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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피렌체 - 보티첼리

작성자심기정(문교10)|작성시간10.10.08|조회수583 목록 댓글 2

보티첼리

 

 

이탈리아의 15세기, 곧 초기 르네상스(Early Renaissance) 시대는 이전 세기에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등이 대중화시킨 휴머니즘이 확대된 시기였다. 미술에서 휴머니즘은 고전 고대의 역사나 신화 등 기독교 이외의 새로운 주제 도입, 원근법이나 해부학을 통한 과학적 대상 묘사, 초상의 부활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또 도시 국가 간, 도시 국가 내 유력 가문 간의 세력 다툼이 치열하던 정치적인 상황에서 세력이 커진 군주나 부호는 경쟁적이고 과시적으로 미술품을 후원하기도 했다. 피렌체의 은행가 집안 메디치(Medici)가 그 대표적인 예이고, 메디치의 후원으로 가장 위대한 성과를 낳은 화가는 산드로 보티첼리이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본명은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디 반니 필리페피(Alessandro di Mariano di Vanni Filipepi)다. 산드로는 세례명을 줄여 부른 것이고, ‘작은 술통’이라는 뜻의 보티첼리는 본래 형의 별명이었다. 가죽 장인의 아들로 피렌체에서 태어난 그는 금 세공사 훈련을 받다가 18세쯤에 가르멜파 수사였던 화가 프라 필립포 리피(Fra Filippo Lippi)에게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화가들이 속했던 성루가 길드(Campagnia di San Luca)에는 1472년에 가입했지만, 늦어도 1470년부터는 독립한 장인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메디치에 대한 경배

오늘날에는 신화 주제 그림들이 가장 유명하지만 보티첼리가 가장 많이 그린 것은 기독교 주제 그림이다. 그는 소수의 도상학적 주제를 반복해서 그리곤 했는데 [동방박사의 경배 Adoration of the Magi]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동방박사의 경배] 1475년
패널에 템페라, 111×134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후원자의 이름을 따 [델 라마의 경배 Del Lama Adoration]라고도 불리는 1475년 작품은 이 주제로 그가 그린 세 번째 작품이자 완벽한 균형감과 생생한 색채, 다양한 각도로 그려진 인물의 자연스러운 배치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이 작품이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등장인물들의 신원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면 폐허가 된 건축물들 사이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난 것도 이상하고, 예수에게 경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복장 또한 예수 시대 근동의 것이 아니어서 생경하게 보인다. 실제로 등장인물들은 보티첼리 시대 피렌체의 궁정과 축제의 복장을 하고 있으며, 동방박사를 포함한 경배자들의 얼굴도 당대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는 유명인의 초상이다. 

 

검은 상의를 입고 아기 예수 앞에 앉은 이가 피렌체를 사실상 지배해 나라의 아버지(pater patriae)라고 불렸던 메디치가의 대 코시모 (Cosimo il Vecchio)이고, 중앙에 붉은 망토를 입고 앉은 이는 그의 아들 피에로(Piero), 그의 오른편에 보이는 동방박사는 또 다른 아들 조반니(Giovanni)이다. 이 셋은 그림이 그려질 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화면 가장 왼쪽에 보이는 붉은 상의의 청년은 코시모 의 손자 로렌초(Lorenzo)이고, 그 옆에는 메디치 궁정의 인문학자 피코 델라 미란돌라(Giovanni Pico della Mirandola)와 폴리치아노(Angelo Poliziano)까지 등장한다.

 

이 그림을 산타 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 성당에 기부한 구아스파레 델 라마 (Guasparre di Zanobi del Lama) 자신은 백발에 흰옷을 입은 모습으로 화면 오른쪽 무리들 사이에 서서 관람자 쪽을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에 서서 노란 옷을 입고 관람자를 바라보는 또 한 명의 인물은 보티첼리의 자화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제단화를 후원하는 인물이 자신의 수호성인과 함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일은 자주 있었지만, 이처럼 그와 상관없는 인물이 대거 등장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델 라마는 중개업, 환전 등으로 돈을 모아 벼락부자가 된 인물로 출신은 미천했다. 그는 은행가와 환전상 길드에서 관계를 맺고 있던 메디치가와의 친분을 그림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메디치가의 호의에 따라 그의 사업의 성패가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화가 역시 그림을 통해 자신의 소속 당파와 이에 대한 충성심을 선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보티첼리는 이 작품뿐 아니라 다른 종교화와 고대 신화 주제 그림에서도 자기가 살고 있던 지역과 시대의 외모와 복장을 한 인물들을 등장시켰는데, 이는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들이 고대의 라틴어가 아니라 당대 이탈리아의 일상어로 문학 작품을 쓴 것과 같은 태도로 볼 수 있다.

