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풍무(31)
빚은 반드시 갚는다(3)
"이런 죽일 놈이……."
곧바로 알아보는 상대의 언행에 모주앙은 살기를 흘렸다. 주하연을
납치할 때가 밤이었기에 알아보지 못할 줄 알았다.
흠칫하는 모주앙의 모습에 백산은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흥분하지 마라 쥐새끼, 잘못하다간 여기 있는 모든 무인들이 네 놈
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 봤나? 황실의
분노가 네놈에게 향한단 말이다. 너만 뒈지면 상관없는데, 저기 있는
네 놈의 상전을 비롯하여, 네 놈과 관련된 자들이 전부 죽겠지. 그 다
음은 누굴까, 내 생각엔 네 놈 가문이 아닐까 싶은데 말이지."
"으음!"
속삭이는 듯 차갑게 던지는 백산의 말에 모주앙은 급격하게 몸을 떨
었다.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자칫 일이 틀어지면 자신의 가문은 씨
몰살을 당할 수 있다.
몸을 떨고 있는 이들은 비단 모주앙뿐만이 아니었다.
백산이 속삭이듯 말했다고는 하지만 이곳에 있는 무인들은 대부분
무공 고수들이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그들의 귓전에도 황실이란
말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들의 얼굴 또한 잔뜩 굳어졌다.
눈앞에 있는 보물 때문에 애써 외면하였던 사실을 백산이 일깨워 준
것이다.
그런 그들의 귓전에 더욱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흘러들었다.
"넌 이곳에서 죽게 될지도 몰라. 남경왕부의 봉선군주님을 납치한
놈은 바로 너였으니까. 그만 봉선군주님의 혈도(穴道)를 풀어라!"
'뭣하는거요 모 가주! 놈의 술수에 말려들지 말고 혈도를 풀고 교환
하시오!'
망연한 얼굴로 주변 무인들을 쳐다보는 모주앙의 귓전에 다급한 제
갈승후의 전음이 들려왔다.
"제기랄!"
낮게 욕설을 뱉어낸 모주앙은 재빨리 주하연의 혈도를 풀었다. 하지
만 그녀의 뇌호혈에 손을 올려놓는 건 잊지 않았다.
여차하면 그녀의 뇌호혈을 파괴하여 백치를 만들어버리겠다는 무언
의 협박이었다.
"큭! 봉선군주님을 없애버릴 모양이구나. 난 물론이고 여기 모여있
는 무인들도 바라는 일이 아닐텐데, 무리하지 않는 게 좋다."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백산은 허리에 찼던 요대를 풀어 주하연 앞으
로 한 걸음 다가갔다.
"자! 동시에 교환하는 거다. 난 봉선군주님의 손을 붙잡고, 넌 마라
엽도의 끝을 잡아. 그리고 서로 공평하게 바꾸는 거야."
일순 평평하게 펴진 마라엽도 한쪽 끝을 모주앙 앞으로 천천히 내밀
었다. 그와 동시에 왼손을 뻗어 주하연의 손을 잡아갔다.
모주앙의 가슴은 터질 듯 벌렁댔다. 마라엽도 끝이 눈앞까지 다가왔
지만 손잡이는 여전히 놈이 잡고 있다.
놈이 마라엽도를 뽑아버리면 요대로 만들어진 도집만 남게 된다. 그
럴 순 없는 일이다.
재빨리 내공을 끌어올렸다. 요대와 동시에 안쪽의 마라엽도까지 내
공으로 붙잡기 위해서였다. 일순 마라엽도를 붙잡고 있는 모주앙의 왼
손에서 백색 광채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반면, 마라엽도의 손잡이와 주하연의 손을 잡고 있는 백산의 손에서
는 어떤 기운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주도권을 쥔 쪽은 백산이었다.
"어떠냐, 여기서 내가 마라엽도를 뽑을까 안 뽑을까. 아니 네 놈이
봉선군주님에게 살수를 쓸까, 아니면 네 놈의 상전이 있는 곳으로 도
망칠까. 여기서 봉선군주님께 살수를 쓴다면 혈마총에 들어가는 건 물
거품으로 변할 터이고, 무림인들과 황실은 네놈을 쫓게 되겠지. 물론
네가 속한 단체에서는 모르는 일로 할 테고."
백산의 말이 계속될수록 모주앙의 신형은 급격히 떨렸다.
"마라엽도를 놓지 않으면 봉선군주고 나발이고 없애버리겠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모주앙은 진득한 살기를 흘리며 오른 손에 힘
을 가했다. 오직 상대를 위협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 주하연을 죽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뒤쪽에 있는 제갈승후는 달랐다. 두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
고 있던 그의 눈에 다급한 표정을 짓는 놈의 얼굴이 보였고, 뒤이어
봉선군주를 죽이겠다는 모주앙의 말이 들려왔다.
재빨리 살기를 가득 담은 전음을 모주앙에게 보냈다.
'모주앙!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잠영루가 멸문당하는 걸 보지 못
했단 말이더냐? 오늘 일이 실패하면 모든 책임을 모씨세가에 물을 수
밖에 없다.'
"이익……!"
나이 어린 제갈승후에게 모욕을 당한 모주앙은 저도 모르게 분노 어
린 신음을 뱉어냈다. 바로 그 순간 일은 벌어졌다.
백산은 두 팔을 거둬들임과 동시에 마라엽도를 들고 있던 오른 팔을
모주앙의 목을 향해 빛살처럼 날렸다.
"크윽! 헉!"
