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풍무(43)
음양지극천에서(2)
과앙!
"아-아악!"
백산의 가슴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구마의 입에서 처절
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죽여라!"
구마(九魔)의 이마에 칠성태극검이 박혀드는 순간 검운비는 고함을
내지르며 혈마의 무덤으로 몸을 날렸다.
"크아아!"
여덟 마리의 강시들이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무림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오빠, 어서 이쪽으로!"
만년한철 상자를 흔들며 주하연은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난전에 휩
쓸려 버린 백산은 쉽게 빠져나올 상황이 아니었다.
경공을 펼칠 수 없는 몸 때문에 난전에 휘말리고 말았다.
퍼억!
어느 틈에 강시의 공격을 허용했는지 등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
다.
"니미럴!"
낮은 욕설을 뱉어내며 칠성태극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크-아악!"
"저 놈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나가는 강시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뜻밖에
도 강시를 물러나게 한 사람은 제갈승후였다.
자신을 죽여도 시원찮을 판에 도움을 주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울 놀라운 사실은 말없이 도와주었던 제갈승후가 길을 트고있다는
것이었다.
"뭐, 상관없지."
제갈승후의 뒷모습을 슬쩍 쳐다보던 백산은 재빨리 몸을 날려 주하
연 곁으로 다가섰다.
"들어가자!"
주하연을 번쩍 들어올린 백산은 요정대사를 대동하고 검운비가 들어
갔던 무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좌로 2보, 우로 1보, 뒤로 1보!"
주하연의 입에서 힘에 겨운 외침이 흘러나왔다. 백산이 강시와 싸울
때 사사미혼진을 해진해 두었던 거였다.
주하연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기를 1각여, 멀리서 보았던 혈마총 내
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크-아악!"
진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커다란 괴성과 함께 붉은 덩어리가 일행을
덮쳐왔다. 검운비를 따라 왔던 수라마종이었다.
"들어가십시오, 이자는 제가 맡겠습니다."
재빨리 앞으로 나선 요정이 수라마종의 공격을 받아치며 외쳤다.
"하연아!"
요정을 남긴 채 안쪽으로 들어오긴 했으나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하
여 그녀를 불렀다. 전부 20여 개의 석실이 있었던 탓이었다.
"저곳으로 가요."
안쪽을 살피던 주하연이 가장 구석진 석실 한 곳을 가리켰다. 다른
석실의 석문과는 달리 그곳은 간단한 장식조차 없었다.
그르르!
석실 문이 열리고 외부와 마찬가지로 점점이 은사로 불을 밝힌 석실
내부가 나타났다. 천장을 떠받히고 있는 몇 개의 기둥을 제외하면 석
실 안쪽은 아무것도 없었다.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뜨거운 기운조차 없었더라면 밖과 다를 것도
없었다.
"제길."
내부를 둘러보다가 백산은 낮게 욕설을 뱉어냈다. 고통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주하연을 보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일단 뜨거운 기운이 나오는 곳을 찾아봐요."
하지만 주하연은 포기하지 않았다. 석실 맨 안쪽 벽면을 따라 발을
옮기며 꼼꼼하게 살폈다.
"그래 찾아보자."
주하연 곁으로 다가간 백산은 머릿속 깊이 잠든 감각을 최대한 꺼내
어 벽면을 주시했다. 석벽 건너편에 무엇이라도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
로.
두 사람이 사력을 다해 석실 벽을 찾는 그 순간, 중앙 석실로 들어
갔던 검운비는 두툼한 양피지를 손에 들고 끓어오르는 격정을 감추지
못했다.
기나긴 세월 속에 잠들어 있던 혈마사조의 무공이 드디어 손에 들어
온 것이었다. 혈영수라혈마공(血影修羅血魔功), 수라천가(修羅天家)의
염원이 담긴 무공의 이름이다.
양피지를 들고 부르르 떨던 검운비는 혈뇌를 돌아보았다. 석실 안에
혈마사조 시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혈뇌! 이곳으로 들어왔던 사조님은 어디로 가셨을까."
