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풍무(48)
상단전으로 운기행공을 하다(3)
밤이 없는 곳, 언제나 야명주에서 흘러나온 빛은 같다. 무수한 잔해
가 너부러진 곳에서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성이 들려온다.
손발을 내뻗을 때마다 벌거벗은 상체의 근육들은 묘한 떨림을 남기
고 있다. 붉은 기운을 사방으로 쏟아내는 백산의 몸에서 뜨거운 열기
가 흘러나온다.
지난 며칠 간 몸을 완전하게 만든 그는 지저사령계 폐허에서 과거
익혔던 무공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고 있었다.
불끈 틀어쥔 백산의 오른 손이 전방을 향해 힘차게 뻗어나가자 일순
대기가 쫙 갈라진다. 오른손을 감아들이며 튀어간 왼발에 팡 소리를
지르며 공기가 터져나간다.
옆으로 차는 편퇴(鞭腿)에 발끝으로 차는 도탕(挑 )이 이어지고,
발바닥으로 차는 등각( 脚)이 선을 보인다.
화려한 발 동작과 더불어 붉은 회오리바람을 머금은 듯한 양손은 무
수한 궤적을 남긴다.
뻗어내고 걷어들이는 동작에 무한한 자유를 담는다.
파악!
비스듬히 쓰러져 있는 커다란 기둥으로 손가락 끝이 박혀들고 이어
주먹이 뒤를 따른다.
퍽!
주먹으로 가격했던 그곳을 향해 팔꿈치가 나아가고, 뒤이어 어깨가
그곳을 강타한다.
쿠웅!
성인 허리 둘레의 커다란 돌기둥의 중심이 가루로 변하더니 굉음을
남기며 기둥은 지면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백산의 동작은 멈추지 않는
다. 슬쩍 다리를 들어 쓰러진 기둥을 차올리자 1장 길이의 기둥은 허
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타핫!"
날카로운 고함을 내지르며 백산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기둥 한쪽 끝에서 백산의 발기술이 터져나왔다.
올려 차고, 돌려 차고, 찍어 차고, 걷어올리고, 옆으로 차고, 돌며
차고. 발기술 하나만으로도 기둥은 지상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이리저리 자리를 바꾸며 조금씩 길이를 줄여간다.
"혈극참(血極慘)!"
어느 순간, 길이가 절반 가량 줄어든 기둥을 향해 백산의 오른손이
힘차게 사선을 그렸다.
혈극참! 사부 팽무도가 만든 도법이고, 한천팽무도법의 1초를 장식
했던 그 이름.
붉은 혈기가 가득한 속에서 108개의 강기가 형성되는 무공이다. 강
기( 氣)와 피(血)와, 그리고 혈기(血氣)를 구분할 수 없는 잔혹한 수
법. 천하를 질타했던 그 도법이 50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스!
단 1초의 공격에 기둥은 물론이고 백산 전면 5장여 바위들이 가루로
흩어졌다.
"후-우! 땀인가?"
나직한 숨을 뱉어내며 처음 자리로 내려선 백산은 번들거리는 상체
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구양중과 설련을 아무리 두드려도 변화가 없었던 몸에서 드디어 땀
이 흐른다. 서늘한 지하 공기에 땀은 이내 뿌연 아지랑이를 만들어 몸
을 떠나갔다.
"이제 녀석들의 선물을 볼 차롄가?"
단전이 제 역할을 하고 몸 속의 잠력을 완전하게 내공으로 만들게
되면, 열 수 있도록 한 만년한철 상자. 그 안에 녀석들의 소식이 들어
있을 것이다.
멀리 음양지극천이 있는 동굴 앞에 서 있는 주하연을 향해 손을 흔
든 백산은 소림의 무공인 무상신법을 펼쳤다.
"헤엑!"
지극화정균을 입으로 가져가던 주하연은 나직한 비명을 지르며 동작
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 10장 밖에 있던 백산이 어느새 바로 앞에 와
있다니.
"움, 그건 무슨 무공이에요."
지극화정균을 삼킬 생각도 하지 못하고 주하연은 우물거렸다. 백산
이 보여주는 대부분의 무공이 충격적이긴 했지만 방금 보여준 경공은
그야말로 극(極)이라 불러야 할 것 같았다.
본격적으로 익힌 빙천수라마공 덕에 공력은 어느새 1갑자에 달했고,
강기 경지에 근접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산의 신형은 눈으로 좇
기는커녕 흔적도 따라잡지 못했다.
