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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긴글] 일제 강점기 / 일본의 만행 /

작성자등대지기|작성시간15.04.24|조회수493 목록 댓글 0

일제시대 연표 /일제 강점기| ★ 일본의 만행/독도는 우리땅


근대사와 현대사사이에 일제강점기시대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시대의의 연표를 사진파일로 올립니다.

 

 

을사조약1905년

일 본에 외교권을 빼앗기는 이른바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졌다.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국제 사회에 알려려고 하였으나 실패함.이후 일제는 외교권의 이에 시법권과 경찰권마저 강제로 빼앗고 이완용 등의 친일 내각을 앞세워 우리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았다.(1910)나라를 빼앗은 일제는 토지조사 사업을 실시하였다.토지를 가진 사람은 주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토지주인,가격,모양과 크기 등을 정해진 날까지 신고를 해야 했다.신고되지 않은 토지를 국유지로 정한 후,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넘겨 일본인에게 헐값으로 팔았다.세금과토지주인이 원하는 비싼 사용료를내는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이어 쌀의 생산을 늘리는 정책인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였다.그 결과 깔의 생산량이 늘어났다. 일제는  늘어난 생산량보다 많은  양의 쌀을 일본으로 기져갔고,우리나라에는 쌀이 점점 부족하게 되었다.농민들의 생활은 치솟은 쌀값과 저수지,물길을 만드는  공사비까지 떠맡게 되어 더욱 어려워졌다.견디지못한 일부 농민들은 도시나 만주, 일본등으로 떠났다.일제느 쌀과 면하를 수출하는 항구와 교통의 중심지,일본군이 주둔하는 곳,공장이 세워진 곳을 도시로 발전시켰다. 특히 일본인이 많이 사는곳을 도시로 지정하여 상하수도를 정비하고 ,의료 시설을 확충하였다.일본일과 소수의 한국인들은 건물 내에 회징실과 목욕탕을  갖춘 신식 주택을 짓고 살았다.그들은 백화점과 상가에서 물건을 사거나,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등 여가 생활을 즐겼다.그들의 자녀는 서양식 교복을 입고,새로 지어진 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일제강점기 동안 도시의 수가 늘어나고 새로운 문물이 들어와 생활이 편리해졌다. 일본인과 소수의 한국인들만 그 혜택의 누릴뿐,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1936년 무렵 서울의 인구는 약60만명이었는데 토막민은 11만면정도였다.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일제는 전쟁에 필요한 사람과 물자를 우리나라에서 강제로 동원하였다.군수 공장을 건설하고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지하자원 뿐만 아니라 학교 철문,교회의 종, 가마솥, 놋그릇, 숟가락 등 금속제품을 강제로 가져갔다.그리고 감자,고구마,소,돼지 등 군인들의 식량이 도리만한것을 모두 거두어 갔다.일제는 수십만의 학생들과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갔다.또 수백만의 사람들을 탄광,군수 공장,공사장에 대려가 임금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은 채 혹독하게 일? 시켰다.끌려간 사람들중에는 여성들도 많았는데, 그증 젊은 여성들은 전쟁터로 보내져 일본군에게 많은 고통을 당하기도하였다.군대해상 리후 ?부 군인들이 참여하면서  전투력이 강화되고 조직적인활동을 전개하였다. 의병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안반,농민,군인뿐만 아니라 노비,상인,승려,포수 등 다양한 신분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이병에참여하였다.의병장으로 국내외에서 항일전을 전개하던 안중긍은 우리나라 침략에 앞장섰던 이토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랑하려 민족 돌립의 의지를 보여주었다.(1909)여러분야에서  민족의 힘을 키우기 위한 계몽 운동이 전개 되었다. 계몽 운동가들은 학교 를 세워 민족정신과 민족의식을 키우고자했다.안창호와 이승훈은 평앙과 정주에서 각각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세웠고,강연회를 열거나 책을 발행하여 국민을 계몽하였다.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언론도 비롯한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고 국민을 계몽하며, 항일 의식을 높이는데 큰 역힐을 히였다.또,일본에 진 나라 빚을 국민의 힘으로 갚자는 운동이 대구에서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되기도하였다.