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평
潘碩枰
조선 중기의 문신
| 본관 | 광주(光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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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얼(庶孼) 출신으로 신분의 설움을 딛고, 형조 판서까지 이른 조선 중기의 문신. 8도 감사(八道監司)에 5도 병사(五道兵使)까지 지냈으며 1540년(중종 35년) 5월 20일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신분질서가 엄격했던 조선 전기에 천민이 면천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았다. 하지만 몇몇 뛰어난 인물들이 실력을 앞세워 그 철옹성 같은 벽을 뚫고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아로새겼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직계 조상인 반평석이 바로 그 인물이다. 반기문
광주 반씨 가문의 족보에 따르면 반석평은 서얼(庶孼) 출신인데 13세 때 아버지 반서린이 사망하자 어머니 회미 장씨가 아들 3형제를 이끌고 서울에 이사했다고 한다. 양반이 양첩으로부터 얻은 자식이 서(庶)이고 비첩으로부터 얻은 자식이 얼(孼)이다. 그렇다면 장씨가 서울 양반가의 노비로서 반서린의 비첩이었는데, 남편 사후 상전에게 신역을 지불할 능력이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상전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뜻이 된다. 유몽인의 《어우야담》
‘반석평은 본래 이 참판 댁 가노였다. 비록 노비였지만 두뇌가 명석하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지극해서 상전의 아들 이오성이 글을 배울 때 밖에서 도둑공부를 했다. 한데 어느 날 이오성이 공부하던 《통감절요》를 훔쳐보다 이 참판에게 들켰다. 이 참판은 석평의 학문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고 노비문서를 불태워 면천시킨 뒤 후손이 없는 친척집에 양자로 입적시켰다. 과연 그의 기대에 걸맞게 반석평은 과거에 급제한 뒤 출세를 거듭하여 형조 판서에 이르렀지만 이 참판의 집안은 몰락을 거듭했다. 훗날 초헌을 타고 입궐하던 반석평은 길거리에서 거지꼴로 배회하던 이오성을 발견하고 집에 데려와 후히 대접하면서 그 동안 양반 행세한 사실을 사과했다. 며칠 뒤 반석평은 임금에게 나아가 자초지종을 자백하면서 나라를 속였으니 처벌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임금은 그를 기특하게 여겨 사면해 주고 옛 주인 이오성에게 사옹원 별제 자리를 내려 주었다.’
이와 같은 반석평의 일화는 수많은 사서에 기록되면서 천민 출신으로 입신양명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 알려졌다. 그런데 《중종실록》
‘석평은 천얼 출신으로 시골에 살았는데, 그가 학문에 뜻이 있음을 조모가 알고 천얼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가문을 일으키고자 손자와 함께 서울로 와서 셋집에 살면서 길쌈과 바느질로 의식을 이어가며 취학시켰다. 드디어 과거에 급제하여 중외의 관직을 거쳐 지위가 육경에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그 조모를 현명하게 여겼다.’
천출의 설움을 딛고
반석평(潘碩枰)이 활동했던 중종 시대는 반정 이후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권 다툼으로 정국이 소란했던 시기였다. 게다가 북방에서는 여진족, 남방에서는 왜인들의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반석평은 재상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8도 감사(八道監司)에 5도 병사(五道兵使)까지 지냈고 종국에는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반석평은 개국공신인 반충의 후손으로 1472년(성종 3년) 옥구군 회현면에서 반서린과 회미 장씨 사이의 3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반충이 광주백(光州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호남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의 형 반석정과 동생 반석권은 각각 현감까지 지냈다.
그는 갑자사화
반석평의 첫 관직은 사초 및 임금의 명령을 기록하는 예문관중종
왕명을 받은 반석평은 12월까지 함경도 지역을 순찰하고 돌아왔다. 이때의 경험은 그가 장차 북방전문가로서 활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보고서를 읽고 만족한 중종이 홍문관 교리에 임명하자 사간원이 반발하면서 서경을 거부했다. 그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중종은 사간원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에게 청요직을 제수했다. 조선 전기에는 관리에게 품계를 넘어서는 벼슬을 주려면 절차상 서경을 거쳐야 했지만 특별한 경우 국왕의 강제가 가능했던 것이다.