"무상신법이라는 건데, 지금 네 실력으로는 꿈꾸긴 어렵지. 적어도
심검을 얻어야만 가능한 무공이다. 근데 그거 맛있냐?"
말은 하는 와중에도 백산은 주하연의 입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녀가 오물거리는 이끼가 너무 맛있게 보였던 탓이었다.
문득 입주위로 무엇인가 흘러내리는 느낌에 손을 들어올리려는데 주
하연이 먼저 입가를 훔쳐주었다.
"어라 침? 드디어 음식이 땡기나 보네요. 들어가요, 제가 오빠를 위
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풀밖에 없다고 불평만 한 사람이 음식은 무슨."
입안 가득 고인 침을 꿀꺽 삼키며 주하연을 따라 종종걸음 쳤다. 느
닷없이 주체할 수 없는 시장기가 밀려들었다.
배가 고파지면서 식욕이 동할 것이라 하였던 모사의 말이 문득 떠올
랐다.
안으로 들어가자 주하연은 조그마한 접시 하나를 내밀었다.
"갑자기 음식이 들어가면 큰일나요. 그러니까 먼저 이것부터 드세
요."
돌을 깎아 만든 접시에 가득 담긴 붉은 액체는 지극화정균의 액즙이
었다. 황망히 접시를 받아든 백산은 걸신 걸린 사람처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식도를 타고 흐르는 액즙의 차가운 기운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지
만 그 정도로는 양이 차지 않자 백산은 다시 손을 내밀었다.
당연하다는 듯, 백산을 유심히 쳐다보던 주하연은 뒤에 놓아둔 다른
접시를 내밀었다.
"시집가면 사랑 받겠다."
슬쩍 미소를 머금으며 주하연이 내미는 액즙을 꿀꺽꿀꺽 넘겼다. 몇
접시를 먹었는지 알지 못했다. 배에서는 끊임없이 소식을 보내왔고,
그때마다 백산은 손을 내밀었다.
주하연이 고개를 저을 때까지 백산은 끊임없이 액즙을 들이켰다.
"그만 됐어요. 이러다 몸이 낫기 전에 굶어죽겠어요."
여전히 부족한 듯 뒤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 백산을 향해 주하연은
고운 눈을 흘겼다. 마치 칭얼대는 어린애 나무라듯.
"너도 십 년만 굶어봐라, 나처럼 되는가 안 되는가."
나른한 포만감이 밀려들자 몸이 풀리는 듯했다. 이 또한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기분인지 몰랐다.
"상자 어딨지?"
가볍게 배를 두드리던 백산은 그제야 주변을 살펴보았다.
"여기요."
한쪽 구석에 놓아두었던 상자를 들고 온 주하연은 조심스럽게 내밀
었다. 그리고 상자를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상자속 내용물 또한 백산의 과거만큼이나 궁금했었다.
지금 그것을 보게 되다니, 절로 가슴이 뛰었다.
잔뜩 호기심 어린 얼굴로 백산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으려니 어느 순
간 폭발적으로 요동치는 붉은 기운이 생겨났다. 백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기였다.
만년한철 상자의 뚜껑을 잡고 전 내공을 끌어올리자 한 쪽 모서리에
서부터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이야합!"
단전에 있는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양손에 집중했다. 두 손이 붉게
물들고, 찌지직, 상자 뚜껑이 열리자 마침내 10년 동안 갇혀있던 내용
물들이 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건……!"
상자 뚜껑을 열어제친 백산은 한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런 개자식들!"
상자 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백산은 광포한 고함을 지르며 그것을
사정없이 던져버렸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그들이 아니었던
가. 그랬던 그들이 상자 안에 그 물건을 넣어 두었다.
세 부인과 자식을 묻게 하였던 그 물건을.
"왜! 왜! 왜 그랬어 자식들아!"
동굴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눈앞에 나타난, 운명이자 저주였던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영원히,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라며 소운과 함께 묻었던 무기가 아
니었던가.
"오빠!"
주하연은 해쓱해진 얼굴로 백산을 불렀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전율적인 기운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잠시만 나갔다 오마."
백산은 무겁게 굳은 얼굴로 동굴 밖으로 나가버렸다.
홀로 남은 주하연은 백산이 던져버린 상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상자 밖으로 빠져나온 뭔가를 발견한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조
심스레 주워들었다.
