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성공회의 코프(Charles John Corfe:한국명 고요한)주교는 한국 선교를 위하여 1889년 11월 1일 영국 런던 Westminster대성당에서 주교로 선출된 후, 1890년 9월 29일 제물포항에 미국인 랜디스(E.B.Landis, 한국명 남득시) 의료선교사와 함께 도착해서, 인천에 현재의 인성여고 자리에 한국 최초의 성공회 교회인 성미가엘교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성공회 인천내동교회이다.
내동교회는 이듬해인 1891년 4월 20일, 교회 이웃에 인천 최초의 서구식 병원인 성(聖) 누가 병원을 세웠다. 창립 당시의 내동교회 건물은 1891년 9월 30일 준공하였으나 인천상륙잔전 때 성누가병원 건물과 함께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은 옛 성누가병원 자리에 1년녀의 공사끝에 1956년 6월 23일에 준공하였다. 그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었다.
그후 코프 주교와 랜디스(한국명 남득시) 선교사로 시작된 조선 사랑과 지역 봉사의 열매는 인천내동교회를 시작으로 풍성하게 열리기 시작했다. 특히‘성 누가 병원’은 치료비를 받지 않아 아픈 조선인들이 부담 없이 찾아오도록 하였다. 랜디스 선교사는 작은 질병에도 고통스러워하는 조선인 환자를 돌보다가 결국 과로로 쓰러져 1898년 4월 14일, 32세의 짧은 나이로 소천하였다.
#논어 읽는 파란눈의 의사
130년 전 개항장 인천, 자유공원 동쪽 언덕에서 저녁마다 '논어'와 '맹자'를 '진짜 한국식으로(in true Korean fashion)' 읽는 소리가 들렸다.
미국인 젊은 내과의사 랜디스(Eli Barr landis, 1865~1898)가 진료를 마치고 한국어와 한문공부를 하는 소리였다. 그는 1890년 9월 약관의 나이에 영국 국교, 성공회의 의료 선교사로 인천에 왔다. 그는 제물포 최초 서양병원인 성누가병원(St Lukes Hospital)을 운영, 개항장 주민들에게 인술을 베풀었다. 병원 안에 야간 영어학교를 열었으며, 고아들도 돌봤는데, 이는 인천 고아원의 시초였다.
이렇게 그는 의료와 교육 등을 통해 제물포 지역의 계몽에 앞장섰다.
특히 그는 당시 변변한 의료시설이 없어 병고에 시달리던 환자들에게 신자와 비신자를 가리지 않는 인도주의적인 의료활동을 펼쳤다. 그는 '남득시(南得時)'라는 한국이름을 쓰면서 한국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서 약대인(藥大人), 낙선시병원(樂善施醫院), 'little doctor'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존경을 받았다.
그는 당시 한국에 있는 서양인 중에서 가장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한국어에 능통했으며, 한국 풍속과 민속에도 이해가 깊어 한국에 대한 논문도 많이 발표했다. 한문에도 밝아서 한국 전통의학의 성전으로 여겨지는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일부를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의사, 선교사, 한국학 학자로 8년 동안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30대 젊은 날 인천에서 짧은 생을 마쳤다. 지금은 인천가족공원 27번 묘지에 영면해 있다.
#선행으로 기쁨을 주는 병원
"한국에서 8년 동안 '의사(Medical man)', '선교사(Missionary)', 그리고 '학자(Scholar)'로서 훌륭하고 철저하고 끈기 있게 자기의 역할을 다했다."(랜디스 추모사 중에서)
랜디스는 1865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랭카스터에서 태어났다. 1888년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향인 랭커스터 공립병원에서 전문의 과정을 마친 의사였다.
영국 국교, 성공회의 선교사업을 위해서 1890년 9월 29일 조선의 항구도시 제물포, 인천에 왔다. 그는 성공회의 한국선교 책임자로 선임된 영국 해군 종군 사제 출신인 코프(Charles John Corfe: 한국명 고요한) 주교(主敎)와 함께 인천에 선교사로 부임했다. 성공회가 한국에서 선교를 처음 시작한 시점이다.
그는 제물포에 도착하자마자 그해 10월10일 임시로 입주한 성당의 한 방을 시약소(施藥所)로 만들어 의료 활동을 시작, 12월까지 2개월 동안 외래환자 35명, 왕진환자 25명을 진료했다.
이듬해 10월 지금의 내동 성공회 성당 자리에 성누가병원을 건립했는데, 그는 병원 이름이 한국의 문화나 한국인과 관계가 없다면서 별도로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이라고 써 붙였다. '선행을 함으로써 기쁨을 주는 병원(The Hospital of Joy in Good Deeds)'이라는 의미로 그가 직접 작명한 한문이름이다. 제물포 주민들은 성누가병원을 약대인병원(藥大人病院), 병원이 있던 응봉산을 '약대인산'이라고 불렀다.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병원은 성공적인 의료 사업을 펼쳤다.
랜디스는 한국학 연구에서도 의미있는 족적을 남겼다. 그는 언어, 민속, 종교, 역사, 과학 등과 관련해 24편의 글을 발표했으며, 그 중에서도 불교경전, 유교의례, 민간 신앙, 동학 교리 등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문도 공부해 동아시아 고전과 한국의 한문서적을 탐구할 수 있었고, 제3대 주교 마크 트롤로프(Mark N. Trollope, 1862~1930)의 추모사에 따르면 "환자들과 한국 및 중국 서적에 둘러싸여 토착민처럼 살았는데 무척 행복해 보였다"고 한다.
#여기에 묻히다
랜디스는 1898년 4월16일 3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원인은 과로와 장티푸스 등 이었다. 1895년 성탄절, 그는 조선을 떠나 미국과 유럽에서 휴식을 취하고, 귀국 후에는 8개월 동안 서울의 병원과 진료소를 맡아 운영하다가, 1897년 3월 제물포로 돌아와 사망할 때까지 송림동 한국인 마을에서 살았다.
임종을 앞두고 자신이 쓴 논문과 소장 도서를 트롤로프 주교에게 부탁했는데, 제물포와 정동을 거쳐 현재는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랜디스 문고(English Church Mission:Landis Library)'로 남아있다. 묘비명은 라틴어로 기록됐다. 'H. S. E'는 'hic sepultus est(여기에 묻히다)'의 약어이고, 랜디스가 1865년 미국 랭카스터에서 태어났으며 8년 가까이 조선에 머물다가 1898년 4월16일에 사망한 의사라는 내용이다. 현재는 묘비가 많이 훼손돼 'LANDIS' 이하의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