북방의 길을 걷다
1516년(중종 11년) 1월 19일 영의정 정광필
1519년(중종 14년) 11월 남곤·심정·홍경주 등의 훈구세력들에 의해 조광조·김정·김식 등 사림이 참변을 당한 기묘사화
이에 따라 위장 이함, 한규, 유홍이 이끄는 조선군이 야인 정벌에 나섰지만 허공교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자 조정 신료들은 11월 26일 반석평이 작전을 펼치며 군기를 살피지 않은 데다 삼수군수 권훈에게 도로를 살피게 한 일이 패배의 근본 원인이라며 파직을 종용했다. 대세에 밀린 중종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벼슬을 거두었지만 이듬해인 1524년(중종 19년) 6월 17일 그를 병조 참의로 임명함으로써 변함없는 신임을 보여주었다.
1525년(중종 20년) 4월 이산(梨山) 지역에서 활동하던 야인 왕산적하가 검천(儉天) 등지의 야인들을 규합해 운정평에 모여들고 있다는 일급정보가 입수되었다. 조정에서는 급히 군대를 파견해 왕산적하를 체포했는데 그 무리들이 준동할까 두려워 처벌을 미루다 반석평의 조언에 따라 일벌백계로 참형에 처했다.
그해 11월에는 야인 지역으로 도망쳤다가 잡혀온 정주 출신의 죄수 김두응구리(金豆應仇里)의 처분이 논란에 올랐다. 호조 판서 허굉은 그가 미욱하고 용렬한 사람으로 고역을 견디지 못해 탈출한 것이니 용서하자고 제안했지만 반석평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 자는 경흥 사람인데 역사를 싫어해 야인 땅으로 도망쳤다가 쇄환된 것이니 국법에 따라 처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를 본받아 변방의 백성들이 무수히 도망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반석평의 주장은 변경의 정세를 두루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의 의견에 따라 중종이 김두응구리를 엄벌에 처했음은 물론이다. 1527년(중종 22년) 중종은 북방전문가로서의 능력을 인정하여 함경북도 절도사에 제수했다.
1528년(중종 23년) 1월 19일 함경북도 유원첨사 원세상이 재목을 벌채하기 위해 병사들을 거느리고 강을 건넜다가 야인 2백여 명의 습격을 받았다. 그들은 접전 끝에 적군 1명을 생포했지만 아군 6명이 적의 포로가 되었다.
함경도병사 반석평의 보고를 받은 임금은 급히 정부·비변사·병조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한 끝에 진장 최준명과 원세상이 적을 끝까지 추적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도형(徒刑) 3년에 처했다. 도형이란 비교적 중한 죄인을 관가에 구속해 두고 노역에 종사하게 했던 형벌이었다. 그들은 반석평의 죄도 물으려 했지만 현실적으로 그를 대신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경차관을 파견해 경고하는 것으로 그쳤다.
평화를 이끄는 법
1530년(중종 25년) 1월 16일 반석평은 종2품직인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경연의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당시 경연에서 반석평은 중중에게 사노비 추쇄를 각 도의 도사(都事)에게 맡기는 것이 부당하다고 따졌다.
“신이 북도 병사로 있을 때 도사들은 공사천의 문서를 조사하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국가에 예속시키곤 했습니다. 일개 사(司)의 경우 당상(堂上)과 낭관(郞官)이 같이 상의하여 처결해도 착오가 나는 법인데 그처럼 한 도의 일을 도사가 독단적으로 처리한다면 어찌 억울한 경우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 때문에 백성들이 감사에게 억울함을 호소해도 외면당하기 일쑤이니 원성이 그로부터 나옵니다. 또 송사를 좋아하는 간사한 무리들이 문서를 위조해 양민을 노비로 삼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도의 사람들 가운데 본래부터 노비인 사람은 없고 죄인의 가족으로 강제 이주된 자가 태반입니다. 그들을 문서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모두 노비로 만들면 국가는 양민을 잃게 되므로 이득이 없습니다.”
일목요연한 반석평의 논리에 중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폐단을 일소하라고 지시했다. 이듬해인 1531년 6월 반석평은 성절사로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그의 임무는 조선의 오랜 외교숙제인 종계변무
양반들의 끝없는 견제
그해 11월 성절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2월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당시 전라감영은 전주에 있었으므로 반석평은 자연스레 고향인 군산 회현면에 수차례 들렸다. 그때 옥구현 관원들은 그를 칭송하는 한시를 객사 현판에 새기는 등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그 무렵 부인 남양 박씨가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난 뒤 홀아비 신세였던 반석평은 창원부사의 딸인 예안 이씨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한데 그녀 역시 아이를 낳지 못하고 4월부터 병석에 누웠다. 애처가였던 그는 조정에 품의하지 않고 문병을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그 결과 파직되는 불운을 당하기는 했지만 5월 3일 아내의 임종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해 6월 5일 중종이 그를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하자 5일 후인 6월 10일 사간원에서 재차 시비를 걸었다. 그가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도 죽은 처의 장기(葬期)를 멀리 50일 밖으로 정했으니 임지에 부임하지 않으려는 술책이라는 것이다.