비단 천으로 곱게 싸여진 그것에는 빛 바랜 책자 한 권과 세 개의
조그마한 주머니가 들어 있었다.
백산이 나간 곳을 흘낏 쳐다보며 얼마쯤 주저하던 그녀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책의 첫 장을 열었다.
- 녀석이 태어나던 날.
나는 하늘을 얻은 듯 기뻤다. 딸을 얻기를 바랐던 소원은 이루지 못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에게 소령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소령, 내가 목숨마저도 맡겼던 백산 형님의 딸 이름이다. 내가 그 아
이만 지켰더라도 세분 형수님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혈광마겁과 귀마겁이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제천맹이
란 단체와 천신가의 음모 때문이라 애써 자위했지만 소령이 납치되는
걸 막지 못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었다.
소령이란 아이를 형님의 딸처럼 키우고 싶었다. 그러나, 하늘은 나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소령의 탯줄을 끊고 형님에게 데려가려는 순
간 나는 알게 되었다. 녀석은 숨이 끊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너무도 비통하여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소령이란 이름을 달고 태어
난 아이를 두 번이나 잃어야 한다는 생각에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심장이 뛰지 않았던 녀석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백산 형님은 형수님들을 만나러 저 세상으로 떠났
다. 나와 소령만 남겨둔 채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조악하게 쓰여진 글은 누군가가 써 내려간 일
기였다. 힐끔 밖을 살피고 주하연은 이내 다음 장을 넘겼다.
- 소령은 내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태어
나서 단 한번도 울지 않았던 아이는, 형님이 세 분 형수님께 선물로 사
주었던 애명환(愛鳴環)을 끔찍이도 챙겼다.
더구나 가르쳐주지도 않았던 천자문을 척척 뱉어내곤 하였다.
물론 일부러 말하려 했던 건 아니었다. 내가 글을 배우겠다며 안간
힘을 쓰는 걸 보다못해 저도 모르게 쏟아냈지만 분명 형님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글이었다.
울지 않는 아이, 천자문 그리고 애명환,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
다. 내 아들 소령은 껍데기일 뿐이고 영혼은 백산형님이었다.
제기랄.
오늘은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아비보다 먼저 떠난 소령이 불쌍하고,
그렇게도 원했던 저승으로 가지 못한 백산 형님이 불쌍하다.
백산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일상 생활을 매일 매일 기록해 둔
일기장은 상당히 두꺼웠다.
밖을 살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주하연은 어느 순간 일기 속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백산이 자살을 시도하면서부터 강시로 제강되기까지의
과정이 쓰여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산의 동생이라 하였던 소살우 그분의 고뇌가 절절이 묻어나는 일
기였다. 아들이라 부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형님이라 부를 수도 없었
던 불행했던 한 아버지의 절규를 듣는 듯했다.
- 만일 우리의 예상이 맞고, 섯다와 모사의 방법이 옳다면 10년 후
그는 깨어난다. 상단전을 열어 소령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만드는 것은
오직 그의 선택으로 남겨두기로 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린 소운 형수님의 무덤에 가서 광혈지옥비를 찾아왔
다. 광혈지옥비를 착용하고도 살아 남는다면 그는 백산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인시로 제강하기 위한 약물 속에 소령을 담그고 우린 떠나기로 했
다. 하늘을 없애버린 극악한 마두라며 천붕십일천마라는 별호를 주었던
무림인 녀석들이 부탁을 해왔다.
북방 어딘가에 존재하는 금역을 없애달라고 하였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다시 돌아왔을 때 소령이 어떤 모습으로 있
을지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자살을 시도하여 저승으로 떠났다해도 인정할 것이다.
모든 선택은 그의 몫으로 남겨 둘 것이다.
"오빠!"
눈물을 훔쳐낸 주하연은 나지막하니 백산을 불러 보았다. 불쌍한 사
람. 그 또한 소살우 그분과 같은 입장이었다.
아버지와 동생사이에서 갈등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백산을 찾기 위해 동굴을 나선 지 얼마쯤 흘렀을까. 주하연은 우뚝
발을 멈췄다. 저만치 쓰러진 건물 잔해 곁에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고
앉아 있는 백산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한없이 작게만 느껴져 선뜻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실바
람에도 금세 먼지로 흩어져버릴 것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그의 모습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은 주하연은 무릎에 턱을 얹고
앉아 하염없이 백산을 바라보았다.
그가 마음을 추스르고 이편을 쳐다봐 주길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