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열두 사도 중 시몬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은 두사람이 있습니다. 한 분은 요나의 아들 시몬 베드로이고, 다른 한 분은 열심당원 시몬입니다. 열심당원 시몬은 신약성서에서 단지 사도 명단에만 올라 있을 뿐이고 그 외 다른 정보는 알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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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심당원 시몬(1661년) 유채화, 98.3×79㎝, 렘브란트 그림 | ||
열심당(Zealot)에 관해서는 예수와 거의 같은 시대에 활동한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AD37 ~ 100쯤)가 그의 저서 '유대 고대사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주고 있습니다. 그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엣세네파 등 3개 학파외에 열심당을 '유대인의 제4 학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요세프스의 기록에 의하면 "열심당의 창시자는 갈릴리의 유다이다. 그 신조는 바리새인과 같다. 그러나 자유에 대하여 더할 나위 없는 애착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은 유일한 지배자이며 주님이다'라는 신앙을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열심당원 중 극단주의자를 시카리(암살자)라 불렀습니다. 그들은 무리를 지은 무리로서 반달 모양의 단검을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그들의 단검이 로마의 '시카'라는 낫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여 이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입니다.그리고 이 무기로 수많은 사람을 암살하는 행위도 서숨지 않았습니다.
역사학자들의 의면 "열심당원은 죽음을 우습게 여겼고, 친척이나 친구를 죽이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목숨이 끊어져도 하나님 말고는 누구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 굳은 결의는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다."라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열심당의 정신적 선구자는 마카베오입니다. 그의 뜨거운 종교적 열의가 검을 들게 하였고, 주전 2세기에 이교도를 유대 땅에서 몰아내어 하스몬 왕조를 유대땅에 열게 됩니다. 이 마카베오의 이상은 로마가 팔레스틴을 정복하여 유대인을 지배하게 되면서 부활하였는데 아마 열심당원도 그 중에 일부일 것으로 보입니다.
열심당은 주후 6년에 있은 로마의 호적 조사 때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갈릴리의 유다가 그 첫 지도자입니다(행 5:37). 유다가 죽은 후에도 그들의 독립 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열심당원은 당면한 원수 로마 군대를 팔레스틴에서 몰아내고, 로마의 지배로부터 유다를 해방시키며, 로마의 국기를 예루살렘의 게양대에서 내려 찢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때가 이르면 메시아의 힘으로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확신하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후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를 가리켜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선지자는 두말할 것 없이 메시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5).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은 일찍부터 자기들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메시아는 바로 예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마 그는 예수를 조국의 독립 운동에 이용하기 위하여 예수의 제자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학자 오스카 쿨만의 저서 '예수 시대의 혁명가들'에 따르면, 예수 주위에는 열심당원과 같은 사상을 품고 있는 제자들이 모여 있었고, 열심당원 시몬 외에도 다음 제자들이 그 계열에 속한다고 하였습니다.
가룟(이스카리옷)이란 말이 라틴어 시카리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우선 가룟 유다,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던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주 예수께서 보아너게(우레의 아들)라는 별명을 지어준 요한과 야고보 형제 아마 이들도 열심당원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베드로가 검을 가지고 있다가 겟세마네에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일이라든가, 세베대의 아들들이 주 예수의 좌우편 자리를 원했던 일이라든가, 제자들이 그 나라에서 누가 가장 높은가 하는 문제로 말다툼을 한 일 따위는 모두 열심당원과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열심당원 시몬은 처음부터 정치적인 메시아 사상의 소유자로서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시몬은 처음부터 열심당원으로서 다음과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첫째, 만군의 주 여호와에 대해 열심인 광신도였습니다.
둘째, 율법에 대해 열심인 엄격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셋째, 애국심에 불타서 조국 독립에 대해 열심인 국수주의자였습니다.
넷째, 이방인 배척에 열심인 극단적인 배타주의자였을 것입니다.
다섯째 과격한 수단을 쓰는 일에 열심인 폭력주의자을 것입니다.