대간의 딴죽에 지친 중종은 그를 파직하고 새로운 관찰사를 내보냈다. 7월 19일에는 그를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임명했지만 또 다시 대간이 반대하자 임명을 취소했다. 그러고 보면 반석평에게 붙여진 8도감사란 명예는 그에 대한 양반들의 견제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낙인이기도 했다.
그렇듯 신료들과 맞서 반석평의 임명과 파직을 거듭하며 기 싸움을 벌이던 중종은 드디어 그해 10월 24일 반석평에 대한 평안도 관찰사 임명을 관철시켰다. 조만간 명나라 사신이 들어올 것이니 북방전문가인 그를 평안도에 배치해야 한다는 구실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현지에 부임하는 날 중종과 반석평은 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방책을 신중하게 논의했다.
“평안도는 다른 도와 달리 명나라 사신이 자주 왕래하는 곳이니 유념하여 백성들을 돌보라. 근일 사신이 오게 되면 백성들이 더욱 괴로운 지경에 빠질 것이다. 또 그 소식이 알려지면 것을 민간에서 소동이 일어날 테니 경이 가서 백성들을 보살피고 잘 달래도록 하라.”
“양계의 방어가 똑같이 중요하지만 북도는 진과 진의 거리가 가까운 반면 평안도는 거리가 멀어 군사들의 고초가 너무 큽니다. 더구나 명의 사신들이 자주 오가는 바람에 군마들도 몹시 지쳐있습니다. 최근에는 삼등현(三登縣, 현재의 능성, 양양 지역)에 기근이 심하여 내년 봄쯤이면 백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질 형편입니다. 전하께서는 명의 사신 파견이 불확실하니 공급할 물건을 천천히 준비하라 하셨는데, 대신들은 길닦이는 미리 해 둘 것이 없고 연로의 관사를 수리할 목재들은 농사 틈을 이용하여 형편에 따라 예비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미리 예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갑자기 사신이 오면 창졸간에 서두르다 실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신이 오는 날이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미리 준비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하지만 농사 틈틈이 가능한 것은 준비하도록 하라.”
노비의 전설이 되다
1536년(중종 31년) 3월 21일 중종은 반석평을 종2품 호조 참판에 제수했다. 그 무렵 야인 동평고(童平古)가 귀순할 뜻을 보이자 그는 중종에게 야인들을 남쪽 섬에 살게 하여 백성들과 분리시킨 다음 훗날 변방에 급한 일이 생기면 길잡이로 삼으라고 조언했다.
이전부터 조정에서는 여진의 귀화인들을 일정 지역에 거주케 하고 통행을 금했지만 관리들의 태만으로 본토 야인들과 수시로 교통하고 있었다. 야인들의 사정을 꿰뚫고 있었던 반석평은 그들을 완전히 격리수용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중종은 새삼 그의 식견에 감탄하면서 공조 판서에 제수하려 했다. 한데 사간원에서 반대했다.
“반석평은 시종이나 대간을 역임하지 않았고 자급이 종2품에 불과한데 어찌 정2품의 직임에 삼으려 하십니까?”
“지금은 인물이 부족해서 육경(六卿)에 궐원이 생기면 종2품을 서용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나마도 합당한 인물이 모자란다. 공조는 이조·병조와는 비중이 다르니 상관없다.”
이젠 중종도 만만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자 사헌부에서 사간원을 편들고 나섰다. 이전에 반석평이 수차례 대간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논박 받아 체직되었는데 갑자기 육경의 직임에 올려놓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양사에서 그처럼 따지고 들자 버티던 중종도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대신 10월 30일 공조 참판을 제수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1539년(중종 34년) 1월 10일, 중종은 그를 동지중추부사에 제수했고, 2월 28일에는 형조 참판에 제수했다. 정황을 보면 중종은 끊임없이 반석평의 벼슬을 올려주려 했고, 대간에서는 끈질기게 반대하는 형국이었다.