일제의 강압 톤ㅇ치에 위축되어 있던 우리민족은 자기 민족의 일은 민족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 자결주의 와 일본 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에 영향을 받아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다.1919년3월1일 서울인사동에서 각 종교계지도자로 구성돤 민족대표33인이 모여 독립 선언식을 가졌다.독립운동가들은 효과적 돌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우리민족 지도자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일제의 손길이 덜 미치는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독립운동의 활동 무대를 옮겼다.우리민족은 그곳에서 독립군 기지 를 건설하고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엿으며,민족 교육 운동을 펼쳐 민족의 힘을 길렀다.롱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가 크게 활약하였다.홍범도장군은 독립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봉오동을 습격한 일본군을마장 큰 승리를 거두었고,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는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이봉창 의사는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인 일본 국왕을 없애기 위해 일본 도쿄에서 일본국왕을 향햐 폭판을 던졌다.(1932)비록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일제에 우리 민족의 항일 의지를 보여 주었다.윤봉길 의사는 중국 상해에서 열린 일본국의 상해 점령 축하 기념장에 물통과 도시락 모양으로 만든 폭탄을 던졌다 (1932)이사건으로 일본군 최고 사령관을 비롯한 일본의 주요 인물들이 죽거나 다쳤다.나라를 빼앗은 일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여러 정책을 실시하였다.학교에서 일본어와 일본역사를 가르쳤고, 거짓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꾸며 가르쳤다.또 예술과 문화활동은 일제의 한국 실민지배를 찬양하는 내용만 하도록 허가하였다.이러힌 일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더욱심해져 일제는 한글 사용을 금지하고,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하였으며, 전국각지에서 일본선사를 세워 절을 하도록 강요하였다.이윤재,최현배등은 조선어 학회를 조직하여 한글 및 강습회 개최를 통해 한글을 보급에 앞장섰다.박은식은 일제침략과 우리나라 관한 책을 써서 우리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의지를 심어 주고 하였다.신채호는 을지문덕,이순신등의 영웅전과  고조선과 고구려 등에 관한 역사책을 써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고 우리역사의 주인이 우리 만족임을 강조하였다. 민족의 혼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문학 예슬 종교 체육 까지 확산 되었다.한용운 심훈 윤동주 등은 민족이 처한 아픔과 독힙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작품에 표현 하였다. 나운규는 일제강점기 우리 만족의 아픔과 고통을 영화 아리랑 에 담아 감동을 주었다. 또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을 하고도 굳은 표정으로 일장기를 감추는 손기정 선수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나라 잃은 슬픔을 되새기게 하고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지게 하였다.

8.15 광복을 맞이 하였다.

 

 

간추리기...

 

을사조약(1905년)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는 이른바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졌다.

헤이그 특하파견을 하였으나 실패.

 

안중근 의거(1909)

 

한일합방(1910년)

후에 일제가 외교권에 이어 사법권과 경찰권 마저 뺏음.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음.

 

3.1운동(1919년)

 

8.15 광복.(1945년)

 

그외...

국권 강탈후 일제는 총독부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민족의 생활을 일일히 간섭,탄압.

 

우리나라의 제산을 날로 빼앗음.

소유자가 있는 땅을 자신의(일본인) 땅이라하여 땅을 빌려 주고 나중에 배로 갑게 함.

(토지 조사사업을하여 자신의 땅의 넓이, 길이 등을 알리지 않으면 무조건 주인 없는 땅이 됨.우리나라인은 넓이등을 재는 방법도 모르고...)

 

일제로 인해 새로운 문물이 들어와 편리하지만 일본인들만 누릴 수 있음.

 

중.일 전쟁에 필요한 사람과 물자를 우리나라에서 강제 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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