여섯째. 게릴라 전술에 열심인 테러리스트을 것입니다..
열두 사도 중 한 명으로 부름 받은 열심당 시몬은 주 예수와 밤낮 함께 행동하며 비로소 예수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인 예수는 사랑의 왕국에 합당한 국민을 만들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의 피로써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시려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몬은 자기 인격도 사상도 날로 변화하는 것을 느꼈을 것이며, 주 예수의 말씀이 자나 깨나 머릿속에 맴돌며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시몬은 주 예수를 통해 지금까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충격을 느꼈을 것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8~42).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애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시몬은 자기의 인격도 사상도 완전히 변하여 다른 사람이 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열심당원'이라는 이름 그대로 모든 것에 대해 열심이었습니다. 단지 열심의 대상이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바뀌었을 따름이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이었습니다.
둘째, 복음에 대하여 열심이었습니다.
셋째,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수립을 위해 열심이었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적대자인 사탄과의 전투에 열심이었습니다.
다섯째, 죄에서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열심이었습니다.
여섯째로 영적인 투쟁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내놓았습니다.
열심당원 시몬은 하나님 나라의 투사가 되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 그는 폭력주의를 부정하고, 주 예수의 희생적인 사랑을 따랐습니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떠나가신 후 주의 사도들은 한결같이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떠나 해외 전도를 하였습니다. 시몬은 애굽과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 등 넓은 지역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예순 살의 나이를 갓 넘긴 무렵 머나먼 이방에서 슬픈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일찍이 자기가 속해 있던 열심당원들이 벤 엘리아살 야일의 인솔 아래 겨우 천여 명의 소수 병력으로 막강한 로마 군대에 맞서 싸운다는 소식입니다. 그들은 사해를 눈 아래 굽어보는 마사다 요새에서 농성한다고 소식을 듣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토벌하는 로마군 사령관은 플라비우스 실바로서, 그가 거느리는 토벌군은 제10군단 1만5천 명입니다. 마사다의 열심당원들은 3년 동안 버티다가 주후 73년 4월에 거의 전원이 장렬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었을 것입니다.
열심당원이었던 젊은 날의 시몬은 사람을 죽이는 일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그릇된 혁명가였고 테러리스트였습니다. 따라서 시몬이 주 예수의 부름을 받아 제자가 되지 않았었다면, 아마 마사다에서 로마군과 싸우는 혁명가 중 한 명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새롭게 거듭난 시몬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새로 다짐하였습니다. 일찍이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은 그 후에도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복음을 들고 중동 지역을 바쁘게 순회하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열심당원 시몬은 페르시아 지역을 전도하며 이교도들의 수많은 박해를 받았다고 합니다. 때로는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몽둥이로 매를 맞아 거의 죽을 뻔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굴복하지 않고 수아닐이라는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그는 수아닐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이교도에게 붙잡혀 톱으로 허리를 잘려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이곳이 지금은 이란의 쉬라즈입니다. 이곳에는 열심당원 사도 시몬의 순교 기념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박해 때문에 교인들은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시무하시던 목사님은 이곳에서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이곳을 지키는 집사 부부가 있는데 그분들에게 물었습니다. "집사님 왜 이곳을 떠나지 않습니까?" 그 집사님께서는 "저희도 떠나버리면 이곳 교회는 주인이 없는 것이 되어 이슬람 사원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저희 가족은 7년동안 성찬식을 한번도 하지 못하였다" 하면서 성찬식을 같이 할 수 없겠냐고 우리들에게 부탁을 할 때 저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우리 일행은 울면서 성찬식을 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아직까지도 이곳에 주님의 귀한 복음의 씨를 남겨 놓았고 이 씨를 통하여 이곳 이란도 복음의 열매가 날 것을 믿게 하여주신 주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곳 쉬라즈에 있는 집사님의 가정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기도를 부탁드림니다.
령천교회 선교 목사 김용규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