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수난예고(어린이와 같이 되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는 지난주일 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에 대한 예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을 말리고 그로해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호통을 당했지요. 그러면서 나를 따라오려거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십자가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십자가 처형은 로마제국이 800여 년간 계속한 가장 야만적이고 잔인한 형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시니......
지난주에 이어 오늘의 말씀으로 두 번째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지난번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왜 이렇게도 무지한지?
자기들끼리 누가 더 높으냐고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제자들의 교만함에 대하여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맨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다음 장(마르코 10:32-34)에서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하여 세 번째 예고를 하십니다만 그 때까지도 제자들의 태도는 변함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 간의 관계를 살펴봐야 합니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제자들의 관계가 세 단계에 걸쳐서 점차 나빠지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무지의 단계'인데(막 1:16-8:2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로 비유 말씀하시고, 기적을 보여주시는데도 마냥 무지한 상태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아직도 마음이 둔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고 계속 꾸짖으시고 있습니다.(참조, 막 8:17-21).
두 번째 단계는 제자들의 '오해 단계'입니다.
비록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께서 의도한 형태의 메시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처음에는 ‘안 됩니다’하고 부정했고,두 번째는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묻기조차 두려워했으며,
세 번째 예고 때에는 오히려 야고보와 요한이 높은 자리를 자기 형제들에게 달라는 어리석은 요구를 함으로써 제자들은 높은 자리에 앉는 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예수를 버리고 배반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제자 중의 하나인 '가리옷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려고 계획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데,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유다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유다의 입맞춤으로 예수에 대한 배반이 절정에 올랐을 때 단 한 명의 제자도 남지 않고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막4:50).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의 형장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처형되는 현장에서도, 그리고 무덤에 묻히시는 순간까지도 제자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마지막으로 절규하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마르코복음에서는 제자들이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르코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특히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를 이토록 적나라하게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마르코복음을 '순교자의 복음'(the martyr gospel)이라고도 하는데,
복음이 쓰여진 그 시대의 교회가 '고난의 교회'로 당시에 고난과 핍박 중에 있던 기독교인들을 위한 교훈을 삼으려는 목적을 띠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르코의 복음은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를 갖기도 하는데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버리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제자들의 무지와 실수를 강조함으로써
그 당시 교회에서 제자들과 똑같이 무지와 실수로 넘어지며 배교하는 경험을 생각하고 다시 힘을 얻어 더 큰 믿음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깨닫지 못함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책망하시기보다 누가 천국에서 더 큰 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교훈을 주십니다.
35절과 36절을 보면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처음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끝이라는 말은 마지막의 가장 가치 없는, 가장 작은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섬긴다는 말은 종, 하인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어린 아이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당시 어린아이는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있었답니다. 어린아이는 가장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서 말씀합니다.
37절을 보면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내용을 마태오복음에서는 18장“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 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것이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느님 아버지를 영접하려면 어린이를 영접해야 합니다. 어린이를 영접하지 못하면 결국 예수님도, 하느님도 영접하지 못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하는데 누가 더 큰자이고 누가 더 높은 자인가를 논쟁하는 것은 헛되고, 쓸데없는 일이 아닙니까?
어린 아이들을 '어린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란 말을 처음 쓴 분은 소파 방정환 선생이라고 합니다.
이 분에 의해서 어린이날이 제정 되었다고 합니다.
늙은이, 젊은이처럼 ‘이’를 붙여서 어린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 말은 어린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아 어린이는 어른에게 종속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고, 그래서 어린이라고 부를 때에 '어리신 분'이라는 존경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당시에 어린이는 사람으로 충분한 대접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어린이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합니다. 온유합니다. 순진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병들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처럼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돌이켜 어린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면 좋겠다고 말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위적으로 노력해서 어린이처럼 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동심의 세계로 돌아갈 수는 있겠지만 어린이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 힘으로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복음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듯이 우리가 어린 아이가 되는 것도 물과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영원하신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으로 역사하는 성령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노력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천국은 행위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믿음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은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하느님을 영접해 살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계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변화된 자로서 우리는 어린이처럼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잘 살펴 보십시오.
우리들의 자녀를 조용히 살펴보면 우리가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내 마음과 내 생각으로 대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생각으로 대하고 있는지 확인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잘 못 하고 있다면 또 방향이 다르다면 우리가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과 사랑으로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이런 주님의 마음과 사랑을 가지고, 자녀들이 세속에 물들지 않게 겸손하고,
순수하게 성장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의 믿음이 건강하게 자라기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자녀도 부모도 예수님 앞에 진짜 어린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그렇게 따라다니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를 뵙기 전까지는 거짓된 자들이었습니다.
입으로는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그 마음속에는 세상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너보다는 내가 더 낫다’고 하면서 서로 다툼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자랑하지 맙시다.
오래 다닌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오랫동안 꼬박꼬박 나왔다고 모두가 예수님의 옳은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만큼, 그 내면적인 성숙이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2독서 야고보서 3장에서는 ‘하늘에서 오는 지혜’를 말했습니다. ‘
하늘에서 오는 지혜는 순결하고 온유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예의가 바르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의 의견을 존중하고 남에게 기꺼이 양보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잔머리나 잔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오는 지혜는,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인간이 꼭 갖춰야 할 중요한 성품들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순결과 온유, 평화와 올바른 예의를 비롯해서, 남의 의견을 존중하고 남에게 기꺼이 양보할 줄 아는 양보의 미덕까지 있어야,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사람다운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존경받고 싶다면 남을 업신여기지 말 것이며
내가 인정받고 싶으면 남을 배려할 줄 알아야하며
내가 행복하고 싶으면 남의 불행을 반기지 말 것이며
내가 잘되고 싶으면 남의 발전을 도와 줄 것이며
내가 기쁘고 싶으면 남의 슬픔을 함께할 것이며
내가 즐기고 싶으면 남의 고통을 어루만져 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예수님 앞에서 어린이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