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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도흐른다(終)

고려사도 흐른다. 71

작성자미션|작성시간25.08.01|조회수34 목록 댓글 0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71

ㅡ 고려 '원 간섭기' 시대 4 ㅡ
(충렬왕 시대)

1270년 김준·임연·임유무등 무신권신들 정권이 몰락하면서 100년 가까이 이어온 무신정권이 막을 내렸다.

같은 해, 강화도에 설치되었던 도읍은 개경으로 환도되고, 고려는 명목상 ‘왕권회복’ 길로 나아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개경환도’라는 이 행위가 진정한 자주회복이 아니라, 더 혹독한 예속의 시작이었음을 보여준다.

무신정권이라는 내적억압을 막 벗어나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백성들은 오랜 피난생활 종식을 기대했고, 고려 조정은 왕권회복이라는 명분 아래 정국재편에 나섰다.

하지만 원(元)과 고려가 맺은 것은 '강화협상'이 아닌 말 그대로 무조건적 '항복'이었다.

개경으로 환도한 고려는 자주국가 회복이 아닌, 원의 간섭과 예속을 공식화하는 시작이었고, 고려는 외면적으로는 왕정복고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원나라 부속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고려내부 정치질서가 보여주는 이중성이다.

앞 편에서 정리했듯이 '원종'은 고려 자주성을 지켜내기 위해 최후의 발악같은 일을을 해낸다.

원종은 원과 강화 이후에 고려는 정치적으로 원에 종속된 형국에 놓이게 되었지만, 여전히 국왕을 ‘황제'라 칭하였고, 관제 역시 황제국 체제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는 단순한 명칭 유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원종은 형식상 자주국의 체면을 끝까지 지키려 했다. 황제의 호칭, 독자적 연호 사용, 제후국이 아닌 하나 완결된 문명국가로서의 자의식은 고려 왕실 상징적 저항이자, ‘문화적 독립성’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런 자주성은 길게 가지 못했다.

개경환도 후 1271(원종12)년 원종이 원나라에 입조하여 고려 왕위를 인정받았고, 같이 동행한 태자(원종 장남, 충렬왕) 역시 당시 원 황제 세조 '쿠빌라이 칸' 눈에 띄어 황제 딸인 '제국대장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원 황녀와 고려태자 혼인은 고려왕실을 붕괴시키는 칼날이 되었다.

좋게 보는 쪽은 원이 고려 끈질긴 저항에 감동하여 부마국 대우해 주었다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원이 고려에 대한 정치적 간섭을 넘어, 실상은 고려왕실 독립성 붕괴를 의미했다.

충렬왕 이후 고려국왕들은 고려와 몽골의 혼혈인이었고 이들 왕족은 줄줄이 원 황족 여성과 혼인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왕위계승은 더욱 복잡하고 피폐해졌다. 원 황녀는 고려왕비나 후궁보다 더 높은 신분이었고, 고려국왕 조차 황녀 앞에 머리를 숙여야 했다.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에게 수시로 맞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제국대장공주와 이 이야기 들은 다음 편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겠다.

이와같이 고려왕실은 단순한 친원 정권이 아니라, 혈통적으로도 종속된 ‘속국의 궁정’으로 전락한 셈이었다.

1274년 원종이 승하하자 장남 '왕심'이 즉위했는데 이가 바로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한 고려 '충렬왕'(忠烈王)이다.

충렬왕은 고려후기 제25대 왕이다. 재위기간은 1274~ 1308년이다

이때부터 고려는 원 황실 외척, 다시 말해 완벽한 '부마국'이 된다.

충렬왕대 이후, 고려화실은 더 이상 황제를 자칭하지 못했고, 고려는 더 이상 독립된 제국을 자처할 수 없었다

이 때부터가 원나라 정치간섭과 내정개입이 본격화되는
<원 간섭기>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이전까지는 고려황제가 자율적 으로 즉위하고, 조정과 백성에게 통보하는 형식으로 황제 올랐다. 그러나 원 간섭기 시작과 함께, 고려 왕은 더 이상 자주적으로 즉위할 수 없었고 반드시 원황제 책봉을 받아야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는 곧 고려왕실이 사실상 원황실 승인 없이는 어떠한 권위도 가질 수 없음을 뜻했다.

