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풍무(64)
광풍도법(4)
"좋구나."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동안
갈등하던 복잡한 감정이 내리는 빗물에 휩쓸려 사라진다.
이제는 소살우를 만나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녀석의 얼굴을 똑
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소령이 아닌 백산으로.
"보겠느냐?"
백산은 한편에 세워두었던 혈월로 손을 내뻗었다.
빨리듯 딸려오는 혈월을 잡은 채 백산은 후원 뜰로 몸을 날렸다.
"시원하다 살우야! 가슴속이 시원해졌다!"
온몸을 마구 때리는 빗물이 이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옷을 타고 스
며든 빗물이 몸 속까지 적시는 순간, 혈월을 번쩍 치켜올렸다.
그리고, 광풍대원들의 이름을 딴 도법을 펼쳤다.
들어올린 혈월에 내공을 서서히 밀어 넣자 도면으로부터 둥근 달이
떠올랐다. 공연히 혈월이라 부르는 게 아니었다.
슬쩍 내리친 도에서 미풍보다 부드러운 기운이 흐르고, 쏟아지던 빗
물은 자취를 감췄다. 일순 진공상태처럼 변한 사이로 붉은 광채가 부
챗살처럼 천천히 퍼져나간다.
츄앗!
한 순간 백산의 발은 힘차게 바닥을 찍으며 깊숙한 족적을 남긴다.
허공을 수직으로 잘랐던 혈월이 빙글 방향을 바꾸자 덩달아 백산의 몸
이 따라 돌았다
슈아악!
허공에 붉은 달이 떠올랐다. 붉은 달 아래로 달빛마저 삼켜버리는
핏빛 광채가 터져나간다. 순식간에 빗물을 태운 강기는 하얀 수증기를
피어 올렸다.
거센 바람이 불어 나왔다. 백산의 몸에서 시작한 회오리바람은 어깨
와 팔로 그리고 혈월로 이어지고 도면 위에 떠오른 붉은 달을 감싼다.
손을 슬쩍 앞으로 뻗어내며 휘두르자 혈월에서 나선형의 강기가 퍼져
나갔다. 온통 핏빛 혈광 천지였다. 백산의 몸도 붉고, 혈월도 붉고,
혈월 위에 떠 있는 달도 붉고, 떨어지는 빗물도 붉었다.
"휴-우!"
천천히 숨을 내쉬며 바닥으로 내려왔다. 4초인 광견폭풍과 마지막
초식인 광풍무한을 펼치기에는 장소가 너무 협소했다.
"앞으로 뭘 할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녀석들을 찾을 준비는 됐다."
혈월로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며 백산은 중
얼거렸다. 비를 털어 도집에 집어넣고 바닥을 슬쩍 찼다.
나갔던 창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쓴웃음을 토하고 말았
다.
옆방에 있어야할 주하연이 베개를 끌어안고 큰 대자로 누워있었다.
"그러고 있지 말고 들어와라!"
옷을 벗어 몸을 닦던 백산은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나직이 말했
다.
"저기, 하연이 때문에……."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설련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
건 핑계에 불과했다. 빗속에서 무공을 펼치는 백산의 모습을 보았다.
그의 모습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는 과거 속에서 빠져나오
길 원하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할 뿐, 결코 천하제일인이 아니었다.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나눠지고 싶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이곳
으로 향하고 말았다.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는데 잘 왔다. 너희들이 가 있을 곳이 생각
나서 말이다."
"그게 광혈지옥빈가 보죠?"
백산의 물끄러미 쳐다보던 설련은 그의 양 팔목과 다리에 채워져 있
는 물건을 가리키며 물었다. 천하제일무공이라 알려진 무기, 그의 운
명하여 하였던 광혈지옥비가 어떤 물건이지 궁금했다.
"그래, 이 놈이 광혈지옥비다. 인간을 마물로 변이시키는 저주마병
이지."
쉭!
미약한 소리와 함께 백산의 사지에서 천비들이 일제히 빠져 나왔다.
일순 방안에는 오행 특유의 광채와 붉은 혈광이 가득 들어찼다. 열
두 자루의 비도가 둥글게 감싼 백산의 모습은 만개하기 직전의 꽃봉오
리를 보는 듯 화려했다.
"여기 이 이놈이 천비비(天秘匕)라는 놈으로 광혈지옥비의 대장이
다. 내 몸의 상태를 나타내는 거지. 어떤 기운을 뿌리지 않고 있다는
건 내 상태가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거다."
"그럼 백색지안이나 흑색지안으로 변하면……."
"천비비의 색과 내 눈 색이 일치한다. 흑색지안부터 천비비는 피를
흡수하기 시작하고.
"설마……."
피를 흡수한다는 말에 설련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흡혈을 하는 비
도라니, 말로만 들었지 실제 그런 무기가 존재할 줄은 생각조차 못했
다.
"걱정 마라, 동료의 피는 먹지 않으니까. 그건 그렇고 일단 앉아라,
차나 한잔하면서 얘기하자. 숭산에 있는 그곳을 찾아가는 건……. 아
니다, 내일 저 녀석을 낙양 관아로 데려다주면……."
