않지만 60세 전후로 추정된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는 독살설, 병사설, 자연사설 등이 존재 하지만, 아들 '최의'가 별다른 정치적 충돌 없이 교정별감에 오른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다른 무신들에 의한 암살 가능성은 낮다.
최항은 정치적 역량 면에서 아버지 최우에 비해 많이 미흡 하였으며, 그의 집권기에는 최씨 정권의 말기적 징후가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려 무신정권의 최후 세습자, '최의' 몰락과 '무오정변'을 살펴 보자.
'최의'(崔竩, ? ~ 1258)는 고려 무신정권의 마지막 세습 권력자 였다. 그는 할아버지 최우, 아버지 최항에 이어 최씨 정권 4대 세습 체제를 계승하였으나, 정치적 기반도, 개인적 역량도 허약했다. 그의 집권기는 채 1년을 넘기지 못했고, 결국 김준(金俊) 일파에 의해 피살되며 62년간 이어진 최씨정권은 종언을 고하게 된다.
최항과 마찬가지로, 최의 역시 정실에서 태어난 자식이 아니다. 그는 기생 출신 여인에게서 태어난 서자였기에 정통성에서 문제가 있었다.
이는 당시 유력가문이라해도 서자지위 비천함과 권력세습 위태로움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어쨌던 최의는 고려 무신정권 핵심 권력가문에서 성장했다. 정방(政房)을 통한 권력세습과 집중이 일상화된 시기였기에, 그는 사실상 집권을 예정받은 존재였다. 고려황실은 형식적 상징에 불과했고, 실질적 정치는 최씨가문과 정방에 의해 좌지우지 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최의는 정치적 능력은커녕 사치와 방탕, 부패와 패륜으로 점철된 인물이었다.
그는 아버지 최항이 생전에 첩으로 삼았던 여인을 스스로 취하는 행위로 지탄을 받았고, 이는 권위와 정통성에 타격을 주었다. 정치력은 부족했고, 신망은 땅에 떨어졌으며, 내부분열을 수습하지 못한 채 급속히 고립되어 갔다.
최의가 집권하자, 기존의 최항 체제 아래에서 사병을 이끌던 <최양백, 이공주, 김준> 세 사람 중 '최양백'만을 중용하고 나머지를 배제하는 선택을 했다.
이로 인해 정권 내부에서 불만이 고조되었고, 특히 '김준'과 갈등은 점점 극단으로 치달았다.
1258년, 최의는 김준 반대를 무릅쓰고 대장군 '송길유'를 유배시켰다. 송길유는 과거 김준을 최우에게 천거했던 인물로, 안찰사 '송언상'에 의해 혹리(酷吏, 가혹한 관리)로 탄핵되자 김준은 대사성 '유경'을 통해 이를 무마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의는 크게 노하여 송길유를 유배 시키고, 김준과 유경을 깊이 의심하게 되었다.
정세의 향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감을 감지한 김준과 유경은 결단을 내렸다.
이들은 <신의군 도령낭장 박희실, 지유섭낭장 이연소, 장군 박송비, 도령낭장 임연, 섭낭장 이공주, 대정 박천식, 별장동정 차송우, 낭장 김홍취, 그리고 김준의 세 아들 대재·용재·식재> 등과 모의하였다.
이들은 신의군과 야별초를 동원 하여 쿠데타를 단행했다. 이를 '무오정변'이라 한다.
기록을 보면 '최의'는 외모가 준수하였으나 식탐이 심해 매우 비만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그는 과도한 체중 탓에, 김준 등이 일으킨 무오정변 당시 위급한 상황에서 담을 넘지 못하고, 결국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살해 당한다.
최의는 부친 최항으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아 호사스러운 생활을 이어갔으며, 무신정권의 정점에 올랐으나, 당시 정권기반은 이미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고려 조정과 민심 모두 더 이상 최씨정권을 지탱할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고, 최의 개인의 정치력 역시 이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결국 집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오정변으로 실각하였고, 그의 죽음은 고려 정치사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김준일파는 정변이후 편전 옆에 다시 '정방'을 설치하고 황정복구 명분 삼았으며, 곧 몽고에 사신을 보내 화의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황권복위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김준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무신정권이 들어섰다.
비록 최씨정권은 김준일당 쿠데타 '무오정변'으로 무너졌지만, 고려 정치 실질권력은 여전히 문신이 아닌 무신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김준은 위사공신(衛社功臣)의 명분 아래 권력을 유지했으나, 그의 정권은 이전 최씨정권처럼 탄탄한 기반 위에 있지 않았다. 김준체제는 소수 공신집단에 의존하였기에 본질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무신정권 자체의 붕괴 국면으로 이어지는 서막이었다.
결국 1258년의 무오정변은 최씨 정권의 종말을 고한 동시에, 무신정권 붕괴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최항과 최의의 출생 및 성장 배경에 관해 다른 설이다.
'고려사' 열전과 본기에 따르면, 최우의 장남은 최항이며, 그는 정방을 운영하고 정권을 실질적 세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항이 서자였다는 언급이나 사생아 출신이라는 내용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최항은 최우 생전부터 정계 핵심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명백한 후계자로 인식되어 왔다. 정방 운영과 국정전반을 주도 했다는 점에서 보아, 그는 최우의 공식적인 정통 후계자로 보는 것이 사료상 정설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최항이나 최의가 서자로 태어나 출가한 뒤 절에 있다가 불려 나와 권력을 물려받았다는 이야기는 정사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민간에서 전해진 야담이나 후대의 소설적 상상에서 비롯된 가능성이 크며,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등 정사에는 그러한 기록이 없다.
한편, 2012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무신'에서는 최항과 최의 모두 기생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서얼로 그려지며, 역사적 기록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이처럼 최충헌 → 최우 → 최항 → 최의로 이어지는 최씨 무신정권은 4대 62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 속 에서, 왕조가 아닌 한 가문이 이토록 장기간에 걸쳐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세습한 사례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
조선말기 안동김씨 역시 60여 년간 세도정치를 펼쳤으나, 중간에 풍양조씨등과 권력을 나누기도 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북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세습 체제는 실질적 왕조체제에 가깝기에 비교 대상 에서 제외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최충헌 일가 세습집권은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나 '에도' 막부와 유사한 구조를 지닌다.
이는 고려시대 독특한 권력형태 이자, 한국 정치사에서 특별한 연구 대상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