그해 6월 함경남도 병사 우맹선은 야인 나쌍개(羅雙介)의 무리가 해안에서 고기를 잡으면서 본거지로 돌아가라는 관의 명령에 저항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또 평안도 감사 김인손은 야인들이 귀순하면 으레 만포진으로 몰려와 수많은 물품을 요구해 괴롭다고 하소연했다. 그러자 지금의 서울시장 격인 한성부 판윤에 재임하면서 특진관으로 경연에 참석하던 반석평은 8월 29일 이 문제의 해결책을 내놓았다.
“신이 만포 첨사로 재직할 때 용맹스런 군사를 뽑아 야인지역을 정탐하게 하고 만일 야인들이 그곳에 터전을 잡으면 죄를 묻겠다고 경고했습니다. 우예와 자성은 길이 몹시 험하고 멀어서 정탐하려면 적지에서 하룻밤을 자야만 진입할 수 있습니다. 그 중간에는 상무로(上無路)와 하무로(下無路)라는 지명이 있는데, 무로(無路)란 길이 없어 갈 수 없다는 뜻이니 그 험악함을 짐작할 만합니다. 여연과 무창은 토지가 기름져서 곡식이 잘되니 야인들이 즐겨 찾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그 동안 해마다 정탐한 탓에 저들이 함부로 오지 못했는데 지금은 금하지 않으므로 현지에 뿌리박은 야인들이 꽤 늘어났을 것입니다. 부니 조정에서 의논하여 저들을 타이르고 전례에 따라 매년 봄가을로 정탐하게 하면 변방의 근심을 덜 수 있겠습니다.”
반석평은 변방에 근무하는 장수들이 야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수시로 벌이는 잔치에 대해서도 개선안을 내놓았다.
“변방의 장수가 야인들을 접대하는 것은 본디 정해진 법이 있는데 지금은 풍성하고 사치하기에 힘쓰고 백성들의 폐해를 따지지 않으니 걱정스럽습니다. 제가 회령부에서 벌인 잔치를 보았는데 감사와 병사에 이어 우후·부사·도사·평사·중추첨지 등의 벼슬아치 앞에 술상을 죽 늘어놓고, 음식을 내놓는데 소주는 거의 70여 동이나 됩니다. 그 비용은 나라의 잔치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잔치가 끝날 때면 과일과 어육을 거두어서 주고, 그릇과 소금, 방석과 면포 등을 야인 추장에게 예물로 주는데 이 또한 모두 민간에서 거두니 백성들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잔치 때 쓰는 술은 한 말의 좁쌀을 민간에 나눠주고 사람 수를 따져서 각각 한 병씩을 거두니 가난한 백성들이 분량을 채우지 못해 여기저기서 사다가 바칠 수밖에 없습니다. 돼지를 민간에서 징발하면 백성들은 소를 팔아 돼지를 사서 바치곤 합니다. 회령뿐 아니라 각 진이 모두 마찬가지이니 그런 폐단을 없애지 않고서는 백성들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반석평의 조언에 따라 중종은 곧 변방 장수들이 야인들을 접대할 때 사치를 금하도록 명함으로써 현지 백성의 부담을 줄여 주었다. 그해 10월 14일 경연에서 반석평은 양반들이 전답과 노비를 매매할 때 불법 행위가 많다는 사실을 적시하면서 해당 관서의 수령들이 서류를 보다 면밀하게 검토할 수 있도록 세부절차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 무렵 일부 악덕 양반들이 서로 짜고 자신들끼리 매매했던 노비나 논밭, 저택 등을 누군가 훔쳐다 판 것이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건 다음 승패가 가려지면 관아에서 현재의 시가대로 되돌려 받아 함께 이익을 나누는 기획소송이 판을 치고 있었다. 반석평은 자신이 다스리는 한성부에서는 이에 대한 방책을 마련했는데 다른 지방에서도 이를 원용하면 좋겠다고 보고했다.
그해 10월 28일 드디어 중종은 사정전에 나가 친히 반석평에게 형조 판서를 제수했다. 그 동안 대간의 갖은 견제를 받던 반석평은 67세에 이르러 정2품관이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노대신의 승차에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검증된 능력이 타고난 신분을 이겨냈던 것이다.
반석평은 1540년(중종 35년) 5월 20일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그가 썼다는 〈관산별곡(關山別曲)〉은 현재 전하지 않고 이행(李荇)이 윤색했다는 기록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