"글쎄요,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더 이상 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혈영수라혈마공과 아홉 분의 강시를 얻은 것으로 만족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혈마사조의 시신이 없기에 내린 결론이다.
"그분의 목적은 이곳에 혈마총을 세우는 것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혈영수라혈마공 말고 다른 게 또 있다는 말인가?"
흥미롭다는 듯이 검운비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이곳에 혈마총을 세우고 지저사령계 어디론가 가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은 돌아오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혈영수라마공을 극성으로 익
혔던 그분이요."
"으음!"
검운비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더 이상 욕심부리지 말
라는 말을 혈뇌는 그렇게 돌려 말한 것이다.
"알았소, 그렇게 합시다. 마종은 돌아와라!"
이내 고개를 끄덕인 검운비는 요정대사와 싸우고 있는 수라마종을
불렀다. 이곳이 수라천가의 시발점이고 무엇인가 있을 지도 모르지만
더 이상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터였다.
철저하게 파괴시켜버리면 지저사령계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곳을 무너뜨려라!"
바위산 안쪽에 마련된 혈마총은 지저만상지옥대진을 구성하는 한 축
으로 자리하고 있다. 혈마총을 파괴시키면 반 시진 정도 지저만상지옥
대진이 풀리고, 그 순간이 바로 지저사령계를 빠져나갈 기회가 되는
것이다.
"혈뇌, 칠성태극검을 가진 녀석은 어떻게 되었소."
붉은 덩어리로 변해 가는 수라마종의 모습을 만족스런 얼굴로 쳐다
보던 검운비는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조금 전 양천리란 녀석이 그 쪽으
로 가는 걸 확인했습니다."
"잘됐군, 시간도 없는데. 길을 잡아라 마종!"
쩍쩍 금이 가고 있는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던 검운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한편 검운비 일행이 혈마총을 빠져나가며 언급했던 양천리는 백산과
주하연이 들어가 있는 석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난감하군, 여기서 저들을 없애야 할지 아니면……."
양천리는 곤혹스럽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 둘을 찾아다닐 때
만 해도 없앨 생각이었고 기회가 왔다.
삼현마금의 세 현을 뜯기만 하면 둘을 없앨 수 있다. 그런데 자꾸만
사사미혼진 밖에서 보았던 제갈승후의 행동이 떠올랐다.
그때 제갈승후는 모주앙을 없앴던 자를 도와주었다. 그의 목적을 알
지 못한 상태에서 두 사람에게 살수를 쓴다는 게 몹시 마음에 걸렸다.
"아니다, 어차피 없애면 제갈승후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처음 생
각대로 없애버리는 거다."
이내 마음을 굳힌 양천리는 내공을 끌어올리며 삼현마금 현에 손가
락을 치켜세웠다. 천음양씨세가의 최고 무공인 무음(無音)이면 무방비
상태로 있는 두 사람의 머릿속을 가루로 만들기에 충분할 것이다.
깊게 숨을 고른 양천리가 삼현마금을 뜯으려는 순간.
"아미타불!"
"허억! 사자후(獅子吼)!"
머리를 울리는 창노한 목소리에 양천리는 해쓱해졌다. 거대한 울림,
소림사 초절기의 하나로 2갑자의 공력이 없다면 시전조차 불가능한 사
자후가 머릿속을 강타했던 것이었다.
수라마종과 싸움을 벌이던 요정대사였다. 힘겨운 싸움을 했는지 요
정대사의 입 주위가 붉은 혈흔으로 엉망이었다.
5백 년 전, 마교삼태상의 일인이었던 수라마종은 요정으로서도 버거
운 상대였던 탓이었다.
"그냥 가시오 시주. 이곳은 곧 무너집니다."
양천리를 가만히 쳐다보던 요정이 낮게 말했다. 수라마종을 물리치
고 이곳에 온 게 처음부터 잘못이었다. 매섭게 공격을 가해오던 수라
마종이 어느 순간 몸을 빼더니 한가운데 석실로 들어가 버렸다.
뒤이어 그가 들어갔던 석실에서 붉은 광채와 함께 석문이 터져나가
는 광경을 목격했다.