 

 

우수 어린 사색의 아우라


인문주의가 개인의 성취를 강조하면서 15세기에는 초상화가 부흥했다. 죽은 이를 기념하기 위한 초상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초상도 주문하는 후원자가 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일반적으로 측면 초상이 그려졌지만, 1470년대 이후로는 3/4면상이나 완전 정면상이 더 많이 제작되었다. 이는 본래 15세기 초에 북유럽에서 유행하던 스타일인데,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 사이의 무역이 번성하여 물건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반 에이크로히어르 등의 초상이 영향을 준 것이다.

 

[코지모 메디치의 메달을 든 남자의 초상] 1475년
패널에 템페라, 57.5×44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청년의 초상] 1482~5년경
패널에 템페라, 43.5×46.2cm, 국립미술관, 워싱턴 D.C.

 

 

보티첼리의 [코지모 메디치의 메달을 든 남자의 초상 Portrait of a Man Holding a Medallion of Cosimo de’ Medici]은 메달을 가슴에 대고 있는 독특한 자세로 포즈를 취한 청년을 그린 그림이다. 청년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아 무수한 추측이 나왔지만 메디치가의 사람, 특히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일 가능성이 있다. 1469년에 아버지 피에로가 죽어 갓 스물의 나이로 메디치 집안의 실권을 물려받은 그는 ‘위대한 자’라는 뜻의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로 불렸다.

 

그가 지배하던 때 피렌체는 도시 국가의 주도권을 쟁탈하려는 가문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했다. 그는 1478년 부활절 예배 중이던 성당에서 파치가의 습격을 당했다. 파치 음모(Pazzi Conspiracy)라 불린 이 사건에서 그의 동생 줄리아노(Guiliano)는 27군데에 칼을 맞고 사망했다. (이 사람이 우리나라 미술학원에 있는 석고상 줄리앙의 모델이다.) 부상만 입은 로렌초는 이 음모와 연관된 사람을 제거해 나갔다. 콘스탄티노플까지 도망갔던 사람이 메디치에 환심을 사려는 술탄에 의해 피렌체로 인도되어 시내 중심 광장에서 목이 매달리기도 했다. 메디치 가문에 대항한 사람에 대한 이 무서운 경고 이후 피렌체는 전쟁 없는 평화 시기를 맞았고, 로렌초가 (공식 직함 없이, 실질적으로) 지배한 24년간 메디치가의 세력도 전성기를 누렸다.

 

[청년의 초상 Portrait of a Youth] 역시 모델의 신원을 알 수 없으나, 초기에 그려진 초상과의 양식 차이가 두드러진다. [메달을 든 남자의 초상]과 같은 초기작에서는 배경의 세부묘사가 두드러지고, 빛과 그림자의 상호작용으로 빚어낸 생생한 입체감이 특징이다. 후기에 그려진 초상에서는 배경이 없고, 초점이 부드럽게 모델링된 인물에게만 맞추어져 있다. 그의 인물은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함께 가진 아름다움과 우아함으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이 작품의 경우처럼 손가락, 시선, 고개 등으로 생각에 잠긴 듯한, 뭔가를 암시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 또한 보티첼리만의 개성이다.

 

 

우아한 선의 대가

종교화 중에서 보티첼리가 가장 많이 그리고 대중적으로도 가장 인기를 끌었던 주제는 성모자상이다. [찬가의 성모 Madonna of the Magnificat]는 성모상의 화가라는 보티첼리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기여한 그의 가장 유명한 성모자상으로, 화가의 생전에도 인기가 있어 수많은 복제본과 모사본이 나돌았다.

 

[찬가의 성모] 1481년
패널에 템페라, 지름 118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원형의 화면 안에 성모자와 성모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있는 두 명을 포함한 다섯 명의 천사가 등장한다. 수난과 부활을 상징하는 석류를 손에 쥔 아기 예수의 도움을 받아, 성모는 천사가 들고 있는 잉크병에서 꺼낸 펜으로 책에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책 오른쪽에 ‘Magnificat’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이는데 이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로 시작하는 마리아의 기도(누가복음 1장 47-55절)의 라틴어 첫 단어이다. 책의 왼쪽 페이지는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감사 기도(누가복음 1장 68-79절)가 적혀 있다.