원 간섭이 본격화되면서 가장 먼저 훼손된 것은 이처럼 황권 상징이자 고려 자존심이던 '황제 책봉권'과 호칭 변화였다.

왕호(王號) 역시 제약을 받았다. 고려는 원의 부마국으로 편입 되었으며, 이에 따라 고려국왕 칭호 앞에는 반드시 ‘충(忠)’ 자를 붙이도록 강요받았다.

이는 고려가 원에 충성을 바치는 국가라는 것을 대내외에 명확히 각인시키려는 조치였다.

결과적으로, 고려국왕은 더 이상 자국 최고통치자라 자처할 수 없었다. 고려국왕은 원황실 사위, 즉 부마에 불과했으며, 고려는 자주적인 제국이 아니라 종속된 부마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변화는 고려 정치·외교적 위상뿐 아니라, 국가 정체성
그 자체를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원 간섭기는 한국 역사상 처음 겪는 외세 직접적 내정 간섭기 였다.

삼국시대 말기, 당나라는 고구려 와 백제를 멸망시킨 뒤 그 땅에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를 설치하며 한반도에 대한 직접 통치를 시도했다. 그러나 신라와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결국 도호부 체제는 실패로 돌아갔고, 당은 한반도에서 철수하였다.

그에 반해, 원 간섭기는 단순한 침략이 아닌, 고려왕실 내부까지 개입하여 왕 책봉권과 혼인, 내정 전반을 통제한 전례 없는 주권 침해였다. 이는 단순한 군사점령 이나 조공외교 수준을 넘어, 고려가 실질적으로 원 제국 부속국으로 전락한 <원 간섭기>
시대였다.

고려는 이때까지 한국사 사상 가장 깊은 주권침해와 왕권약화 시대로 들어섰고, ‘자주와 독립’은 역사책 속 수사로만 남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고려영토는 잘려 나가고, 고려 내부엔 ‘이중정부’가 세워졌다

원은 고려북부를 직접 지배하기 위해 쌍성총관부, 동녕부를 설치 했고, 제주도에는 말 사육한다 명목으로 '탐라총관부'를 설치 한다

이는 고려 영토 내 원 직할령 이었다.

심지어 개경 이북지역까지 원 영향력 하에 놓이면서, 고려 조정은 실질적으로 국토 절반 이상을 통제하지 못하는 형국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정동행성'이라는 행정 기구가 고려내부에 설치되었다.

정동행성은 여몽연합군으로 본래 일본정벌을 위한 군사기구로 만들어졌지만, 점차 상설화되며 고려를 관리·감시하는 내정간섭 기구로 기능했다.

원 세조의 강요로 일본정벌을 두 차례나 감행하면서 고려 국력을 소진시켰던 것이다.

고려는 이제 원 명령과 감시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국가가 되었다.

이처럼 충렬왕 시대는 고려라는 나라의 정체성과 자존이 가장 거세게 흔들렸던 고려사에서 굴욕의 시대였다.

충렬왕 개인에게는 한 몽골여인 남편이 되었을 뿐이지만, 국가적 으로는 고려가 원나라의 속국 수준으로 편입된 사건이었다. 주권을 지켜야 할 군주가, 황제 사위가 되면서 스스로 종속의 족쇄를 껴안은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충렬왕 통치는 평탄하지 않았다. 충렬왕은 국정을 안정시키기보다, 권신과 외척세력 사이에서 휘둘렸다. 특히 원 황실에서 온 공주와 그 측근들, 그리고 고려 내부권신들 얽히면서, 고려조정은 끊임없는 갈등에 시달렸다.

충렬왕 왕권은 한없이 나약했다.

충렬왕 측근으로 세도를 부리던 '무비'가 세자(충선왕)에게 주살 되자 정치에 염증을 느껴 왕위를 세자(충선왕)에게 물려주고
 태상왕이 되었다가 '충선왕'이 제국대장공주 측과 권력다툼을 하다 모함 받아 원나라로 소환 되자 충렬왕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이후 충렬왕은 정사를 돌보지 않고 사냥과 음주 가무 에만 몰두하다가 사망했다.