혈마총을 파괴하려는 검운비의 생각을 알아차린 요정은 즉각 백산과
주하연이 있는 곳으로 왔다.
쿠릉! 우르르!
과앙!
다시 자세를 잡으려는 순간, 지반이 흔들리며 엄청난 굉음에 양천리
의 몸은 가랑잎처럼 흔들렸다.
"검운비 이 자식!"
무너져 내리는 돌덩어리를 피하며 양천리는 고함을 질렀다. 조금 전
없애고자 하였던 두 사람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밖을 향
해 몸을 날렸다.
"사숙! 혈마총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황급히 석실로 뛰어든 요정은 백산을 불렀다.
"오빠, 요정 할아버지랑 같이 나가."
무너져 내리는 주변을 쳐다보며 주하연은 처연한 얼굴로 말했다. 더
이상 그를 붙잡고 있을 수가 없다.
마지막 희망을 안고 들어온 혈마총이었지만 지극화정균은 보이지 않
았다.
아니 설령 지극화정균이 지하 어딘가에 있다하더라도 시간이 부족했
다. 혈마총이 지저만상지옥대진의 한 축이라는 사실은 이미 짐작했던
일이고, 이곳이 무너짐과 동시에 지하호수에 펼쳐진 진은 일시적이지
만 해진될 것임에 분명했다.
"빨리 가요! 지금 아니면 나갈 기회가 없어요. 지저만상지옥대진이
해진되는 유일한 시간이란 말이에요."
백산 곁에서 멀어지며 소리를 질렀다.
우르르! 쿵! 쿵쿵!
"하연아! 같아 나가자, 내겐 빙천수라마공이 있다. 빙천수라마공을
익히면 시간을 벌 수 있다고 했지 않았냐. 지극화정균은 그때 다시 찾
아도 돼."
눈앞으로 떨어지는 바위덩어리를 쳐내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안 돼요 오빠. 빙천수라마공은 지극화정균을 복용한 다음에 익히는
거예요. 빙천수라마공을 먼저 익힌다고 해서 몸이 얼음으로 변하는 걸
막지 못해요. 그러니까 그만 가요. 부탁이에요. 그동안 행복했어요."
우르릉!
콰과광!
그 말을 끝으로 주하연의 신형은 백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커다란
폭음과 함께 급기야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주하연이 서 있는 곳을 덮
쳐버렸던 것이다.
"안-돼!"
"사숙!"
고함을 지르며 바위 속으로 몸을 날리는 백산을 요정대사가 허공섭
물을 이용하여 끌어 당겼다.
자칫 잘못하면 백산마저도 바위더미 속에 깔릴지도 모르는데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연아……!"
뒤로 주르르 딸려가던 백산은 허탈한 듯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와의
거리는 1장, 모든 감각을 동원해 보았으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말을 건넸던 녀석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는 사실이 믿어
지지 않았다. 바위더미만 치워내면 곧바로 웃으며 나타날지도 모른다
는 생각에 서둘러 다가갔다.
"사숙!"
"그만 나가, 요정. 나는 녀석을 찾아봐야겠어."
"사숙!"
요정은 안타까운 얼굴로 백산을 불렀다. 그녀는 죽었으니 나가자고
말할 수 없다. 주하연을 살려내는 것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였던
그가 아니었던가.
어쩌면 주하연을 살려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삶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하지마, 나는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잖아. 나
중에라도 마음 변하면 그때 나가도록 할게."
"사숙님……!"
백산을 부르던 요정은 말끝을 흐렸다. 백산의 얼굴에서 확고한 의지
를 읽어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주하연은 군주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잃어야 했던 조천영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를 따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지저만상지옥대진이 다시 발동
하겠지만 먹지도 자지도 않는 백산은 몇 년이 걸리더라도 뚫고 나올
것이다.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럼 소승 먼저 나가겠습니다."
백산을 향해 합장한 요정은 무너진 잔해를 헤치고 몸을 날렸다.
"잘 가! 혹시 구양중이나 설련 그 아이들 만나면 말 잘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