 

이 그림이 원래 있었던 곳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원형 그림은 제단화로는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 저택이나 길드 건물 내부, 특히 원형의 창 옆에 걸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직으로 선 인물들을 원형의 패널 안에 조화롭게 배치한 구성력도 뛰어나지만, 인물의 감미롭고 우수를 띤 분위기가 신비로운 감동을 준다. 마리아는 당대 이탈리아의 금발 미인이고 청소년 연령의 천사들도 당대의 복장을 하고 있지만, 사실적인 느낌을 주기보다 궁정적인 이상미를 보여준다. 천사의 머리카락, 천과 베일에 사용한 풍부한 금과 정교한 세부묘사는 스승인 필리포 리피의 영향이다. 스승에게서 배운 중요한 것 하나는 견고하고 깨끗한 선으로 드로잉하는 방법이다. 보티첼리는 ‘선의 대가(Master of line)’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유려하고 섬세한 선에 능했는데, 이 작품에서처럼 그의 선은 인물의 명확하고 깔끔하고 우아한 형태를 만들어 냈다.

 

1481년 말에 보티첼리는 로마로 갔다. 교황 식스투스 4세 (Sixtus Ⅳ, 재위 1471~84)가 1479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따 바티칸 궁 내에 건축한 시스티나 성당(Sistine Chapel)이 완성되어, 내부의 벽화를 그리기 위해 페루지노, 기를란다요, 코시모 로셀리와 보티첼리를 로마로 부른 것이다. 이곳은 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 회의(conclave)가 열릴 곳으로, 구약성서에 나온 솔로몬 성전의 치수대로 지어졌다. 보티첼리는 프레스코화[모세와 이드로의 딸들], [코라의 징벌], [그리스도의 유혹]을 그리고 11명의 교황 초상 드로잉에도 참여했다. 1482년 가을에 로마에서 피렌체로 돌아온 보티첼리는 완벽해진 자신만의 회화 언어로 절정의 기량을 펼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것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대작 [봄 Primavera]이다.

 

 

새롭게 그려진 인문주의적 시

[봄]과 [비너스의 탄생]은 우피치 미술관 앞에서 줄을 선 피렌체 관광객들이 꼭 만나고 싶어하는 스타이자, 르네상스의 대중적인 아이콘이다. 학문적으로는 1893년 바르부르그(Warburg)의 선구적 연구 이래 서양미술사의 어떤 그림보다 다양한 해석을 낳은 난해한 작품이기도 하다.

 

[봄] 1482년경
패널에 템페라, 203×315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 The Bridgeman Art Library - GNC media, Seoul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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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Primavera]이 최초로 걸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조카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Lorenzo di Pierfrancesco de’ Medici)의 피렌체 저택의 소파 겸 침대의 등받이 위 벽이다. 1482년에 있었던 그와 세미라미데 아피아니(Semiramide d’Appiano)의 결혼을 기념해 메디치 가문에서 주문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작품은 16세기부터 봄이라는 제목으로 불렸고 큐피드비너스가 그림을 지배하는 것으로 보아, 넓은 주제는 ‘비너스의 정원 곧 사랑의 정원에 찾아온 봄’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림에 등장하는 9명의 인물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교(異敎) 신화의 주인공들이다. 화면 중앙에 사랑의 여신이자 4월의 신 비너스와 큐피드가 있고, 비너스를 수행하는 삼미신(Three Graces),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두 마리 뱀이 휘감은 지팡이(caduceus)로 구름을 흩고 있는 신들의 전령이자 5월의 신 머큐리(Mercury)가 화면 왼쪽에 보인다. 화면 오른쪽에서는 바람의 신 제피로스(Zephyrus)가 봄의 님프 클로리스(Chloris)에게 접근하고, 이에 놀란 클로리스의 입에서는 비명 대신 장미꽃이 쏟아지고, 클로리스는 봄의 여신 플로라(Flora)로 변신한다. 인물의 자세와 동작이 나무의 형태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곧게 서 있는 좌측의 인물들 뒤쪽 오렌지 나무는 곧게 서 있고, 오른쪽의 구부러진 월계수는 달아나는 님프의 자세와 유사하다. 중앙의 오렌지 나무는 비너스의 머리 위에서 반원의 아치를 만들며 후광처럼 여신을 둘러싼다.