"얘기해 줘요, 하연인 오라버니랑 둘이 갈 거니까."
"안 잤냐?"
"둘이 하도 사이좋게 놀기에 계속 자려 했는데 그만 깼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주하연은 백산과 설련이 앉아 있는 곁으로 바
짝 다가갔다.
백산이 밖에서 도법을 시전하고 있을 때부터 여태 지켜보았고, 그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는 잠든 척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이고 머리야, 화주는 다 좋은데 깨고 나면 골이 땡겨서. 이럴 땐
뜨뜻한 국물이 최곤데, 도무지 더워서 안되겠다."
백산이 들고 있던 차주담자를 덥석 쥐어 슬쩍 내공을 끌어올렸다.
순간 주담자 주변에 허연 서리가 내리고 차가운 기운이 돌자 주하연은
슬쩍 미소를 물었다. 그리고 주담자 채 입으로 가져가 꿀꺽꿀꺽 마셔
버렸다.
"커억! 시원하다. 역시 무공 강해지니까 좋기는 하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참 차 마시려고 했었지."
황당한 얼굴로 보는 두 사람을 향해 천연스레 웃던 주하연은 이내
주담자를 들어 두 사람 앞에 놓인 찻잔에 한 잔씩 따랐다.
"근데 오빠 좀 전에 말하려고 했던 곳 말이야, 어디야?"
"관에 말하면 편하게 갈 수 있지 않아?"
백산은 되물었다. 처음엔 남경으로 데려다 주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하니 관부에 말을 하고 그들을 통해 가는 게 훨씬 낫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쳤어요? 관부를 통해가게. 모처럼 만에, 아니 모처럼 만이 아니
라 태어나 처음 편안한 마음으로 여행을 하고 싶다고요. 잔말말고 오
빠는 날 남경왕부까지 호송해 줘! 그리고 책임질 짓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헉! 너……?"
백산은 화들짝 놀란 눈으로 주하연을 쳐다보았다. 책임질 일이라니,
단 한번도 그런 음흉한 생각을 품은 적은 없다. 설령 마음에 두었다
하더라도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제 16살 어린애를
두고 딴 마음이라니.
입만 헤 벌리고 있자니 더욱 황당한 말이 들려왔다.
"백 공자는 어린 소녀를 좋아하는 취향인가 보네요."
"헤액! 이젠 너까지."
"에고고, 이러다 울 오라버니 숨넘어가겠다. 그런 거 아니니까 긴장
풀어요. 남자가 소심해서는."
백산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주하연은 씩 웃었다. 하지만 내심은 착
잡했다. 농담처럼 슬쩍 떠본 거였는데 그는 여전히 처음 만났을 때와
같았다.
'아직은 시간 많은데 뭘.'
스스로를 위로하던 주하연은 이내 차분한 얼굴로 백산을 보았다.
하지만 설련의 표정은 달랐다.
"숭산에 숨을 만한 곳이 있어요?"
제법 활기찬 목소리, 왜 인지 그녀도 알지 못했다. 주하연의 말에
정색하는 백산을 보자 묘하게도 심장이 둥둥 뛰었다.
내심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응? 응! 숭산제일봉인 준극봉에 보면…… 개울이 하나 있어."
어색한 듯 두 사람을 보던 백산은 낮게 말했다. 그가 생각해낸 장소
는 과거 천신가 인물들이 살던 곳이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전부 진이
설치되어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오기 전까지는 결코 찾을 수 없다.
무려 1천 2백 년 동안 천신가가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 당시 철목승과도 간신히 찾아냈었다.
대규모 인원은 불가능하지만 3,4백 명 정도 몸을 숨기기에는 최적의
장소라 할 수 있다.
"뼈가 좀 널려있기는 하겠지만 그것들만 치우면 살만 할거야."
"광치 오라버니께 말해서 그곳으로 가자고 할게요."
설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산의 도움으로 광치의 어려움은 완전하
게 해소된 것 같았다.
"오래 사는 게 좋기는 한가봐. 내리는 비에 싱숭생숭해지기도 하고
말야. 나 이런 기분 처음이야."
창 밖을 내다보며 주하연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염없이 쏟아지
는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빗줄기는 점점 거세어져
간다.
"나중에도 그 말이 나오나 어디 두고보자, 저 빌어먹을 비 언제면
그치려나, 하는 소리 절로 나올 거다 아마."
"훗! 그럼 뭐 어때 그게 다 살아있다는 건데. 근데 비 오니까 또
술 생각난다. 그러지 말고 한잔 어때?"
"?"
"에이씨! 이번만 먹고 안 먹는다니까! 여튼 둘 다 꼼짝 말고 기다
려, 내가 주방에 가서 안주랑 먹을 거 챙겨올게."
멍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혀를 쏙 내민 주하연은
주방으로 종종걸음쳤다. 그러면서 연신 침을 삼켰다. 술 마신다는 생
각을 하자 절로 입에 침이 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