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순수한 선행과 의도하는 선행(무주상보시, 유주상보시의 진실 거짓)

작성자조리사양반|작성시간22.09.22|조회수0 목록 댓글 0

[질문]

평소 기독교나 불교를 보면서 뭔가 모를 모순을 느꼈는데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은 것 같습니다.
좋은 업을 짓는다는 것에 대해서 여쭙고 싶은데,,
아무 의도도 없이 순수하게 선을 쌓는 것과,
내가 복을 쌓아서 다음에 천상세계에 나겠다.
이런 원을 세우고 (의도를 가지고) 선을 쌓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질문]

그러한 질문을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 이유는 오늘날 한국 불교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삶이 고통이며 이 세상이 무명의 소산이라는 잘못된 관념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고통의 바다를 헤매는 일로 보고 있으며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을 영원히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많은 불교인들이 다음 생에는 다시는 윤회의 고리를 받지 않게 해달라고 소망한다.

이러한 연유로 끝없는 윤회고리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악업을 지어서도 안되지만 선업도 지어서는 안된다는 논리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해탈이란 윤회의 고리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고감이 자유자재인 경지를 말하며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복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라면 해탈이라면
우리들이 그토록 부처가 되는 것을 소망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고통이라면 그대로 죽어버리면 되지 굳이 인간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대가 진정 다시는 윤회고리를 돌지 않고자 한다면 그대의 생명의 종자를 망쳐버리면 된다.
탐욕과 집착과 원한을 쌓아 귀신이 되어 세상을 떠돈다면
그대의 영혼은 미물로 떨어지거나 흩어져 버리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세상이 무명으로 인해 나타난 것이라면
완전한 법계가 만들어져 세상을 완전한 진리로 가꿀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세상이 고해라는 것은 길을 모른 중생에게 해당되는 말로서
선한 고리를 도는 선근을 지닌 이들에게 있어서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윤회의 과정은
완성으로 나아가는 복밭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악업을 지어서는 안되지만 다시 태어나는 것이 두려워
선업을 짓는 것을 망서려서는  안된다.

이 세상은 완전한 법계이기 때문에
실상과 이치를 깨달아 올바른 원하는 원인을 지으면
자기가 바라는 일들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자기가 바라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받는 것으로
최고의 축복인 것이다.
그래서 천상의 신 또한 자신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 불교계에서는 선업도 업의 일종이라고 생각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선업은 업이 아니라 업을 지우는 것이다.

즉 악업은 인간이 지니고 나온 불성을 흐리는 흔적이라 한다면
선업은 불성을 맑게 하는 반대되는 흔적들을 말한다.
따라서 악업을 지으면 업이 두터워지지만 선업을 지으면 업이 사라지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악업이지만 정직하게 사는 것은 선업이다.
그래서 정직하게 살면 마음이 맑아지고 어둠이 없어서
모든 일을 당당하고 밝고 지혜롭게 헤쳐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실상 속에 있는 이치를 모르니 관념적 논리에 빠진 자들은
선업마저 버리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의 공통된 가르침인 칠불통계에 나온 것처럼
모든 악업은 무조건 금하고 모든 선업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선업을 짓는데 있어서 욕심이나 다른 의도로 선을 행하는 시늉을 하는 것은 문제이다.
즉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축복하기 위해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출세길에 활용하기 위한 방편으로 선행을 하는 것은
허명과 욕심을 위한 것이니 탐욕이 되는 것이다.

그럼 선업을 짓는데 알고 짓는 것과 모르고 짓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관념적 논리일 뿐 그다지 큰 의미는 없다.

선업을 짓는데 알고 지으나 모르고 지으나 모두 자신 속에 남아
후생에 선업을 쌓는데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착한 일을 하고자 하는 의도를 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뜻이 있어야 행동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계는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선업을 짓지 않아야 한다며
선업을 쓸데없이 구분하여 무주상보시 유주상보시라는 말들을 지어내고 있는데
이러한 분별은 선한 행동을 하고자 하는 불교인들의 행동력을 억제하는 측면도 있는 만큼
그 말에 크게 구애받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자신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기에 자신을 어둠과 탐욕에 함부로 내팽개치지 않고
진리를 찾고 공덕을 쌓아 인간완성의 경지인 부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이러한 소망이 어찌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참된 나를 위해, 인격완성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며 참다운 인간의 길인 것이다.

이러한 실상을 모르고 자기를 버리고 행동한다면
끝없는 윤회를 통해 완성으로 나아가는 자기의 윤회종자마저 망치게 되는 것이다.
그 구분을 분명히 알아야 삶을 살아가는 생명력이 제대로 발휘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는 인간이 가져야 할
이러한 좋은 소망마저 욕망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관념 속에 빠져있다.

인간이 짓는 뜻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좋은 뜻인 소망이며 하나는 나쁜 뜻인 욕망이다.

소망은 모든 일을 이치에 맞게 추진하여 바람직한 목적과 좋은 자기를 이루는 것이고,
욕망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헛된 목적을 추구하여 자기를 망치는 것이다.

소망은 모든 것이 순리에 맞기 때문에 일할수록 삶이 건전해지고 심신이 무르익지만
욕망은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집착할수록 거짓이 생기고 마음이 병들어 자신을 망치게 된다.

따라서 좋은 뜻을 품고 열심히 노력할 때
인간의 뜻과 소망이 완성되며 인간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며
이치를 모르고 함부로 허황된 욕심을 부리게 되면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출처:진실의 근원(http://www.ginc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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