 

등장인물 각각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이렇게 간단하다. 문제는 상호 작용이 없는 좌, 우, 중심의 그룹들이 함께 모여 있는 이유이다. 전체 등장인물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고대부터의 여러 책들이 해석의 열쇠로 언급되었으나, 이 그림에 딱 들어맞는 근거 문헌이나 내러티브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림에 그려진 170종, 500여 개의 꽃이 가진 의미를 파악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오렌지(mela medica)가 메디치가를 상징한다는 것, 오른쪽 가장자리 월계수(laurus nobilis)는 신랑 이름 로렌초(라틴어로 Laurentius)를 연상시킨다는 것 말고는 별 수확이 없었다. 즉 보티첼리는 기존의 신화나 특정 문헌에 나오는 이야기에 대한 삽화를 그린 것이 아니라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세네카, 루크레티우스 등 고대의 여러 작가들의 작품에서 재료를 취해 자신만의 새로운 시를 창조해낸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의미보다 확실한 것은 보티첼리가 전통적으로 르네상스의 전형으로 생각되어온 사실주의와 서사에 초점을 맞춘 관습을 모두 무시한 새로운 대형 회화를 창안했다는 것이다. 동료 화가들이 원근법적 공간을 구축할 때 그는 깊이감 없는 얕은 공간을 만들었고, 해부학에 충실한 조각적인 인물들이 탄생하던 시대에 사지가 비정상적으로 길고 무게감 없이 둥둥 떠다녀 발아래 밟힌 꽃이 하나도 없게 만드는 비현실적인 인물을 그려냈다.

 

보티첼리의 양식은 고딕 말기인 14세기에 유행한 ‘국제 고딕’이라는 궁정 양식과 고전 고대 양식을 혼합한, 새로우면서도 오래된 양식이다. 이는 메디치 궁정이 선호한 양식이기도 했다. 보티첼리 특유의 유연한 윤곽선은 이러한 양식으로 그려진 인물에 온화하고 고요한 리듬감을 부여했다. 이 인물들 역시 당대의 의상과 장신구, 머리 모양, 신체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보티첼리가 창조한 미인들은 단테베아트리체, 페트라르카라우라처럼 그와 같은 공간, 같은 시대를 살고 있었다. 보티첼리가 그려낸 시도 메디치 서클의 폴리치아노의 작품처럼 라틴어가 아니라 당대의 이탈리아어로, 특유의 서늘하고 우아한 에로티시즘 가득한 문체로 씌어졌던 것이다.

 

 

사랑의 봄, 르네상스 아이콘의 탄생 

[비너스의 탄생] 1484년경
캔버스에 템페라, 180×280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 The Bridgeman Art Library - GNC media, Seoul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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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서 회화적 형태를 얻은 사랑의 시는 [비너스의 탄생 Birth of Venus]에서 만개한다. 두 작품의 주제는 동일한 것으로 ‘사랑의 봄이 온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는 고대 로마 이후 처음으로 실물 크기에 가까운 여성 누드가 등장한다. 작품의 제작 시기나 후원자, 제작 계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1540년경부터 [봄]과 함께 메디치가 소유한 카스텔로의 별장(Villa di Castello)에 있었다. 1900년대부터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불렸으나 도상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신화에 의하면 비너스는 크로노스가 잘라서 바다에 버린 우라노스의 생식기 주위에서 생긴 물거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바다의 물거품에서 태어난 비너스(venus anadyomene)’ 도상은 고대 그리스 화가 아펠레스가 그려서 유명해졌다. 보티첼리의 작품에 보이는 비너스는 탄생한 지 한참 지나 한 섬(키프로스 혹은 키테라)의 해안가에 도착하는 모습이다. 비너스는 님프(클로리스 혹은 산들바람인 아우라의 의인화)의 포옹을 받은 바람(제피로스)에 실려 오고, 여신(플로라 혹은 포모나 혹은 호라이)이 붉은 외투를 가져와 그녀를 맞는다.

 

비너스의 눈썹 모양, 사과 같은 가슴, 금발 머리 등은 당대의 미인형이나, 그녀의 동작과 자세는 고대 조각을 연구한 결과이다. 한쪽 발에 무게중심을 실은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자세에 두 손으로 가슴과 음부를 가진 ‘정숙의 비너스(venus pudica)’ 동작은 ‘메디치 비너스’라 불리는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 등을 참고한 것이다.

 

작품의 양식은 [봄]과 마찬가지로 원근법이나 해부학을 무시한 국제 고딕 양식에 가까운 장식적 궁정풍이다. 제피로스와 님프의 사지는 설득력이 없게 겹쳐져 있고, 비너스의 왼쪽 팔은 어깨가 아니라 겨드랑이에 붙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인물들을 그려낸 굽이치는 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느낌을 매혹적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보티첼리의 비너스에서는 중세 그림에는 없는 관능성을 느낄 수 있는데, 그의 명료한 윤곽선은 여기에 냉정한 거리감을 더해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불안한 시대의 종교화

1492년에 로렌초 일 마니피코가 사망하고 1494년에는 샤를 8세의 프랑스가 피렌체를 침공했다. 1495년에는 메디치가가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는 1490년대 내내 메디치가의 사치를 비판하며 이 도시에 닥칠 징벌과 임박한 종말을 경고하는 설교를 했고, 국가의 위기 속에서 이에 동조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보티첼리도 그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보티첼리 형제 중 한 명은 사보나롤라 추종자인 울보파 곧 피아뇨니(piagnoni)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피아뇨니는 그 반대파인 분노파 곧 아라비아티(arrabbiati)와 도심에서 격렬한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사보나롤라의 과격한 행동은 교황과 다른 성직자들의 반감을 사 그는 1498년에 화형을 당했다.

