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추억
글 / 정성헌
광주천에 노을이 분홍빛 물감을 풀어놓은 사간이다. 집에서 500m쯤 떨어진 광주천 변 길을 걷는다. 바람이 깃드는지 나뭇잎이 흔들린다. 멀리 보이는 산들과 천변의 건물들이 자취를 감춘 햇빛에 형체를 잃어가는 시간에도 치평동과 유덕동을 잇는 징검다리 어로를 지키고 있는 쇠백로 한 마리 미동이 없다. 무슨 사연이 있어 저토록 흐르는 물만 바라보고 있을까.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늘어뜨리고 잇던 날갯죽지를 오므리더니 몇 걸음 옆으로 옮겨 머리만 주억거릴 뿐, 도망을 가지 않는다. 쇠백로는 이미 사람들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을 아는 듯하다
나의 유년 시절에는 행정구역상 이름이 특이한 학다리라는 곳에서 부모님이 동네에 하나뿐인 구멍가게를 하셨고 구멍가게는 나에게 화수분 같은 곳으로 당시엔 아무나 먹을 수 없었던 귀한 사이다와 오징어를 먹을 수 있었고 눈깔사탕과 센베과자와 둘둘 말린 이불 빵 등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판자로 대충 엮어 만든 좌판 아래로 가끔 사탕이라도 한 알 떨어져 있으면 티 나지 않는 수확물이 내 주머니나 입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보낸 호시절도 잠시, 행정구역이 완전히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소년 시절을 바닷가에서 살게 되었다. 그곳은 여름이 오려는 이맘때쯤 개어덕(바닷가)에 가면 도요새가 칠게를 쫓으며 뻘밭을 발 빠르게 누비고 들에서는 뜸부기가 울었고 황새골 절벽에 구멍을 파서 집을 지어 알을 낳고 부화한 새끼에게 먹일 물고기를 잡아 오는 파랑새목 물총샛과인 깃털이 아름다운 호반새를 보며 자랐다. 그래서 지금도 물가에 가거나 새들을 보면 내 유년의 추억이 살아난다. 소년 시절에 이사한 곳은 무안 벌포라는 곳으로 간척지가 만들어지기 이전 절리(사마리)라는 마을 앞에 태봉 천이 흐르는데 할머니를 따라 학다리에 큰 집과 몽탄에 사는 고모네 집에 오가면 징검다리만 있는 태봉 천을 건네야 했는데 밀물을 만나면 물이 가슴이 넘게 차올라 오고 갈 수가 없는 상황에 2Km쯤 떨어진 상류인 남안리까지 걸어가 얕은 곳을 건너 태밑재를 넘어 집에 오곤 했다.
태봉 천에 도대로를 연결해주는 사마교가 생기기 전, 70년대 초반까지 사람들은 나와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와 동행하여 건널 때처럼 남안리 앞에 다리를 돌아 건너거나 썰물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건너는 방법밖에 없었다. 국도 1호선 광목 간을 오가는 버스를 타려면 어린 나이에 청천리까지 십 리를 걸어야 하는데 사마리(절리)에 다다랐을 때 밀물의 수위가 높아져 있으면 낭패였다. 나룻배라도 있으면 뱃삯을 치르면 냇물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건너겠지만 나룻배도 없으니 시간을 맞춰 차를 타고 내려 오가며 운이 좋으면 썰물을 만나 쉽게 건너고 운이 안 좋으면 두어 시간을 기다리든지 2Km를 더 걸어야 했다. 밀물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학다리와 달리 발포에서는 그리 넓지 않은 하천 때문에 삶의 모습들이 물처럼 들어오고 흘러가고 했으니, 이름하여 강제비도 판을 쳤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에게 들었다. 이들은 옷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네나 어린이들을 강의 낮은 곳을 택하여 업어서 냇물을 건네주는 일을 하였다. 음흉한 강제비들은 여염집 아낙이나 처자의 엉덩이 받쳐 든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여인들의 괴성을 자아내기도 했다고 한다. 덧붙여 과부댁들이 일부러 강을 건너기 위해 온다는 풍문까지도 있었었으니 태봉 천은 바다로 흘러가는 냇물만큼이나 사연이 많은 곳이다.
바닷물이 밀물 때 냇물이 불어있으면 나는 할머니와 낮아질 때까지 기다리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썰물로 냇물이 낮아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바다로 빠져나간 바닷물이 얕아지면 바지를 걷어 올리고 건넜다. 작은 키에 냇물이 겉은 바짓단까지 닿으면 옷이 젖을까 두려움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막네 고모네 밥상은 우리 집 꽁보리밥과는 달리 하얀 쌀밥이었다. 동생의 큰아들인 나를 유난히도 챙겼던 고모가 좋았고 살갑게 대해주는 고종 누나와 형들이 좋았다. 그 때문에 방학 때는 물론이고 틈만 나면 걸어서라도 고모 집에 갈 생각만 했었다. 논농사를 짓는 고모 집에 가면 쌀밥은 물론이거니와 텃밭에 심어 놓은 단 수수를 군것질로 먹을 수 있었으니 나는 도강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러나 겨울에 큰 집과 고모 집에 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태봉 천 냇물이 꽁꽁 얼면 건널 수 있지만, 바닷물이 드나들어 얼지 않고 차가운 냇물에 발을 쉽게 담글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집과 고모 집에 가는 것은 주로 여름방학에 이루어졌다.
나룻배로 강을 건너고 바짓단을 걷어붙이고 냇가를 건너던 시절을 거쳐 70년대 초반인 내 사춘기 시절만 해도 시골에는 마을에 찾아온 보따리 장사에게 잠잘 곳과 저녁 끼니를 제공할 만큼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했고 믿진 다는 장사를 하면 무조건 돈을 벌던 시기였고 도회지 물을 먹은 젊은이들이 시골에 사는 처녀들을 희롱했고 일명 논두렁 깡패라 불리는 시골 면사무소를 지키는 방위들이 저녁이면 퇴근하여 마을을 휘젓고 다녔었다.
톱머리 간척공사와 함께 사마교가 생긴 후부터는 고모 댁과 큰 집은 지척이 되었다. 그러나 큰어머니와 큰아버지, 그리고 고모님은 지금은 돌아가셨다. 이후 간척지는 논과 골프장으로 변하고 바다가 없어지면서 도요새와 호반새도 마저 사라지게 했다.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쇠백로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등산 기슭을 기대어 숨을 돌린 노을과 영산강을 만나기 위해 숨차게 흐르는 광주천 물을 따라 내 유년의 기억도 함께 흘러가며 희미해져 간다. (‘260611)