모주앙의 작은 눈이 찢어질 듯 치켜 올랐다. 한 순간이었다. 오른손
을 대고 있던 주하연의 동체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와 동시에 눈앞
으로는 백색 광채가 노을처럼 다가들었다.
그동안 놈의 도발로 인하여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평정심은 제갈승후
의 전음으로 완전하게 깨지고 말았다.
푸-욱!
"이-놈!"
마라엽도가 모주앙의 목을 관통하고 있었다. 제갈승후는 얼결에 고
함을 질렀다. 그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면을 찼다.
"이 놈은 봉선군주님을 납치한 납치범이다. 그를 옹호하고 싶은가!"
모주앙의 목에 마라엽도를 찔러 넣은 백산은 몸을 날려오는 제갈승
후와 북황련 무인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멈춰라!"
백산의 한마디는 그 어떤 말보다 효과가 컸다. 백산 앞으로 다가오
던 제갈승후가 일순 경공을 멈추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모주앙의 목숨보다는 혈마총이 더 중요했고, 혈마총보다는 북황련이
더 중요했다.
조금 전 놈이 말했던 것처럼 봉선군주를 납치한 모든 죄는 모주앙이
뒤집어쓰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수많은 눈이 있는 곳이다. 자칫 잘못하면 봉선군주를 납치하
려하였던 모든 책임이 북황련에게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모주앙을 내보낸 게 실수였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 그의 귓전에 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어떠냐 모주앙, 내 말이 맞지? 아무도, 어느 누구도 네 놈을 도와
주지 않아."
"으으으!"
놀랍게도, 마라엽도에 목을 관통 당한 모주앙은 여전히 살아 있었
다.
"내가 많이 빨라진 모양이구나. 피가 흐르지 않는걸 보니. 일부러
그랬다면 믿으려나 모르겠다."
중인들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목을 관통 당한 복면인은 결코
무공이 약해서 당한 게 아니었다. 조금 전 마라엽도 한쪽 끝을 쥐고
있던 그의 손에는 분명 강기가 흘렀고, 상대는 아무런 기세도 풍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한 쪽은 강기경지에 올라있던 무인이었다.
지금껏 말을 꺼냈던 이유가 그 한번의 기회를 잡기 위함이었다는 사
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부터 봉선군주님을 납치했던 죄인을 벌하겠소. 물론 벌이 끝나
면 마라엽도는 돌려주도록 하겠소이다."
슬쩍 미소를 머금은 백산이 모주앙 목을 관통한 마라엽도를 쥔 채
주하연의 한빙검을 들어 올렸다.
"이 검은 한빙검이라고 봉선군주님의 애검이오."
낮게 소리치며 애원하듯 쳐다보는 모주앙의 오른 팔을 향해 사정없
이 내리쳤다.
"으-어억!"
툭!
붉은 핏방울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모주앙의 오
른 팔은 여태 펄떡펄떡 뛰었다.
그러나 백산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모주앙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그의 왼팔을 향해 다시 한번 한빙검을
휘둘렀다.
"끄어억! 아아악! 살려……줘!"
"하연아 이놈을 죽이고 도망칠 건데 네 생각은? 마라엽도를 던져버
리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모주앙이 비명을 지르는 사이 재빨리 주하연에게 말했다. 마음의 준
비를 하고 있으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주하연은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요, 저도 들어갈래요."
쉬이익!
이번에 한빙검이 향하는 곳은 모주앙의 다리였다. 일순 차가운 광채
가 허공을 가르자 모주앙의 신형이 털썩 무너졌다.
장내를 주시하고 있던 대부분의 무인들은 고개를 돌렸다. 상대를 도
륙하는 자의 행동이 너무 잔인했기 때문이었다.
온통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음에도 검을 휘두르는 자는 조금도 망
설임이 없다. 묵묵히 복면인의 사지를 잘라내고 있을 뿐이다.
"왜?"
"약이 다 떨어졌어요."
약이 떨어졌다는 말에 인상을 찌푸린 백산은 모주앙의 목에 박힌 마
라엽도를 사정없이 돌리며 물었다.
"끄악! 끄으윽! 잔인한…… 놈! 제발…… 죽여……."
"빌어먹을……. 집에도 약은 없는 거냐?"
"제 예상이 맞다면 이곳에 약이 있을 가능성이 많아요. 어차피 죽을
거라면 모험을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이제 그만하세요. 어린애 정신
건강에 안 좋아요."
"알았다, 그럼 같이 들어가 보자."
퍼억!
고개를 끄덕인 백산이 이미 절명한 모주앙의 시신을 사정없이 걷어
찼다. 한참을 날아가던 모주앙의 시신은 정확하게 제갈승후 앞으로 떨
어졌다.
"내가 보기엔 마라엽도는 진짜인 것 같다. 너희들도 확인해 보도
록."
"놈!"
어육으로 변한 모주앙의 시신을 쳐다보며 제갈승후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수많은 무인들 앞에서, 북황련 총사 앞에서 북황련 무인을 갈
가리 찢어버렸다.
더욱 화나는 일은 자신을 비롯하여 수많은 무인들 중 누구하나 모주
앙의 죽음을 애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북황련 무인이 아닌, 봉선군주를 납치한 파렴치한으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인 게다.
그리고 기껏 한다는 말이, 마라엽도의 진위여부를 시험하기 위해 모
주앙을 죽였다고 한다.
"일단은 참겠다. 아니 혈마총에서도 너희 둘만큼은 손대지 않겠다.
네 놈은 더 큰 일을 해줘야 하니까."
제갈승후는 손아귀가 패이도록 주먹을 틀어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