 

보티첼리의 1490년대의 작품에서는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불안함, 긴장감이 두드러지고 그전에는 미묘하게 암시만 되었던 인물의 감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세속 주제의 그림도 줄어들고, 종교화에 있어서도 단순하고 고졸한 방식으로 미학보다는 의미 전달에 중점을 두었다.

 

고문서 채식장식가인 도나토 디 안토니오 치올리가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Santa Maria Maggiore) 성당을 위해 주문하여 제작한 [죽은 그리스도를 애도함 Lamentation over the Dead Christ]은 화가의 말기 양식을 보여주는 종교화이다.

 

그림의 배경은 석관이 있는 바위 무덤 앞이다. 인물들은 뒤가 막혀 답답한 느낌을 주는 좁은 공간에 십자가와 비슷한 모양을 이루며 겹쳐서 배치되어 있다. 죽은 예수의 시신을 본 마리아는 혼절했고 그녀를 요한이 힘겹게 부축하고 있다. 요한 위쪽의 아리마대 요셉은 가시 면류관과 못을 들고 비탄에 잠겨 의문에 찬 표정으로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발을 끌어 안고 있고, 다른 마리아 중 하나는 얼굴 전체를 가리고 울고 있다.

 

이전 작품의 장식적인 세부묘사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감상주의이다. 인물의 감정은 절망적인 몸짓과 표정, 육중하게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신체의 곡선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이 그림을 주문한 치올리 가문 사람 중에 피아뇨니(울보파) 회원이 둘이나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이 사보나롤라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종교적 열정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죽은 그리스도를 애도함] 1495년경
패널에 템페라, 107×71cm, 폴디 페촐리 미술관, 밀라노

 

보티첼리 말년 20여 년은 피렌체 회화가 급격히 발달하여, 그보다 7살 어린 레오나르도, 30살 어린 미켈란젤로가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만들어냈던 시기다. 하지만 그는 1500년 이후에는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생전에 이미 지나간 시대의 실망스럽고 슬픈 유물 취급을 당했다. 1502년에는 제자와의 동성애 혐의로 고발되기도 했다. 16세기에 바사리는 보티첼리가 “말년에는 일도 못하고 똑바로 설 수도 없어 목발을 짚고 다니다가, 병들고 노쇠해져 세상을 떠났다”고 썼다.  

 

1860년대에 피렌체에서 그의 대표작들이 대중에게 처음 공개되고 영국, 독일, 프랑스, 스페인 미술관들도 그의 작품을 소장하면서 대중과 전문가의 주목이 시작되었다. 1870년대에 존 러스킨(John Ruskin)이 그를 주목했고, 1873년에 월터 페이터(Walter Pater)의 에세이, 1893년 바르부르크의 논문이 나오면서 재조명이 본격화했다. 작가들 중에는 라파엘로로 대표되는 아카데미 회화에 염증을 느끼던 영국의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s), 독일의 나자레파(Nazarenes)와 탐미주의자들이 보티첼리가 만들어 낸 모호한 표정의 여성상에서 세기말적인 우수 어린 미의 전범을 발견했다.

 

 

 

김진희 / 미술평론가
연세대학교 신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9년부터 전시기획과 문화예술행정 분야에서 일하면서, 관람자의 눈에 근거한 미술 비평을 시도해 왔다. 미술, 역사, 제3섹터에서의 활동에 관심이 있고 이들의 접점을 찾는 중이다.

이미지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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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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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박미숙(문교10) | 작성시간 10.10.08 공부를 하고 그림을 다시 보니 새로운 시선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번 출석수업 참 좋았죠?
  • 답댓글 작성자심기정(문교10)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10.09 제 초상화를 보티첼리나 티치아노에게 맡겨볼까 합니다^^(이번 경기 출석중간시험 3문제중 하나가 자신의 초상화를 어떤 화가에게 맏길건가?입니다.물론 그화가에게 맏기는 적나라한 설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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