이처럼 충렬왕은 왕위를 물러났다 다시 복위하는 이례적인 왕위반환 사태까지 겪게 된다.

이는 고려에 왕은 있었지만, 왕권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려왕 정도는 원 황실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참혹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이런 참혹한 현실이었던 충렬왕 대에 유교적 교육제도가 강화되고, 민족문화 뿌리를 찾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승 '일연'이 '단군신화'를 최초로 담은 민중 역사서 '삼국유사'를 저술했다. 편찬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충렬왕 재위시절 1281년 부터 1283년 사이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13세기 고려는 무신정권 폭정에 이어 몽골침략이 30년 동안 이어 지면서 민중들 삶은 더욱 피폐해 지고 있었다. 찬란했던 천 년 신라 영화도, 높게 뻗어가던 고려기개 도 옛일이 되어 버렸다.

몽골 외세침략으로 국토는 파괴 되었고 백성들은 무신정권 수탈 고통에 시달렸다.

몽골침략에 끈질긴 저항은 이어 졌지만, 그로 인한 백성들 아픔이 너무나 컸다.

'일연'은 고려가 원나라 간섭을 받으면서 민족적 자존감이 무너 지고, 불교마저 정치도구화 되던 엄혹한 시대를 살았다.

혼란과 상실시대 속에서 일연은
백성과 함께 고통을 나누었고, 무너진 민족정신과 역사적 자긍심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런 마음으로, 일연은 불교승려 길을 걸으면서도 민간에 전해 내려오던 신화와 설화, 고대 향가, 불교 관련 일화 등을 한데 모아 방대한 역사서 '삼국유사'를 집필 했던 것이다. 그가 이 작업을 시작 했을 때 일연은 이미 일흔을 넘긴 고령이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삼국유사'가 아니었다면, '단군신화'는 전해지지 못 했을 것이고, ‘서동요’나 ‘혜성가’ 같은 향가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삼국사기'가 유교적 관점에서 국가중심 정치사 위주로 서술 되었다면, '삼국유사'는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민간 구전 문화와 고대신화, 전설을 포용함 으로써 삼국 정신적·문화적 뿌리 를 복원했다.

<'삼국유사'는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민족 혼을 지켜낸 문화유산이자 '삼국사기'를 뛰어나게 보완하는 또 하나의 역사적 정본(正本)이라 할 수 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 또한 충렬왕 시대에 편찬된 대표적 기록물 이다.

1287년 제왕운기 편찬 당시 '이승휴'는 1280년 충렬왕에게 실정과 부원세력들 폐단등 10여 가지를 상소했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고, 부원세력들 반격으로 파직되어 은둔했는데, 제왕운기는 이승휴가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이승휴는 고려 말 무신 정권과 그 뒤를 이은 여몽전쟁등 연이은 난세에서 유교적 이념과 국가질서 회복을 역사기록으로 제시하려 했다.

그 외에 이승휴가 원나라에 2차례 사신으로 파견된 적 있었기때문에 원나라에 의해 고려 정체성이 훼손되지 않을까하는 위기의식도 느꼈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일연 삼국유사와 동기가 유사하다.

하지만 제왕운기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와 달리 역사분야가 아니라 국문학 분야로 보기도 한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운율시 형식으로 서술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부흥은 원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되살리려는 고려인들 몸부림 이었다.

정치적으로는 무기력했지만, 오히려 그 한계가 민족적 의식을 자극한 셈이다.

충렬왕을 보는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나라를 원에 갖다 바친 무능한 군주>라는 비판도 있지만, 달리 보면 그는 <항복이라는 현실적 타협을 통해 나라를 보존한 왕>이기도 하다.

충렬왕이 원 사위가 아니였다면, 고려는 몽골 침공 속에 역사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다.

충렬왕 외교적 선택은 어쩜 굴욕 이었지만, <필사적으로 국가를 살려낸 생존의 정치>였다.

충렬왕은 굴욕시대를 살았지만, 나라는 잃지 않았던 왕, 그가 바로 충렬왕이었다.

이어서 <충선왕 개혁정치와 충렬왕과 갈등>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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